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64화 (64/226)

64. 호광 무창(12)

어느새 칠흑 같은 어둠이 하늘과 강에 뿌려졌다.

하늘에는 별이 깜박이며 어두운 강물을 비추고 강물은 얼굴을 가리고 등 뒤에서 을씨년스럽게 철썩이며 우는데, 하늘과 강 사이에 등불 하나를 두고 노인하나와 젊은 패거리 여럿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태세는 이죽거리며 등불 앞에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목발로 땅을 짚고 저벅저벅 부둣가의 나무 바닥을 조심스레 찍으며 걸어보이자 그를 보며 인상을 쓰던 사내는 피식 웃음을 머금더니 몽둥이를 어깨에 메었다.

“이제 보니 다리까지 병신일세? 늙은이! 맞아 죽고 싶어서 여기 서 있던 거냐?”

당태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젊은 사내를 보고 웃었다.

“그래, 다리병신에게 네가 맞아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 여기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당태세의 이죽거림을 들은 사내가 이젠 못 참겠다는 듯 어깨의 몽둥이를 고쳐 잡고 앞으로 나섰다. 사내의 번들대는 눈동자가 등불 아래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당태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슬쩍 몸을 바꾸며 사내와 거리를 벌렸다.

“이게 어디서….”

“잠깐 기다려라.”

그 때, 사내의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하나 들려왔다.

몽둥이를 든 사내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당태세는 눈길을 사내의 등 뒤로 돌렸다. 등불 아래 밝은 곳으로 사람들의 윤곽이 밀려오는가 싶더니 개중 한 사내의 몸이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타났다.

어두운 장포를 입고 정갈하게 차려입은 사내의 손에는 기다란 검이 하나 들려 있었는데, 사내의 발걸음은 움직이면서도 소리가 나지 않았고 옷자락 역시 좌우로 흔들림이 없었다. 고수의 기도였다.

당태세의 눈이 순간 검을 든 사내의 얼굴을 향해 움직였다. 평범하니 무표정한 검객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노사. 그대는 진가약실의 사람인가?”

“청부를 받았다고 하세.”

“아.”

검객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앞으로 오른발을 내밀고 뒷짐 진 상태에서 쥔 검을 왼쪽 엉덩이 뒤쪽으로 내밀었다. 마치 쇠로 된 꼬리가 달린 듯한 기묘한 기수식이었다. 당태세는 그 모습을 보더니만 입맛을 다시고 목괴를 똑바로 왼쪽에 끼웠다.

“노사, 그대가 무창신룡 진언표 정도의 실력이 있는가? 그 정도가 아니면 난 굳이 나설 생각이 없네.”

“꽤나 자신만만하구먼.”

검객은 당태세의 비웃음에도 아랑곳없이 고개를 다시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어차피 무창신룡이 없으리라 판단하고 상황을 감독하러 온 것인데 지금은 의외의 경우 아닌가. 이럴 때는 내가 수고를 할 것인지 뒤에서 지켜볼 것인지 판단해야 하지. 괜한 수고는 하기 싫네.”

보신주의가 극에 달한 사내나 할 법한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검객이었다. 당태세는 빤히 검객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곧 나서야 할 것이네.”

“좋군.”

검객은 그제야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발을 옆으로 뻗으며 몸을 숙였다. 마치 여우가 앞에 있는 사냥감을 노리고 취하는 듯한 자세였다.

하지만 사내의 몸은 이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당태세가 손을 들어 그가 취하는 기수식을 만류한 탓이었다. 검객이 슬쩍 인상을 쓰며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무슨 일인가? 이제 와서 발을 빼려는 건 아니겠지? 노인?”

“아니다. 난 그 전에 할 일이 있어.”

“뭐?”

당태세는 손을 가리켜 몽둥이를 들고 맨 처음 접근해온 사내와 그 뒤에 있는 이들을 가리켰다.

“나는 자네 부하들도 같이 없애기로 청부받은 사람이야. 자네는 물론이고. 아무리 잡졸들이라도 살려주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단 말이네.”

“뭐?”

“뭐가 어째?”

검객과 몽둥이를 든 사내의 입에서 동시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몽둥이 사내의 동류로 보이는 이들이 등불 아래로 몸을 내밀며 당태세를 향해 눈을 부라리기 시작했다.

“뭐가 어째 늙은이!”

“네놈이 죽지 못해 환장을 했구나!”

“그래, 우리가 먼저 죽여주랴?”

당태세는 다시 히죽 웃음을 지었다. 그의 예감이 적중한 탓이었다.

저 검객은 부둣가에 같이 들어온 비류들과는 급이 다른 사내였다. 이 자가 진언표가 말한 통령(統領)이라는 사내일 것이고 그 아래 하오문 같은 이들은 고영약당이 부하들로 붙여준 사내일 터였다.

하지만 이전에 붙었던 태원 부운도 같이 절기를 공유하는 이들 같지도 않았다.

분명 이들은 이곳 무창에서 처음 만나 고영약당의 이름으로 한데 뭉친 용병(用兵)일 터였다. 아닌 게 아니라 검객은 당태세의 말을 듣더니 껄껄 웃음을 지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대단한 노익장이구먼. 저들을 먼저 상대하고 나를 상대하시겠다?”

몽둥이를 어깨에 맨 사내가 성난 얼굴을 돌려 검객을 바라보았다.

“이보시오. 조장, 지금 웃을 때가 아니라고! 어찌할 거요? 조장이 가만히 있을 거면 우리가 저 늙은이를 다진 고기로 만들 테요!”

검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시작하게. 자네들이 못 끝내면 내가 그 뒤를 알아서 할 테니.”

“젠장, 잘난 척은! 얘들아, 가자!”

몽둥이를 치켜든 사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에 서 있던 사내들이 한 덩어리 파도가 되어서 당태세를 향해 뛰어들었다. 환한 등불 아래 홀로 서 있는 노인을 향해 어둠속에서 무기를 들고 뛰어드는 사내들의 모습은 마치 먹이를 앞에 둔 들개들의 모습이나 마찬가지였다.

순간, 노인은 왼손에 쥐고 있던 목괴를 땅에 찍는가 싶더니만 몸을 굽히고 땅을 박차며 앞으로 뛰어들었다. 뒤에서 뒷짐을 진 채 이 광경을 바라보던 검객의 눈이 동그래지며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오호라!”

마치 용으로 변하기 위해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잉어처럼, 당태세의 몸이 밀려드는 사내들의 몽둥이와 칼 사이로 파고들었다.

어느새 당태세의 오른손에는 번득이는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노인은 공간을 파고드는 날붙이를 왼손의 목괴와 오른손의 단도를 이용하여 튕기고 막으면서 재빠르게 공격을 지른 사내의 빈틈으로 역공을 가했다.

순식간에 양쪽에서 두 사내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당태세의 몸이 다시 슬쩍 자세를 낮추는가 싶더니 왼손의 목괴가 창처럼 뿌려지며 앞에 있던 사내들의 턱을 후려갈기고 그 사이를 밀치고 들어가 뒤에 서 있던 사내들의 가슴팍과 목에 단도를 박아 넣고 다른 곳으로 몸을 옮겼다.

당태세의 몸은 빛과 어둠 사이를 오가며 번득이는 칼날과 둔탁한 목괴를 번갈아 사람의 육신에 찍어 넣었다. 노인의 손은 한 사람에게 한 번밖에 가지 않았고, 노인의 손이 닿은 사람들은 반드시 쓰러졌다.

투박한 싸움판 안에서 정교한 살상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등불 아래로 모여들었던 사내들의 일진(一陣)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뒤에 서 있던 사내들이 앞으로 밀려 나왔다. 그제야 뒤에 있던 이들은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중이었다.

“이게 뭐야!”

“물러서! 물러나라!”

하지만 어느새 등불 아래엔 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물러난단 말인가.”

음침하게 속삭이는 노인의 음성이 가늠할 수 없는 위치에서 들려왔다. 순식간에 어둠 속에서 바람이 몰려오며 사내들과 목과 가슴을 날카롭게 할퀴며 사라졌다.

격정과 분노에 휩싸여 부두 앞의 등불로 뛰어들었던 사내들의 사이에는 이제 공포와 비명만이 남아 있었지만 이내 그 외침도 잦아드는 중이었다.

맨 처음 몽둥이를 손에 쥐고 당태세를 위협했던 사내는 우두커니 선 채로 자신의 동료들이 속절없이 쓰러지는 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주변에 서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한 사람이 남아 있긴 하였다. 목괴를 왼손에 받쳐 끼고 저벅저벅 태평하게 걸어오는 노인은 숨소리 하나 목발소리 하나 틀어진 것이 없었다.

사내는 지금 자신의 발이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뱀 앞에 서 있는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노인의 흉흉한 눈초리가 몽둥이 든 사내의 눈에 와서 얹혔다.

“내가 살고 싶으면 달아나라 하지 않았더냐?”

“사… 살려주십시오….”

“인생에 기회가 두 번 주어지더냐.”

“제발….”

사내는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였다. 왼손에 잡혀있던 목괴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뻗어와 사내의 목울대를 그대로 찍어버린 것이었다.

노인보다 훨씬 실한 덩치를 가지고 있던 사내는 몽둥이를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로 눈을 부릅뜨고 서 있더니 그대로 뒤로 천천히 넘어가 버렸다. 사람의 몸뚱이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몽둥이가 손에서 빠져나와 부두 아래로 데구르르 굴러갔다.

당태세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몸을 뒤로 돌렸다. 그곳에는 지금까지의 싸움을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던 검객이 있었다.

검객은 저벅저벅 등불 아래로 몸을 움직이더니만 아까와는 반대로 미소하나 없는 진지한 표정이 되어 당태세를 바라보며 예를 갖추었다.

“노사. 무례하게 말을 한 것을 용서하시오. 노사의 무공이 맘에 듭니다. 어쩌면 비천신룡보다 한 수, 아니면 세 수 정도 더 위에 계신 듯 하외다.”

“과찬일세.”

“아직 힘은 남아 있습니까? 나와는 이제부터 시작인데?”

“걸리적거리는 것도 없으니 거리낄 것도 없구만.”

노인의 눈이 서서히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그 눈빛을 보던 검객은 다시 몸을 굽히고 뒷짐 진 손아귀의 검을 등 뒤에 감추었다.

“밤이슬을 맞으면서 일하는데 이런 재미를 주시니 감사할 뿐이오.”

“생사결에 재미를 논하다니, 정신 나간 놈이로구나.”

“그동안 무료했거든.”

묵빛 장포를 입은 검객은 천천히 다리를 크게 벌리고 몸을 낮추는가 싶더니만 이내 오른쪽으로 몸을 틀며 천천히 당태세를 가운데 두고 맴을 돌기 시작했다. 당태세 역시 목괴를 왼쪽에 끼고 움직이는 검객을 보며 천천히 보법을 밟기 시작했다.

검객이 그것을 보며 탄식했다.

“기묘한 보법이구먼. 아쉽도다! 두 발 다 성했다면 미증유의 공부를 견식 하였을 터인데!”

두 눈을 번득이는 검객의 말에 당태세는 피식 실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네놈에게는 한 발로도 충분하다.”

“허, 내 무공을 아직 보지 않고서 할 수 있는 소리인가?”

“보나마나 아니겠느냐?”

당태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검객의 몸이 땅을 박차고 들어오며 뒷짐 진 손이 앞으로 뻗어 나왔다. 등불 아래에서 검이 빛나며 노란 빛줄기를 만들어 땅을 타고 낮게 날아오다 당태세의 앞에서 위로 치솟으며 목을 뚫어버렸다.

실로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검객의 검은 당태세의 목 위로 치솟아 예리한 검기를 선보였을 뿐, 가죽과 뼈를 얻지는 못하였다.

어느 틈에 노인의 몸은 빙글 돌아 자신을 노린 검광을 피한 채 목귀를 뻗어 등을 보인 검객을 향해 찔러 들어가고 있었다. 당태세의 목괴가 검객의 등뼈를 박살내기 직전, 호쾌하게 뿌려진 검날이 목괴를 옆으로 뿌리쳤다.

검객은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당태세는 맨 처음 검결을 시작했을 때와 같은 거리에서 검객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객은 차분하게 다시 기수식을 잡더니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내 공격을 막아낸 자는 있었지만 피한 것은 노사가 처음이오.”

“호란검(狐爛劍)을 쓰는 자는 보기 힘든 법이지.”

순간, 검객이 화들짝 놀라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침착하기 그지없었던 검객은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어찌 내 검법을 아는가!”

“본 적이 있으니까.”

당태세의 눈이 검객을 마주 보았다. 당태세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 놈은 사형문(四衡門)의 사람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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