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61화 (61/226)

61. 호광 무창(10)

“조카에게 아무 말 안 하고 오셔도 되겠습니까?”

“우리가 애도 아니고…… 없으면 알아서 객잔으로 가겠지.”

“숙부를 찾지 않습니까?”

“그럴 놈 아니네.”

“굉장히 호쾌한 숙질사이군요.”

두 사람은 무창의 부둣가를 걸으며 만담 같은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본시 성품상 말을 많이 나누지 않는 당태세 치고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태세와 진언표의 뒤로는 기척을 숨긴 채 멀리서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따르고 있었다. 진언표를 따르는 약재상의 일꾼들과 견정문의 문도 몇이었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을 모아서 일하는 게 힘들어집니다. 고영약당의 힘은 점점 거세지고 제 부친께서는 사사로이 충돌하는 것을 엄격히 막으시니까요.”

“점점 어려워지겠구먼.”

진언표가 당태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목표로 하는 곳은 어디인가. 어디를 쳐야 고영약당의 세가 줄어드는가?”

당태세의 말에 진언표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듯 술술 지명을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고영약당은 부두 두 곳을 잡고 그곳에서 각지에서 들어온 약재를 거간하는데 한 부두마다 서른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관하는 약재창고에 오십 명 정도가 있고요. 그리고 고영약당 본당을 지키는 이가 한 칠십 정도 됩니다만… 저는 본당을 칠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는 화적이 아니고 약재상인데 본당을 치는 일 같은 걸 할 수는 없지요.”

“그게 전부인가?”

“본래 서른 명 정도로 구성 된 대(隊)하나가 돌아다니며 동리의 약방과 의자들을 감시합니다. 그런 놈들이 세 조 정도 됩니다. 이전에 저희를 습격했던 네 놈은 그 서른 명 중의 한 갈래일 뿐이지요. 아마 지금쯤 남평수의 침방 근처에서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을 것입니다.”

당태세가 계산해보니 대충 숫자는 이백에서 이백오십을 오가는 것 같았다. 많다면 많은 숫자고 적다면 적은 숫자였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그들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가 중요한 것이었다.

“그때 싸웠던 안령도 같은 이들이 많은가? 그렇다면 부담이 될 것이다.”

“제가 싸워본 바로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 안령도를 쓴 이는 그래도 한 조의 통령(統領)은 되는 이입니다. 아래 부하들을 다른 곳에 보내고 친위 넷만 데리고 있다가 우리와 붙은 것이지요.”

안령도를 든 자 같은 이들이 서른 명의 조장이라면 그들을 각개격파 하는 것은 당태세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리만 멀쩡하다면 하루에 세 개 조를 다 박살내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통령과 비슷한 수준의 무공을 지닌 진언표였으면 당연히 그들이 부담스러웠을 터였다.

“그 정도라면 걱정 없다.”

“하지만 약재창고와 본당에 있는 이들 중에는 통령보다 강한 이도 몇 있다 들었고, 고영약당의 차주 역시 상당한 무공을 지닌 자라 들었습니다. 그 후계자라는 이가 무창에 이런 사달을 가져온 원흉이라 들었지요.”

진언표가 두 주먹을 꽉 쥐어 보이더니 눈에 힘을 주었다.

“전 약방을 차린 이들이 그런 마음을 지녔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해가 서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장강의 물결을 비추었다. 바람은 잔잔하여 후덥지근한 기운이 강가를 휩싸는데, 강물은 도도하게 서에서 동으로 흘러 나가며 배들을 위아래로 흔드는 중이었다.

부둣가의 사람들 역시 그늘 사이로 숨어 더위를 피하였고, 정박해 들어오는 배위의 사내들 역시 그늘 속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이곳입니다.”

작고 평온해 보이는 부둣가 앞에 진언표가 멈추어 섰다.

규모가 그리 커 보이지 않는 부둣가에는 기껏해야 중선 한두 척이 정박할 만한 규모였지만 기이하게도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의 숫자는 수십여 명이 되어 보였다. 당태세가 진언표를 바라보자 진언표는 그 부두를 노려보더니만 이를 악물었다.

“불과 한 달 보름 전만해도 우리 부두였던 곳입니다.”

“그래?”

“제가 그 전 고영약당의 습격으로 몸져누운 약재상을 구원하려다 부친께 징계를 받고 근신을 명받았던 적이 있었지요. 그때 놈들은 쥐새끼처럼 들어와 이 부두를 점령하고 부두의 접장을 죽이고 바다에 던졌습니다.”

진언표는 말없이 부둣가와 이어진 바다와 그 뒤에 떠있는 배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사내의 눈동자에는 분노와 회한이 함께 담겨 있었다. 진언표의 목소리는 마치 숨을 죽인 맹수의 으르렁거림 같았다.

“근신에서 풀린 뒤에 전 죽은 접장의 어린 아이들에게 위무금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집이 이내 잿더미가 될 것이라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선봉을 서게. 중군(中軍)은 내가 잡을 것이니.”

“존명.”

두 사람은 말을 마치자 고개를 들고 뚜벅뚜벅 부두를 향해 걸어갔다.

그들을 뒤에서 따르던 대여섯 명의 사내는 주춤거리며 더 거리를 벌리고 그들을 따라갔다. 선창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진언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말 대신 부둣가와 밧줄 사이에 내려놓았던 박도와 몽둥이를 꺼내 들었다. 선원들은 화급하게 배 위로 도망치듯 올라갔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올라있는 장대한 사내가 녹슨 골타를 손에 쥐더니 진언표를 보며 이를 드러내고 이죽거렸다.

“이게 누군가. 진가약실 소장주 아닌가? 여기 무슨 일로 행차하신 겐가?”

“우리 부두를 찾아가겠다.”

진언표의 말에 부두에 서 있던 서른 남짓의 사내들이 껄껄대며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수로? 너하고 그 절름발이 노인네 둘이 무슨 수로 여길 가져간단 말이냐? 웃음이라도 팔 것이냐?”

“거 네 얼굴이 계집보다 반반하긴 하니 그것도 괜찮은 거래구나! 우리 모두가 화대를 던져주랴?”

웃고 있는 부두 사내들의 말에 진언표가 차갑게 대꾸하며 손에 쥔 곤을 앞으로 꺼내들었다.

“시간을 줄 테니 꺼져라. 그렇지 않으면 뜨거운 맛을 보리라.”

진언표의 말에 골타의 사내가 표정을 바꾸더니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얘들아! 저 놈도 장강의 고기밥으로 만들어라! 이제 진가약실을 정리할 때가 왔다!”

“알겠습니다!”

사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박도와 몽둥이를 든 사내들이 파도처럼 사방에서 진언표를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언표는 곤을 태산압란(泰山壓卵)으로 들어 올리더니 순간 선인지로(仙人指路)의 식으로 앞을 향하고 그대로 몸을 퉁겨 밀려오는 인(人)의 파도 사이로 자신의 몸을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적진의 한 가운데로 들어간 진언표의 곤이 맹렬한 선풍이 되어 사내들의 앞뒤를 휘감았다.

창졸간에 비명과 격타음이 사방에 진동하며 사람과 병장기가 튕겨 나오는데 그 회오리의 가운에 서 있는 푸른 장포는 마치 물결 한 줄기가 뭍에 올라와 천변만화를 부리는 것 같이 보였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절초로다!”

일전 안령도와 싸울 때 보이던 허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보법과 곤의 위치 하나 나무랄 곳이 없었다. 그 위기를 겪은 뒤 몇 번이고 복기(復碁)하여 자신의 단점을 찾아낸 것이 틀림없는 무공이었다.

진언표는 실로 무공을 왜 공부(工夫)라 하는지 알고 있는 자였다. 당태세가 히죽 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필요 없는 자리 아닌가.”

순간, 그를 보고 있던 키 큰 우두머리가 쓸개 씹은 표정을 하더니만 슬쩍 고개를 좌우로 꺾고 골타를 어깨에 메더니 부둣가로 내려왔다. 그와 함께 그의 주면에 모여 있던 박도의 사내 일고여덟 명도 같이 내려왔다.

보아하니 부두에서 지금 진언표와 싸움을 하는 열댓 명은 말 그대로 짐을 부리는 하오문의 막둥이 같은 이들이었고, 골타를 쥔 우두머리를 둘러싼 이들이 이곳의 실질적인 무력인 듯 보였다.

당태세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더니 진언표를 향해 소리 질렀다.

“소문주! 뒤를 조심하게!”

순간, 경쾌한 바람소리와 함께 몽둥이와 칼이 바닥에 나뒹굴며 사내들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진언표는 그의 뒤에서 우두머리와 칼잡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곤을 한 손으로 바람개비처럼 돌리더니만 당태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날리더니 다시 몸을 뒤집으며 곤을 뻗어 그를 향해 다가오는 이들을 가리켰다.

“어디 올 테면 와 보아라!”

그때였다.

진언표를 바라보던 당태세의 눈앞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더니 이내 붉은 하늘과 어두운 땅이 드러났다.

그 옛날 자신이 배신당해 죽던 그 황망했던 날이 떠오른 것이다.

연기가 사방에서 밀려 나오며 천지가 진동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당태세의 시선은 기묘하게 땅바닥에 붙어 있었다. 마치 엎드린 채 앞을 보는 것 같은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굳건하게 두 다리를 붙이고 넓은 등을 보이는 사내 하나가 장창을 들고 몰려드는 군사들로부터 그를 지키며 서 있었다.

“들어올 테면 들어와 보아라! 내가 누군지 아느냐!”

순간, 당태세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눈이 흐려졌다.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던 사내의 마지막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며 귓속에 파고들었다.

“내 이름은 당운천! 순천문 소문주 철운적우(鐵雲赤雨) 당운천이다!”

당태세의 눈망울이 소처럼 크게 위아래로 벌어졌다.

진언표의 모습에서 죽어가던 자신을 지키려 포효하던 아들이 떠오른 것이다.

노인은 비틀거리며 입을 벌리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다시 하늘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기합소리와 함께 진언표가 사내들을 향해 몸을 날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번개처럼 움직이는 진언표의 곤 앞에서 박도를 든 사내들이 칼춤을 추며 번개의 앞길을 막았다.

그와 함께 골타를 든 장한이 그 번개를 산산이 부숴버리겠다는 듯 거대한 골타를 빙빙 돌리며 언표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당태세는 멍하니 그들을 보고 있다 자기도 모르게 목괴로 땅을 치고 앞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노인의 몸이 바람을 타고 움직이며 목괴를 뻗어 진언표의 목을 노리는 도수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찍었다.

도수의 비명이 채 목구멍을 타고 나오기 전에 당태세의 우수가 도수의 늑골을 부숴버렸다. 노인은 몸을 돌려 옆에서 뻗어 나오는 다른 도수의 칼을 피하고 목괴로 사내의 턱을 찍어 올린 뒤 오른 팔꿈치로 명치를 받아버렸다.

당태세의 몸이 다시 바람을 타고 움직였다.

홉뜬 노인의 눈은 깜박이지도 않았다. 노인은 앞을 바라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살기를 찾아 움직이며 그 살기를 본능적으로 부숴버리는 것 같았다.

노인의 목괴가 땅을 치고 발이 나갈 때마다 칼잡이 하나가 몸을 뒤틀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노인은 박도 잡은 사내들을 말 그대로 하나씩 부숴버리는 중이었다.

“뭐야! 대체! 저 늙은이는 뭐…….”

순식간에 얼이 빠진 골타의 장한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바라보다가 뒤에서 달려드는 진언표의 살기를 느끼고 재빨리 골타를 들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골타를 타고 어깨까지 강렬한 충격이 전해져 들어왔다.

진언표의 불타는 눈동자가 골타 사내의 바로 앞까지 들어와 있었다.

“오늘에서야 빚을 갚는구나!”

진언표의 이가 부드득 갈리며 두 손에서 곤이 회전하며 일진광풍을 만들었다.

장한 역시 이를 악물고 자신의 손에 들린 골타를 휘감으려 진언표의 목곤에 부딪혀 들어갔다. 순식간에 쇠와 나무가 서로를 치고 때리며 허공에 둔탁한 소리를 날려댔다. 진언표의 목곤은 이제 바람소리를 내며 적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복수로다!”

순간 진언표의 곤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며 골타의 중앙을 부수고 그 기세를 몰아 골타 주인의 턱을 박살내 버렸다.

거대한 장한의 몸뚱이가 그대로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부두의 널빤지를 넘어 그대로 강으로 처박혔다.

거대한 물보라가 앞에 치솟으며 장한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제야 진언표는 긴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곤을 땅에 내려놓았다. 어느새 진가약실의 사내들이 뒤에서 고함을 지르며 달려와 전의를 상실한 적들을 부두에서 내몰고 있었다.

진언표를 몸을 돌려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목괴의 노인을 보며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견정문 소문주의 정중한 인사를 바라보던 당태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땅을 바라보았다. 진언표는 고개를 돌리고 그의 부하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무창 전역의 약방과 의자들에게 알려라! 다시 진가약실이 부두를 되찾았다고! 이제부터 모든 게 바뀔 것이라 전하라!”

그의 모습은 실로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장수와 다름없었다.

당태세는 영걸스러운 진언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가슴 한쪽에 묻어두었던 감정이 벌컥벌컥 튀어 오르는 것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있었다. 입을 열기만 하면 통곡이 먼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제야 알겠구나… 내가 왜 널 도우려는지….”

당태세는 눈을 질끈 감고 혼잣말을 막아버렸다. 강변의 햇살은 여전히 따갑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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