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호광 무창(11)
“발은 어떠십니까? 좀 더 부드러워진 것 같습니까?”
침의 남평수가 깊숙하게 장딴지에 꽂았던 대침을 천천히 뽑았다. 시큰거리는 통증과 시원한 감각이 같이 밀려왔다. 예전에는 침을 다리에 꽂고 휘저어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는데 이제는 통증과 찌릿한 감각이 되살아나 있었다. 당태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좀 더 부드러워진 것 같소. 감각도 살아나는 듯 하고.”
“생각보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이 정도 차도까지 보일 줄을 몰랐습니다.”
남평수는 침을 뽑은 뒤 가지런히 썼던 침을 갈무리하여 한쪽에 몰아넣고는 혼잣말을 중얼댔다.
“그렇다고 힘을 주어 몸을 싣고 갑작스레 방향을 돌리거나 하면 언제든 다시 탈이 날 것입니다. 행여 그 발로 사람을 차실 생각은 마십시오.”
남평수는 당태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안 봐도 안다는 투였다. 당태세는 혀를 내둘렀지만 표정을 간수하며 점잖게 대꾸하였다.
“내가 어찌 그런 일을 하겠소. 이런 고질을 잡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살 뿐이오.”
“그러셔야지요.”
두 사람은 서로가 원하는 말을 해 주면서도 더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당태세는 이 침의라는 사내가 꽤 맘에 들었다. 치료받은 다리는 여전히 불편하고 힘을 주면 고통이 따랐지만 이제는 나무토막이 아닌 피와 살로 된 다리라는 느낌이 살아나고 있었다. 게다가 말이 많지도 않았다. 오히려 말이 많은 것은 당태세 쪽이었다.
“그 날 이후 이 침방에 시비 걸고자 오는 이는 없었소?”
남평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부둣가와 골목에서 난리가 난 모양입니다. 이 작은 침방까지 손을 뻗칠 여력이 없는 게지요.”
남평수는 침방 안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마당 밖의 모든 일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이번 일도 잠시 스쳐가는 비바람 같은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요.”
“무슨 말이오.”
“비가 한차례 오고 나면 길거리가 깨끗해지지만 비가 그치면 이내 더러워지지요.”
“사시장철 비가 오면 길거리는 무너질 것이오.”
당태세의 말에 이번에는 남평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쪼록 이번 비바람으로 쌓여있던 쓰레기가 다 쓸려갔으면 합니다만… 몇 명의 힘으로 그게 가능해 지겠습니까.”
“……진언표는 가능하지 않겠소?”
“소공자의 진심과 능력은 알지만 혼자서 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조력자가 있다 해도 힘들지요. 사람은 안과 바깥이 같이 강건해야 무병장수하는 법입니다.”
남평수의 마지막 말은 모호하여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하지만 당태세는 더 그 문제를 물어보는 것은 그만두기로 하였다.
오늘은 혼자서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당태세는 돈을 내고 천천히 목괴를 잡고 일어서 침방을 나섰다. 노인은 나서기 전 문득 침방의 무엇인가가 달라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만, 남의원. 이곳에 누워있던 그 청년은 어디 간 것이오? 그 칼 맞았던 친구 있지 않소.”
“그 친구는 어제 죽었습니다.”
당태세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남평수를 쳐다보자 남평수는 당태세를 보며 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주를 다 하여도 천시(天時)를 얻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
당태세는 말없이 자신의 앞에서 문도들에게 방향을 지시하고 있는 진언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땅거미가 지고 금빛으로 빛나던 강물도 점점 색이 탁하게 변하는데, 하늘 위에는 어느새 달과 별이 보라색으로 변하는 하늘을 지고 번쩍임을 더하고 있었다. 곧 어둠이 도성 안을 가득 채울 것이었다.
“조카분께는 뭐라 말씀하시고 나오신 겁니까? 노야께서 무공을 쓰는 건 모른다 하지 않았습니까?”
“내 조카는 밤의 야경을 보고 있을 것이네. 물론 좋은 술과 아리따운 기녀 사이에서 말이지.”
“거 참, 풍류남아로군요.”
진언표가 피식 웃음을 짓자 당태세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이럴 때는 아룡이 당태세가 무엇을 하는지 어디를 들르는지 꼼꼼히 캐묻지 않는 것이 나았다. 진짜 혈육이거나 아룡이 당태세에게 일 푼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이미 사달이 나도 벌써 났을 것이었다.
‘그놈은 정말 나귀고삐 잡는 일 외에는 필요한 곳이 없지. 미끼로 쓸 일이 또 있다면 바로 곁에서 치워버리는 것이 내게도 낫겠지.’
당태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앞에 서 있는 진언표를 바라보았다. 견정문의 소문주는 행동과 언동 하나하나가 고아하면서도 호방하기 그지없었다.
‘빌어먹을 진윤타가 자식 하나만큼은 잘 낳아놓았어. 그래서 짜증나는 거야.’
당태세는 이 일의 끝이 어떻게 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진언표의 청을 들어주고 고영약당을 무창에서 몰아낸 다음에 과연 진윤타의 목을 취할 수 있을지도 몰랐고, 정작 그때가 되면 진언표가 무슨 선택을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람의 미래는 결코 맘 먹은 대로 되지 않는 법 아닌가.
당태세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눈살을 찌푸렸다가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시작하기로 한 일을 뒤집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뾰족한 방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슬슬 이쪽 골목으로 놈들이 들어설 때가 되었습니다. 포구 하나를 빼앗겼다는 소리는 들었으니 어제 오늘 사람을 보내올 거라 짐작했습니다. 어제 오지 않았으면 오늘이지요.”
“그들이 물러가면 끝인가?”
진언표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몰려옵니다. 끝이 없었지요.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우리와 고영약당은 끝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지지부진하지만 누가 정확하게 승기를 잡지도 못한 채 세월만 보내고 있습니다.”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집단의 항쟁이 길어지면 결국 남는 것은 포한뿐이었다.
노인은 사소한 다툼에서 가문과 문파의 깊은 원한이 생기는 것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봐야 하는 일이었다.
서로 화해하든가, 아니면 둘 중 하나가 없어지든가.
“나는 하나 궁금한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무창신룡 자네의 무공이라면 총두들의 무공이 고강하다 한들 아래 부하들은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네. 포구의 싸움을 복기해보니 시간이 걸려도 결국 자네가 이겼을 걸세.”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가? 지금까지 왜 고영약당을 밀어붙이지 못한 건가?”
진언표는 당태세의 말에 겸연쩍은 미소를 짓다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내 어두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원가 사연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주변에 있던 문도들이 하나둘 등불을 켜고 어두워진 거리를 밝히고 선창가에 등불에 매달아두기 시작했다. 아마 고영약당의 패거리들은 이 등불을 중심으로 다시 부나비들처럼 몰려들 터였다.
“첫째는 우리가 그들을 끝까지 밀어붙이기에는 인원수가 늘 조금 모자란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고영약당은 늘 외부에서 없어진 만큼의 인원을 충당해 들어왔지요. 그게 큰 문제였습니다.”
진언표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들고 당태세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제가 중요한 순간마다 집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부친의 금족령 때문인가.”
“중요한 때마다 반복되었지요.”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 것인가.
당태세는 슬쩍 턱을 만지고는 진언표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준수한 얼굴에는 투지가 만만하였으나 그와 함께 그늘이 잡혀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에 가까왔다. 하지만 당태세가 봤을 때 진언표는 적을 앞에 두고 두려움을 가질 만큼 나약한 사내는 아니었다. 그는 다른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들이 부둣가에 진을 벌려놓고 있을 때, 갑자기 서쪽에서 급하게 누군가 말을 달려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고개가 모두 그쪽을 향해 돌아갔을 때, 진언표의 눈이 말을 탄 사내를 무섭게 노려보는 중이었다.
“소문주님! 소문주 계십니까!”
다름 아닌 견정문의 사자였다. 진언표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도 곤으로 땅을 짚고 몸을 세우고 사자에게 외쳤다.
“여기다. 무슨 일이냐!”
“문주께서 호출이십니다! 지금 당장 들어오시라는 하명입니다!”
“빌어먹을!”
사내의 내리친 곤에 부둣가에 깔아놓은 포석에 쩍하니 금이 갔다. 진언표의 표정은 필설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절망감에 일그러져 있었다.
“왜 지금인가! 왜 하필 지금이냐!”
“급하다 하셨습니다! 지금 문주님은 본전에서 소문주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은 못 간다 말씀드려라!”
“문주께서는 소문주께서 그리 말씀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뭐라?”
멍하니 사자를 바라보는 진언표를 보며 사자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전하였다.
“지금 당장 본전으로 오지 않으시면 부자지연을 끊겠다 말하셨습니다. 이에는 지난 하례(賀禮)의 무례까지 더해진 것이니, 소문주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라 하시….”
“으아아!”
진언표가 괴성을 지르며 사자를 노려보자 사자를 실은 말이 펄쩍 앞발을 들고 울어댔다. 사자는 사색이 되어 말의 목을 끌어안고 다급하게 말하였다.
“소문주님! 진정하십시오! 저는 소문주님이 무슨 마음이신지 다 알고 있습니다!”
“네가 내 마음을 어찌 이해한단 말이더냐! 내가 제단의 목상이냐? 군진이 펼쳐질 때까지만 자리를 지키고 병사들이 움직이면 헛간으로 치우는 물건이냐!”
그때였다. 진언표의 어깨에 두툼한 손이 하나 턱하니 올라왔다. 아무리 분노에 이성을 잃었다 하나 곤술이 화경까지 이른 진언표가 채 방비를 하기도 전에 올라온 손이었다.
진언표가 휙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목발을 짚은 채 조용히 청년을 올려다보고 있는 당태세가 있었다.
“가 보아라. 너를 찾지 않느냐.”
“노야……”
“네가 나를 이때를 위해 청한 것이다. 맞느냐?”
진언표가 입을 다물고 당태세를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사내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길게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이제 어느 정도 사내의 마음이 진정된 듯 보였다.
“맞습니다. 노야.”
“그럼 가거라. 내 이야기는 일절 하지 말고.”
“……송구하옵니다.”
“빨리 가거라. 네가 안 보이는 것이 병법에 더 유리하다.”
그 말을 듣자 진언표는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껌뻑이더니만 사자가 가져온 말을 빌려 타고 쏜살같이 서쪽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강변에 말을 놓으면서도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진언표의 뒷모습은 말 그대로 일기당천의 장수나 진배없었다.
당태세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진윤타 그 놈은 예나 지금이나 하는 짓이 하나도 맘에 안 드는군.”
당태세는 진언표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자 바로 몸을 돌려 진언표를 따라온 견정문과 약재상의 젊은이들을 돌아보았다. 이십여 명의 젊은이들은 주장(主將)이 사라지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당태세는 오합지중(烏合之衆)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바라보며 다시 혀를 끌끌 차더니만 뚜벅뚜벅 목발을 짚고 걸어가 그들에게 명을 내렸다.
“자네들은 지금 여기 있을 필요가 없네. 저 부두 옆의 창고 안으로 들어가서 내 신호를 기다리게.”
“뭐라고요? 노사,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몽둥이 끝에 짧은 칼을 칭칭 감고 나온 젊은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당태세를 쳐다보자 당태세는 젊은이를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사내에게 퉁을 놓았다.
“병법도 모르는 놈이 무슨 말대꾸냐? 이미 소문주는 이럴 때를 대비하고 계책을 세워놓았느니라.”
“네?”
“이번에는 소문주가 계획을 세워놓았으니 너희들은 창고에 들어가 있으면 된다고! 소문주를 못 믿어? 돌아오면 다 일러주랴?”
젊은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다시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이오? 진짜 소문주께서 계책을 세우셨다고?”
“그래! 여기서 얼쩡대다 고영약당 패거리에게 속절없이 맞아 죽을 테냐?”
사내들은 다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슬금슬금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든 사람이 길의 끝에 있는 창고 안으로 몸을 숨기는 것을 보자 당태세는 한숨을 쉬고는 몸을 돌려 뚜벅뚜벅 부둣가를 향해 걸어갔다.
“그 소문주의 계획이라는 것이 바로 나다. 이놈들아.”
그때였다. 저 멀리서 등불들이 일렁이며 사내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소리가 두서없이 섞이며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는데 그 발이 빠르고 간혹 쇠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영락없이 부둣가를 점령하러 오는 고영약당의 것이 분명하였다.
당태세는 부둣가의 기둥에 걸어놓은 등불 아래에서 목괴를 창처럼 짚은 채 다가오는 사내들을 기다렸다. 노인의 입에 기묘한 미소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이, 늙은이.”
맨 앞에서 긴 몽둥이를 삿대처럼 휘저으며 걸어오던 사내가 등불 아래 서 있던 당태세를 몽둥이로 가리키며 거친 어조로 말했다. 당태세가 슬쩍 눈을 위로 뜨고 사내를 쳐다보자 사내는 맘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당태세를 바라보며 이를 드러냈다.
“여기 모여 있던 진가약실 패거리들은 어디 있느냐? 못 보았느냐?”
당태세는 말없이 사내를 보며 웃고 있었다. 노인의 기묘한 미소를 보던 사내는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들어 당태세를 아래로 흘겨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늙은이. 대답 안 해? 죽고 싶냐?”
“꺼져라.”
“뭐?”
사내의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던 당태세의 입이 활짝 열리더니 이가 드러났다.
“살고 싶으면 어서 달아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