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62화 (62/226)

62. 강남 숙주

아침부터 소슬하게 뿌리던 비는 미시(未時)(13:00~15:00)가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천지사방이 시나브로 젖어드는 날이었다. 집 밖에 있든 집 안에 있든 몸이 옷에 들어붙는 꿉꿉한 느낌은 없어지지 않았고 날은 시원하지 않았다. 집 안에서 보이는 풍경 역시 사방에 안개가 낀 듯 분명하지 않았다.

역참의 문을 열어젖히고 바깥의 풍경을 무료하게 바라보던 젊은 군관은 입이 찢어지라 하품을 해댔다. 뒤에 앉아있던 늙은 군졸이 젊은 장교와 비 내리는 풍경을 힐끔대며 바라보았다.

“나으리, 문을 닫아걸어도 되겠습니까?”

“왜 그러느냐?”

“빗물이 들이쳐 바닥에 얼룩이 집니다.”

“일부러 열어놓은 것이다. 내 일이니라.”

“네?”

“신경 쓰지 말아라.”

젊은 군관의 목소리엔 지루함과 경멸이 같이 들어있었다. 늙은 군졸은 문에서 고개를 돌리고 슬쩍 자리를 옮겼다.

멀리서 말 울음소리가 한가롭게 들려왔다. 이런 날에는 따로 말을 내는 이가 적은 법이었다. 젊은 군관은 흐릿하게 보이는 산야와 관도(官道)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퉷 하고 침을 빗속에 뱉었다.

“오늘까지 안 오면 다시 한 걸음 내려가야겠구먼.”

젊은 군관이 표정을 찌푸렸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거리더니 문을 닫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한 필의 말이 유령처럼 허연 풍경을 뚫고 튀어나왔다. 말과 그 위에 탄 사람은 모두 흠뻑 젖어 있었다. 역참의 일꾼들이 화급하게 튀어나가 말고삐를 잡고 타고 있는 사람이 하마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넓은 죽립을 쓴 사내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성큼성큼 역참의 지휘서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 관인이나 파발이 틀림없었다. 젊은 장교는 슬쩍 물러나 들어오는 사내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비에 흠뻑 젖은 사내는 죽립을 벗어던지고 어깨를 털더니만 이내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고 역리(驛吏)에게 말을 걸었다.

“방 하나만 주게. 내일 아침에 출발할 것이네.”

“어디서 오셨습니까?”

사내는 말 대신 품 안에서 뭔가 넓적한 신표를 하나 꺼내 보여주었고, 역리는 그 표식을 바라보더니 깊게 고개를 숙이고는 가타부타 말없이 장부를 작성하였다.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겠나?”

“안에 들어가시면 식사가 가능합니다.”

“알았네.”

사내는 벗어놓은 자신의 외투를 잡으려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사내는 자신의 외투를 슬쩍 만지고 있는 젊은 군관을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 젊은 군관은 사내가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슬쩍 외투를 만져보더니만 옆자리의 의자에 가서 앉으며 사내를 쳐다보았다.

“먼 길을 오신 모양이외다.”

“할 말이 있는가?”

“서림각라부의 종리세리를 찾고 있소.”

젊은 군관의 입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던 사내는 매 같은 눈초리로 군관을 노려보며 외투를 걸어 놓은 의자에 앉았다. 두 사내가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내가 선무사 천호 종리세리요.”

“서림각라부의 보국장군께서 보내신 종리세리가 맞소?”

종리세리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젊은 군관은 이제야 필요한 사람을 만났다는 듯 한숨을 쉬었지만 여전히 종리세리를 바라보는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장군부의 통부를 보고 싶소만.”

“내가 왜 그대에게 그걸 보여주는가?”

젊은 군관은 대답 대신 자신의 손목 아래에서 슬쩍 반짝이는 옥패 하나를 꺼내 보였다.

종리세리의 눈이 군관의 손과 눈을 번갈아 오가더니만 자신의 품 안에서 똑같이 생긴 옥패를 꺼내 보였다. 군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품속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었다. 종리세리가 그 종이를 건네받자 젊은 군관은 종리세리에게 그제야 자신의 소개를 하였다.

“나도 보국장군부에 속해있는 사람이지. 호군교 아규은이라 하오.”

종리세리는 호군교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접은 종이를 풀어 보더니만 눈이 종이 위에 멈춰 섰다. 아규은이라 자신을 칭한 젊은 장교는 그 모습을 보더니만 안도의 미소를 지운 채 종리세리를 보며 소리를 죽여 말하였다.

“개봉부에서 일주일 전에 들어온 보고였소. 중요한 내용이라고 장군부에서 전해주더군.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그 서신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알지 못하오.”

“개봉부.”

“개봉부에서 뭔가 일이 터진 모양이지. 장군께서는 표정이 심히 좋지 않았소이다. 그것만 아시구려.”

종리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내의 눈은 종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아규은은 사내의 표정을 보더니 의자 뒤로 몸을 젖히며 종리세리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장군께서 직접 나를 불러 임무를 맡기셨소. 믿을 수 있는 자에게만 일을 맡길 수 있다 하셨지. 나더러 관도를 따라 모든 역참을 들르라고 하더구먼. 숙주에서 끝나서 다행이오. 난 소주나 항주까지 내려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는데.”

“예정대로라면 항주까지 가 있었겠지.”

“늦어지셨구먼. 뭐, 나도 늦긴 했지만.”

“일이 있었으니까.”

“장군께서는 일이 늦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이오.”

“알고 있네.”

종리세의 말에 호군교 아규은은 팔짱을 끼고 바깥을 쳐다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많지 않았지만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규은은 종리세리가 종이 안의 내용을 다 보고 품속에 넣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종리세리가 종이를 품 안에 넣고 고개를 들자 아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장군부의 새 전언을 전하는 걸 잊었구먼.”

“무엇인가.”

아교은은 종리세리의 짧은 대꾸에 슬쩍 눈썹을 찌푸렸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중년사내를 쳐다보더니만 씹던 음식을 내뱉듯 툭하니 말을 던졌다.

“종리세리는 자리를 옮길 때마다 자신의 위치와 사건을 보고하라는 말이었소. 그리고 물건을 회수했는지의 여부를 묻겠다 하였소.”

종리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규은은 손을 내밀었다. 종리세리는 그런 아규은의 눈을 슬쩍 노려보더니 차갑게 말을 뱉었다.

“제남에서 회수할 물건은 없다는 걸 이미 아실 것이네. 개봉으로 가서 나머지도 확인해봐야겠군.”

“그동안 회수한 물건이 없다는 말이오?”

종리세리는 아교은을 빤히 쳐다보더니만 고개를 저었다. 아교은은 대체 무엇을 하고 다니냐는 듯한 표정으로 종리세리를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종리세리는 가타부타 말없이 자신보다 젊고 품계도 낮은 만주족 장교가 하는 양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아교은은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마치 커다란 선심이라도 쓰는 듯 말을 이었다.

“일을 정확하게 하시오. 장군부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될 것이오.”

“최선을 다하고 있네.”

호군교 아규은은 더는 웃지 않고 있었다. 사내의 눈초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종리세리를 맘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더니 차갑게 말을 뱉었다.

“지금 장군께서는 난처하시오. 중대한 가중(家中)의 일을 한인(漢人)에게 맡긴 것에 대해 다른 패륵들에게 말이 나온단 말이오. 그대가 실수하면 서림각라부의 체면이 손상될 거요.”

“그럴 일은 없네.”

“왜 장군께서 당신에게 그 일을 맡기셨는지 모르겠군. 내가 장군부에 임직한지도 꽤 되었는데 그대 이름은 처음 들었단 말이지. 천호 종리세리라.”

“나도 호군교는 처음 보는군.”

두 사내가 매서운 눈초리를 서로 교환했다.

아규은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 지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종리세리를 쳐다보았고 종리세리는 말없이 젊은 청인(淸人) 장교를 바라보았다. 아규은의 입이 열렸다.

“나는 우리 서림각라부의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고 외인(外人)을 믿지 않소. 그대는 엄연히 장군의 총신일 뿐 우리 씨족의 일원은 아니오.”

“그런 건 상관없다.”

“우리 가문은 저 드넓은 만주에서부터 황실을 호위해온 유서 깊은 집안이오. 장군부에 들러붙어 교연영색으로 벼슬을 살고 있는 한인(漢人)따위는 유래부터가 다른 집안이란 말이오.”

“내 품계 역시 내 칼로 이룬 품계다.”

“허, 그렇소?”

아교은이 이를 드러내자 종리세리는 지그시 젊은 장교를 보더니만 슬쩍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여전히 빗줄기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데 하늘은 전보다 더 어두워진 듯 보였다.

종리세리는 벌떡 일어나 젖은 외투를 다시 몸에 걸쳤다. 아직 물이 뚝뚝 떨어지는 외투를 걸친 사내는 역리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숙박은 취소하겠다. 말을 내 오거라. 개봉으로 갈 것이다.”

“이 우중(雨中)에 말씀입니까?”

“그렇다.”

아교은은 종리세리의 말을 듣더니 피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 앉아 있던 젊은 장교는 다시 죽립을 챙기는 종리세리를 보며 한 마디를 거들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은 보기 좋구려. 내 올라가서 그대의 근면함을 장군부에 말해 놓겠소.”

종리세리는 죽립을 뒤집어쓰고 바깥을 쳐다보더니 이내 앉아있는 아교은에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아교은은 자기도 모르게 손발이 굳어버렸다. 어두운 삿갓 아래에서 짐승 같은 눈빛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이곳까지 오는 길이 늦어진 이유는 도중에 근무가 태만하고 백성을 착취하던 녹영의 천총 둘을 목 베고 팔기 효기교 하나를 치죄했기 때문이다.”

“뭐라…….”

“나는 관인(官人)이고 관인은 성실함으로 황은에 보답한다. 모든 일은 장군부의 이름으로 시행하였다.”

아교은은 벌어진 입에서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종리세리는 아무런 위협적인 동작을 하지 않았고 말투 역시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사내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세는 젊은 팔기장교의 몸을 마치 사슬에 묶어 놓은 듯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보고는 내가 할 것이니 호군교는 황도로 올라가라. 장군께는 걱정 마시라 말씀드리고.”

“저… 저….”

“알겠는가!”

순간, 역참 안의 공기가 뒤집어지며 쩌렁쩌렁한 소리에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무릎을 구부렸다. 바로 앞에 앉아있던 호군교 아교은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존명! 존명!”

아교은은 바들바들 떨리는 두 손을 꽉 쥐고 눈을 감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빗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이윽고 말의 투레질 소리와 울음소리가 나는가 싶더니만 경쾌한 말발굽소리가 빗속을 뚫고 멀리 사라지는 게 들려왔다.

그제야 아교은은 감았던 눈을 슬쩍 떴다. 열린 역참 지휘서의 문을 통해 빗방울이 들어오며 바닥에 빗물자국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젊은 청인 장교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대낮에 가위에 눌렸다 풀려난 기분이었다.

그와 함께 속에 억눌려있던 분심이 풀려나왔다. 사내는 부들부들 떨던 주먹을 들어 탁자를 내리치더니만 이를 부드득 갈았다.

“천호 종리세리라?”

젊은 장교가 중얼대는 소리를 들은 역리는 슬쩍 어깨를 움츠리고는 자신이 일하는 곳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여전히 비는 줄기차게 쏟아지는데 마구간의 하릴없는 말 울음소리만이 사람들의 귓가에 와 닿았다. 무더운 공기는 빗방울이 떨어져도 가시지 않고 있었다. 이제 봄은 완전하게 끝나고 여름이 성큼 문틈을 넘어왔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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