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호광 무창(13)
당태세와 마주보고 있던 검객의 얼굴에선 이제 여유로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새 딱딱하게 가면처럼 굳어버린 얼굴을 하고 있는 검객을 노려보며 당태세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사형문은 이제 그 터전을 섬서의 서안으로 잡았다던데 왜 호광까지 내려왔느냐?”
당태세의 말에 검객은 기가 차다는 듯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대체 네놈은 누군데 내 검법과 내 문파의 연혁을 줄줄이 꿰고 있는 거냐?”
“네놈의 장문 무정금(無情襟) 유독중(柳篤仲)에게 원한이 있는 자다.”
“그렇다면 후환을 없애야겠군.”
검객은 다시 칼을 거둬들이고는 뒷짐을 지었다. 검객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으며 당태세의 움직임을 조심스레 지켜보기 시작했다. 좀 전과 같은 가벼운 보법은 지양하고 들어오는 적의 출수는 맞받아치겠다는 움직임이었다.
이번에는 당태세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괴를 앞으로 내밀고 오른발을 뒤로 뺀 채 마치 갈퀴로 땅을 긁는 듯한 모습을 하며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늙은 고수의 눈은 검객의 눈과 마찬가지로 절대 상대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사형문은 왜 무창까지 사람들을 보내는가.”
“의뢰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우리가 있다.”
“유독중이 충룡문주 주통산처럼 돈에 눈이 멀었는가?
당태세의 이가 드러났다. 검객은 슬쩍 당태세의 다가오는 발을 곁눈질하면서 당태세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우리는 돈이 아니라 명성이 필요하다.”
“명성. 그게 왜 필요하냐?”
“명성이라기보다는 위명(威名)이 필요한 것이지. 천하를 뒤흔들 위명이.”
“그 늙은 독사가 다른 꿍꿍이를 꾸미는구나.”
“문주를 욕보이지 말라.”
“어린놈이 쓸데없이 고루하구나.”
당태세는 오른발의 통증이 조금씩 시큰대며 무릎과 허벅지를 옥죄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조금 전의 난투가 몸에 무리를 준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 앞에 있는 사형문의 검객은 무공에 절도와 기개가 있는 것이 분명 일가를 이룬 고수였다. 한 번의 실수가 여차하면 죽음으로 이루어질 터였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 다리는 충분히 쓸 수 있었다. 불현듯 밀려오는 통증만 막을 수 있다면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아니, 잡아야 했다.
“그 다리로 날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해 봐야 알겠지.”
“나를 잡아도 우리 문주님을 잡지는 못한다.”
“유독중은 여전히 수련을 하는가?”
“당연하지.”
“그렇다면 십칠 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겠구나.”
두 사람의 말이 끊겼다.
이미 두 사람은 충분히 서로의 병기가 상대를 탐할 수 있는 거리까지 들어간 상태였다. 노인과 청년의 몸이 밤하늘 등불아래 석상처럼 멈춰서 서로의 눈을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몸은 시각이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온몸의 기가 요동치며 사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검과 목괴와 단도에 힘이 실렸다. 검객의 뒤춤에서 빛나는 검이 새의 꼬리처럼 부르르 떨리며 방향을 틀었다.
당태세의 손에 잡힌 채 땅을 향하던 목괴가 먹이를 본 독사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순간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들고 있던 병기에서 살기를 뿜어냈다.
당태세의 목괴가 밤공기를 가르고 검객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순간 사내의 손에 들린 검이 원을 그리며 등 뒤를 타넘듯 앞으로 떨어지며 목괴를 받아치고 그대로 앞으로 뻗어 당태세의 목을 찔렀다.
당태세는 슬쩍 고개를 돌려 들어오는 검세를 피하며 오른손의 단도를 검에 붙이고 그대로 단도를 밀어붙여 검대를 타고 앞으로 전진 해 들어갔다.
검객의 발이 뒤로 빠지며 검이 당태세의 몸을 떠났다. 검객의 몸이 납작하게 엎드리자 당태세의 단도가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객의 검이 강물위로 치솟는 잉어처럼 위로 솟구치며 다시 당태세의 턱을 향하였다.
당태세가 몸을 비틀며 검객의 검을 피했지만 검날은 집요하게 노인을 따라왔다. 검객의 손에 이끌린 검이 비틀리며 당태세의 목을 노렸지만 당태세의 목괴가 들어오는 검을 튕겨냈다.
검객의 손이 허공에서 원을 그리며 검날을 아래에서 위로 쑤셔 박으며 당태세의 옆구리를 노렸다. 하지만 당태세의 몸은 슬쩍 옆으로 한 치 정도 물러나며 매서운 자격을 무위로 돌렸다. 검객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새어나왔다.
“절름발이 옷자락 하나를 못 베다니!”
이번에는 당태세의 눈이 번득이며 목괴를 움직였다.
사내의 손에 들린 목괴가 거꾸로 들리더니 곡괭이처럼 검객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검객의 머리가 목괴를 피하자 순간 당태세의 몸이 쏟아지듯 덮쳐오며 오른손의 단도가 검객의 몸을 파고들었다.
챙하는 소리와 함께 검객의 검이 들어오는 단도를 막아내자 이번에는 다시 목괴가 도끼처럼 검객의 목을 향해 뻗어왔다. 검객은 재빠르게 몸을 뒤로 젖혀 날아드는 목괴의 손잡이를 피하였다.
순간, 목괴가 당태세의 손안에서 휘리릭 돌더니만 목괴를 겨드랑이 사이에 끼는 손잡이가 뒤집히며 검객의 목을 갈고리처럼 걸고 앞으로 휙 끌어당겼다.
변칙적인 공격에 검객이 당황하며 몸을 반사적으로 뒤로 젖히는데, 그 사이를 타고 들어온 당태세의 단도가 검을 빗겨내고 검객의 옆구리를 번개처럼 베어 들어갔다. 순간 왼손으로 목괴를 쳐 올리고 뒤로 구르듯 몸을 젖힌 검객이 뒤로 공중제비를 하며 당태세의 단도에서 벗어났다.
당태세가 그런 검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공부로다.”
땅에 착지하고 겨우 중심을 잡은 검객은 지그시 이를 깨물었다. 검객의 옷자락이 어느새 갈기갈기 베어져 은은한 강바람에 나풀거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검객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당태세는 여전히 등불 아래에 서 있었다.
등불 아래 여기저기에서 이미 숨이 끊긴 고영약당의 고용인들이 누워 있는데 오직 목괴 하나를 받치고 서 있는 변발의 늙은 노인 하나만이 가지런히 호흡하며 오연한 눈으로 검객을 바라볼 뿐이었다.
검객은 이제 칼을 뒤로 숨기지 않았다. 사내는 검을 앞으로 들고 당태세를 지켜보더니 짧게 목례를 올렸다.
“불초 말학의 이름은 초영검(焦影劍) 성낙신이라 하옵니다.”
당태세도 고개를 슬쩍 움직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노후(老朽)의 이름은 당태세. 귀린갈 당태세라고 하네.”
“귀린갈 당태세…….”
“예전 명(明)의 치세일 때 북경 구대문파의 맹주였으며.”
초영검 성낙신의 눈동자가 화들짝 커졌다.
“마지막까지 명의 사직을 지키다가 사형문을 비롯한 팔대문파의 배신으로 명부에 끌려갔다 다시 돌아온 사람일세.”
“배신이라니?”
그제야 당태세는 초영검 성낙신이 아직 앳되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해야 스물두셋, 많아야 스물다섯 정도 될 것이었다. 사형문이 북경에 있을 때 거둬들인 제자는 분명 아니었을 터.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당태세는 성낙신을 바라보다 절로 한숨을 쉬었다.
“어찌하여 늙은이들은 자신의 죄업을 후대에 물리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사형문의 장문인은 명의 국적(國賊)이다. 그자와 동무 일곱이 황제를 지키는 임무를 배신하였고, 그 결과 황제는 자진하였고 이자성이 황도를 함락하였으니…….”
“거짓말 마시오!”
성낙신의 입에서 곧바로 반응이 튀어나왔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었다.
일순간 듣는다 이해될 말이던가. 밤새 이야기한다고 곧이곧대로 인정을 하겠는가.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라 치부할 것인가. 아직 남아있는 원한을 묻으라 할 것인가. 어느 것 하나 서로 부합하여 동의할 일이나 있겠는가.
“나는 처음 보는 너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거짓말 마시오!”
“너는 네 문주의 말을 의심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행하여라.”
초영검 성낙신은 멍하니 검을 쥐고 당태세를 바라볼 뿐이었다. 등불 아래 당태세 역시 미동도 없이 선 채 준엄한 얼굴로 검을 든 자에게 말과 행동, 둘 중 하나를 권하고 있었다.
성낙신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더니 가슴 앞에서 칼을 세우고 칼날을 당태세의 가슴을 향해 뻗어보였다. 당태세 역시 오른손에 쥔 단도를 품에 넣고는 목괴를 앞으로 뻗어 성낙신을 향하였다.
“문주님께 오늘의 일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명부에 가서 네가 한 일을 보고하여라.”
두 사람의 몸이 같이 움직였다. 성낙신의 검이 파르르 떨리며 바람을 가르고 앞으로 뻗어 나가자 둔중한 당태세의 목괴가 성낙신보다 느린 움직임을 타고 앞으로 나가며 사선을 그리며 위에서 앞으로 뻗었다.
한 번의 부딪힘과 함께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환한 등불 아래 칼을 앞으로 뻗은 성낙신은 두 다리를 슬쩍 낮추며 검을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리더니 그대로 검집 안에 밀어 넣었다. 사내는 멍하니 기둥 위에 달려있는 등불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한줄기 핏자국이 미간을 타고 눈 사이로 흘러내렸다. 사내의 입술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거렸지만 이내 싫증이라도 난 듯 입을 한일자도 다물었다. 등불을 쳐다보던 눈도 서서히 감겼다.
검객 성낙신의 몸이 천천히 옆으로 무너져 내렸다.
“제법 격이 있는 자였는데…….”
어둠 속에서 또각또각 목괴를 찍으며 다시 등불 아래로 나타난 당태세는 슬쩍 자신의 도포 앞섶을 들어보였다. 손가락 두 개는 들어갈 만한 구멍 하나가 찍혀 있었다. 실로 간발의 차로 엇갈린 검결이었다.
성낙신을 내려다보던 당태세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내 너에게 무엇을 더 이르리.”
당태세는 등불 아래 쓰러져 있는 사내들을 바라보다가 저 멀리 창고 안에서 아직도 숨을 죽이고 있는 진가약실의 일행들이 생각났다.
그제야 당태세는 오른발을 타고 지릿지릿 올라오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겨우 침을 맞고 다잡아 놓은 다리가 다시 도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남평수가 싫어하겠구먼. 이제 침방에 한 번만 오면 된다고 하였는데…….”
다리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일을 마무리하고 가 보면 어찌되었든 치료는 해줄 수 있는 의원이었다. 그나저나 문제는 수없이 널브러져 있는 고영약당의 시신들이었다.
“이제 창고에 신호를 보내야지.”
당태세는 참고 안에 숨어 있는 이들을 불러 뒤처리나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갑자기 뭔가를 생각하고 무의식중에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괴상한 이야기가 떠오른 때문이었다.
“……진언표가 이 자리에 없을 것이라 예견했단 말이렷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당태세는 다시 쓰러져 있는 성낙신을 바라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뭔가를 더 캐묻는 것이었는데 밤바람에 취하여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당태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이를 먹었더니 영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구나. 할 일을 까먹다니…….”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누군가 고영약방에 진가약실의 일을 전하고 있다는 것. 그것도 아주 소상한 정보를 가져다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더라도 충분히 의심스러운 정황이었다.
“진언표에게 알리는 것이 먼저겠구나.”
당태세의 눈이 등불 아래에서 번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