소설리스트

견마지로-68화 (68/226)

68. 호광 무창(15)

당태세의 말을 듣고 있던 진언표는 한참동안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더니 참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곤을 낚아채고는 바람처럼 후원을 빠져나갔다.

당태세도 부리나케 목발을 짚고 사내의 뒤를 따랐지만 견정문 내에서 자신의 신법을 다 보일수도 없었던지라 한참 떨어진 곳에서 부리나케 목발을 짚고 따라가는 시늉을 낼 수밖에 없었다.

견정문의 후원을 따라 나 있는 넓은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견정문의 건문들과는 또 다른 양식으로 지어져 있는 장원 하나가 드러났다.

비록 건물의 담과 지붕 자체는 견정문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치더라도 어지간한 부상대고(富商大賈)의 안채와 맞먹는 건물이었다. 그제야 당태세는 문 앞에 붙어 있는 진가약실(陳家藥室)이라는 편액을 볼 수가 있었다.

“소문주, 아무도 정한 자 외에는 들이지 말라 하였습니다.”

성큼성큼 약실의 대전 앞으로 다가서는 진언표의 앞에 네 명의 견정문도가 앞을 가로막았다. 당태세가 보아 하니 지금 본전을 지키고 있는 네 명은 보통 견정문도와는 기도 자체가 다른 이들이었다. 분명 본전을 지키는 호법들이 틀림없었다.

아직 그들은 젊었고, 그들 중 누구도 당태세의 눈에 익은 이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었다.

분명 견정문의 본전 앞에 있는 호법 중의 늙은이들은 당태세의 용모를 알거나 그 기색을 알아챌 수 있는 이가 존재할 지도 몰랐다. 당태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차, 진언표의 성난 얼굴이 네 명의 호법을 향하였다.

“이 곳에 문주님이 드신 것이 맞느냐.”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손님 또한 들어갔을 것이다. 내 그가 타고 온 마차를 보았다.”

“대담 중이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들어가 봐야겠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너희들은 모르느냐!”

“소문주.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이놈들이!”

순간 진언표의 손이 곤을 꽉 쥐었다. 앞에 있던 내 명의 호법은 순간 움찔하며 자신의 허리에 찬 쇠봉을 꺼낼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넷 모두 차마 봉을 뽑아 소문주를 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는데, 뒤에서 노인의 나긋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문주께서는 곤을 맡겨 놓으시고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바로 당태세의 목소리였다.

시비를 가리던 다섯 명이 동시에 노인을 바라보았다. 당태세는 여유롭게 천천히 목발을 짚고 걸어오면서 소문주 진언표를 보고 다시 한 번 말하였다.

“곤을 여기에 맡기고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안에서 절대 외인과 시비를 거시면 안 됩니다. 그저 말만 듣고 나가겠다 확언하시면 이들도 소문주를 들여보낼 것이오.

노인은 차분한 어조와는 달리 돌같이 굳은 표정과 차가운 눈매로 소문주를 둘러싼 호법들을 둘러보는데, 감히 누구 하나 나서서 노인에게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진언표가 당태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곤을 바닥에 내던졌다.

“노야의 말대로 할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야. 들어가도 되겠느냐?”

“아니… 저…….”

어느새 땀이 흥건하게 젖은 호법의 앞에서 다시 당태세가 말하였다.

“내가 소문주를 보좌하겠네. 그런 일은 없을 것이야.”

“내가 보증할 수 있는 어른이시다. 염려 놓아라.”

이미 호법 네 명은 뾰족한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있었다. 호법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쪼록 무탈하게 나오시옵소서.”

진언표가 고개를 끄덕이고 진가약실의 본실을 향해 몸을 옮겼다. 그와 함께 당태세도 진언표의 뒤를 따랐다. 멍하니 그들 뒤를 보고 있는 호법들의 눈초리를 느끼며 당태세는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도록 진언표에게 충고를 하였다.

“일단 소문주는 바로 대전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벽 뒤에서 나누는 용건을 들으시오.”

“그것이 필요합니까?”

“우리가 잘못 짚은 것일 수 있소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풍문을 듣고 온 것, 실수를 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소?”

진언표가 당태세의 말을 듣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야가 아니셨으면 오늘 큰 실수를 연달아 할 뻔 했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지요.”

두 사람은 햇살을 피해 굵은 기둥과 처마가 우거진 또 다른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언제 무슨 소동이 있었냐는 듯 진가약실 앞의 안마당은 폭염 아래 조용하기만 하였다.

***

진가약실의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석굴과 같이 깊은 문루의 통로가 나왔고, 그 통로를 지나가자마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는 벽돌로 만들어진 성벽이 사면을 감싸고 있었다.

앞에 보이는 본청은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는 이층의 누각이었는데 정면의 누각을 제외한 나머지 벽들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이곳이 약방의 본청인지 황성의 일부인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당태세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만약 이곳에 병사를 세워두고 진윤타가 당태세를 맞이하였더라면 사방에서 우겨 쌈을 당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진윤타는 귀중한 사람을 만나며 은밀한 내용을 나누기 위함인지 본청의 내정(內庭)에는 사람을 배치해 놓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층 누각에서 아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입니다. 노야.”

“조용히 올라가세. 위로 통하는 문 앞에서라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네.”

진언표가 당태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사람은 기척을 죽이고 그림자가 땅에 드리워지듯 소리 없이 안마당을 가로질러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가파른 계단을 소리 없이 올라간 두 사람은 굳게 닫혀 있는 문 앞에서 잠시 숨을 멈추었다. 당태세는 호흡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목괴를 내려놓은 뒤 손을 뻗어 문에 찰싹 붙이고는 손등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가 대었다.

아주 세미하지만 분명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그의 손과 머리를 통해 울려왔다. 당태세는 호흡조차 거의 멈춘 채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번 일의 발단이야 어찌되었든 그 결말은 심히 맘에 들지 않소이다. 진문주.”

상대편의 언사는 정중했지만 말의 내용은 거칠고 다분히 공격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처하는 진윤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정중하고 매끄러웠다.

“그쪽에 심한 손해를 드린 것은 사과드리오. 제 자식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엄중하게 말하리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더 손해를 입어야 하는지도 의문이고…….”

그 순간, 젊고 거침없는 목소리 하나가 더 끼어들어와 진윤타를 압박했다.

“무창신룡이 한 번 더 이런 패악을 부린다면 그때는 고영약당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알고 있습니다. 제 아들이 무창신룡이라 불린다면 고영약당에도 적면사자(赤面獅子)가 있지요.”

급작스레 끼어든 젊은이의 별호가 적면사자인 모양이었다. 은은하게 벽을 타고 들어오는 젊은이의 목소리에는 내공이 실려 있었다. 의외로 정순하고 웅혼한 내공이었다.

당태세가 슬쩍 눈을 뜨고 진언표를 바라보았지만 진언표는 눈을 감은 채 방 안의 대화를 듣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시 진윤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늘 그랬듯이 우리가 갈등은 있으되 손해는 없을 것이오. 갈등도 조만간 해결될 거요. 제 아들에게 슬슬 견정문의 내부를 감독시킬 작정입니다. 그리되면 외부의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외다.”

“문주님, 그래서 이번 일은 어찌 해결하시겠습니까?”

상대편도 슬슬 누그러지는 어조로 진윤타에게 말을 걸자 진윤타는 이미 계획을 짜 놓은 술술 말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고영약당의 부두 하나를 잃었다고 이야기가 나오는 김에 약재 가격을 다시 올립시다. 모든 약재는 다 올릴 수 없으니 조금씩 올리기로 하고…일단 천궁(川芎)과 당귀(當歸)는 십오 문에서 이십 문으로, 황기(黃芪)는 십팔 문에서 이십 문정도면 어떻겠소?”

“삼칠(三七)은 팔십 문에서 팔십오 문이나 구십 문까지 올려도 될 듯합니다. 고가지만 요즘 찾는 이가 늘었소.”

“역시 고대가께선 보시는 눈이 있으시군요.”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는 것은 가까스로 눌렀다. 안에서 벌어지는 대화는 다툼의 해결이 아닌 새로운 가격의 담합이었다.

이미 나올 내용이 무엇인지는 감을 잡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이 나오는 것을 듣자 당태세는 욕지기가 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도협 진윤타.

저 인간은 분명 십칠 년 전, 이자성의 막사에 들어가 팔대문파를 대표해 지금과 같은 어조로 상대와 이득을 저울질하며 황제와 순천문을 팔았을 것이다.

그리고 산해관을 뚫고 나온 청군을 맞이하여 똑같은 어조로 서로의 이득을 취하며 살길을 강구했을 것이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십칠 년 전에도 동일하게!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 정도로 하고 택사(澤瀉)와 해마(海馬)는 일주일쯤 뒤에 오 문씩 더 올리는 것으로 잡읍시다.”

“그러시지요. 한 달쯤 뒤에 다시 고영약당이 부두를 되찾으시면 다른 자잘한 약재들도 오 문 정도는 똑같이 올리는 걸로 하시지요.”

“좋습니다.”

그때였다. 갑자기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당태세의 옆에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당태세가 눈을 떠보니 이미 진언표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당태세가 입을 벌리고 손을 뻗었지만 차마 안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찰나, 진언표는 아버지 진윤타가 앉아있는 자리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순간, 손님으로 왔던 사내 둘 중 젊은 사내 하나가 앞을 가로막으며 진언표를 향해 일갈을 날렸다.

“무례하구나!”

“비켜라!”

순간, 두 사람의 인영이 하나로 뭉치는가 싶더니만 주먹과 발이 살벌하게 바람소리를 내며 서로 엉겨 붙었다.

당태세는 문 밖에서 이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무창신룡 진언표의 권격은 견정문의 초식을 견실하게 답습하여 치밀하기 그지없었고, 그와 함께 붙어 싸우는 고영약당의 젊은이 역시 현란하게 몸을 흔들며 팔과 다리를 놀리는데 그 출수가 자못 예리하기 짝이 없었다.

당태세는 눈을 크게 뜨고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형문의 천충일권.”

순간 진윤타가 탁자를 두 손으로 치며 두 젊은이에게 일갈을 날렸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어른들의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건만!”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강맹한 기운이 방 안을 진동시키자 두 사내가 합을 맞춘 듯 서로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진언표가 당황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는데, 정작 앞에 앉아있던 고영약당의 사내는 슬쩍 일어서더니만 진윤타에게 인사를 하고 같이 온 젊은이를 달래었다.

“이거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군요. 견정문주. 일단 저희끼리 한 약조는 이뤄진 것으로 보고 여기서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소문주는 언행을 삼가는 게 좋은 것이오.”

고영약당의 사내들은 천천히 진가약실의 본전을 빠져나갔다. 당태세는 이들을 이 자리에서 없애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이들을 없애고 안에 들어가 진윤타와 진언표까지 같이 없애는 게 맞는 것인지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고개를 돌려 진유타와 대치하고 있는 진언표를 쳐다보고는 신음을 내며 자신의 목괴를 꽉 쥐였다.

“아버지, 이게 뭐하시는 것입니까! 어찌된 일입니까! 고영약당과 이문을 나눈다고요?”

“이미 너도 짐작하고 있던 일 아니냐?”

싸늘하게 아들을 쳐다보는 진윤타의 눈빛은 당태세가 예전에 알고 있던 그 진윤타의 눈빛이었다. 진언표의 격정에 찬 목소리가 다시 천정을 울렸다.

“아닙니다! 몰랐습니다! 어찌 우리 무창의 약업(藥業)을 하루아침에 도말해버린 고영약당과 한 지붕 아래 있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잘 들어라 언표. 저들의 뒤에는 팔기 순무가 있어. 사람은 세를 보고 몸을 유연하게 굽히고 펴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저들에게 맞서 봤자 결국 손해는 우리만 보게 되는 것이 아니냐!”

“그 대가는 백성들과 의원들이 치르게 됩니다!”

“그들도 우리가 살아남아야 제대로 된 약재를 받는 것이다! 그게 어찌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냐?”

“그래서 돈을 점점 받아 올려요? 결국 악재 값을 올리고 고영약당과 둘이서 의자들을 착취하겠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네 이놈!”

진윤타가 다시 한 번 노호성을 지르며 아들을 보았다.

“네가 작은 단편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우(愚)를 저지르는구나. 대저 한 자리의 문주가 되려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고, 전체를 위해 일부를 내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고서야 어찌 네가 우리 기틀을 보전하겠느냐!”

“진가약실과 견정문이 대(大)이고 무창의 의자들과 백성들이 소(小)입니까?”

“뭣이?”

진언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힘없는 자를 돕고 불의를 지나치지 않으며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지 않음이 군자이며 협객의 도리라고 저는 배웠습니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까? 누가 불의이고 누가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까? 백성입니까? 고영약당입니까? 아니면 우리입니까?”

“네 이놈!”

진윤타가 다시 소리를 질렀지만 진언표는 이제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저는 제가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살 것입니다! 견정문과 진가약실의 이름은 그저 제게는 떠도는 부운(浮雲)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언표! 소문주!”

순간, 진언표가 방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당태세는 급히 자신의 얼굴이 보일까 등을 돌린 채 진언표를 따라 진가약실의 밖으로 나왔다.

진언표는 진가약실을 떠나 미친 듯이 무작정 앞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를 뒤따르던 당태세는 허둥지둥 그를 쫓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보시오 소문주! 이제 따라오는 이는 없소이다! 어디로 그렇게 급하게 가는가!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굳게 먹고….”

당태세는 그제야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는 진언표를 보고는 말을 멈추었다. 아니, 말을 채 맺지 못하였다. 당태세를 바라보고 있는 진언표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사내에게 뻗어보았지만 이내 다시 손을 거둬들이고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진언표의 흐느낌이 당태세의 가슴을 후벼 팠다.

참으로 기묘한 감정이 강철 같은 노인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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