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60화 (60/226)

60. 호광 무창(9)

견정문의 후원은 하례 연회장으로 쓰이는 연무장에서 깊숙하게 들어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작은 문을 통과하여 돌담 사이의 통로를 걸어 들어간 당태세의 눈앞에 크지 않지만 화려하기 그지없는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기암괴석을 가운데 놓아두고 그를 중심으로 물길이 양 갈래로 갈라져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데, 물길은 종당에 하나로 합쳐져 정자가 있는 작은 연못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진언표는 그 연못 위의 정자에 서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그 모습이 실로 천계의 신선이 하강한 듯한 모습이었다.

“따로 걸음을 하시게 하여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진언표의 말에 당태세는 손을 올리며 괜찮다는 시늉을 하였다. 당태세는 진언표를 바라보며 걸으면서도 유심히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후원 안에는 사람이 따로 없었지만 이곳까지 들어오는 통로에는 한두 사람씩 견정문의 문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문이 있고 길이 꺾이는 곳마다 하나씩 배치되어 있는 문도들은 분명 무기도 숨기고 있을 터였다. 이도협 진윤타는 용의주도한 사내였고, 그의 생리는 늙어서도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기왕지사 들어오는 길을 기억해 놓아야 하겠구먼. 정원이 보기 좋으니 말이네.”

“저와 함께 오셨으니, 제 이름만 대면 여기까지는 언제든지 오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당태세의 심중을 모르는 진언표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당태세는 이 아이가 자신을 이 자리까지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쉽사리 그 청을 들어주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청을 들어준다는 것은 원수의 자식을 돕겠다는 이야기 아닌가.

자신에게 이득이 될 일이 뭐란 말인가. 진언표는 그런 당태세의 속내는 알지도 못한 태 정자의 난간에 걸터앉더니 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원의 물은 이곳을 거쳐 수로를 타고 천천히 장강으로 흘러나갑니다. 어차피 그렇게 설계되어 있으니까요. 천하의 모든 물이 시내를 만들고 강이 되어 결국에는 바다로 흘러들어가듯, 만물의 이치는 하나로 귀결된다는 불문의 말이 참으로 옳은 듯합니다.”

“소문주. 나를 보자 한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의 문답을 보셨습니까. 노야.”

“당연히 보았지. 부친과 반목하는 사이인가?”

진언표는 당태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제가 제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진중함을 존경합니다. 원래 우리 가문은 이곳 무창 사람도 아니고 저 위 북경 어름에서 난을 피해 내려온 무문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홀로 터전을 닦기 위해 아버지와 옛 장로들이 무던히 고생을 하셨다지요.”

그것은 거짓이다. 얘야. 네 아비는 청나라에 귀부한 공로로 수고 없이 이 땅으로 온 것이야.

당태세는 속으로 자신이 할 말을 삼키며 진언표가 하는 말을 들었다.

“맨 처음 이곳에 정착할 때만 하더라도 부친은 임협(任俠)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선망을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갈 곳 없는 이들과 약재상을 도우며 가문을 다시 일으켰지요. 한때 북경에서 이름 높았던 견정문이 이 정도로 융성해진 것은 모두 부친의 공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 부친께서는 싸움을 피하십니다. 왜 그런지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칼과 주먹으로 세상만사를 해결할 수는 없지요. 오히려 아버지가 즐겨 하시는 것은 서로의 이야기를 모아 중지(衆智)를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도 옳다 생각합니다만…….”

“중지도 우리가 힘이 있고 비굴하지 않을 때나 가능한 것이 아니더냐.”

당태세의 말에 진언표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당태세를 마주보았다.

“노야, 노야의 말씀이 바로 제가 드리고자 했던 말입니다. 어찌 그리 사람의 속내를 꿰뚫어 보십니까?”

꿰뚫어보기는, 네 아비가 그 중지를 명분으로 나와 황제의 뒤통수를 쳤으니 알지 않느냐.

당태세는 속으로 진언표에게 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언표는 용기를 얻은 듯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미 우리는 열세입니다. 고영약당은 사람들을 외지에서 사 오고 데려와 우리들을 핍박합니다. 팔기 순무가 뒤에서 돈을 대준다는 이야기가 도니 성의 지부도 쉽사리 녹영군을 풀지 않습니다. 지금 저들과 맞서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고….”

“소문주 자네가 거느린 병력이 전부인가?”

“……부끄럽지만 그렇다고 보셔도 됩니다. 견정문에서 뜻을 같이 하는 동문 서른 명 정도가 젊은 약재상과 일꾼들과 합해서 싸우지요. 채 칠십이 안 됩니다.”

“저들은?”

“못해도 이백에서 이백오십은 넘고…개중 몇은 고강한 무공이 있습니다. 일전에 봤던 안령도 사내와 같은 이들이지요.”

당태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생각보다 훨씬 진가약실의 세력이 약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었다. 칠십대 이백오십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 비교인가. 당태세가 진언표를 보며 다시 말했다.

“이런 상황이면 역부족이 아닌가. 그러다 사람이 상하면 어찌하려고.”

“이미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이?”

“하구의 몇몇 약방의 일꾼들과 의자 예닐곱이 이미 저들의 손에 희생당했습니다. 최근에는 부두에서 하역을 맡아서 하던 약재상 우두머리의 집이 타버리고 가족이 모두 죽었지요. 관(官)에서는 사고라 하지만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고영약당의 짓입니다.”

진언표의 눈에서는 불꽃이 이글대고 있었다. 젊은 혈기로 동무들이 죽는 것을 보았으니 분을 참지 못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태세는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별반 구미가 당기는 일이 아니었다. 자칫하다가는 무창의 약장사들 쌈박질에 자신이 위험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이보게. 소문주. 내 말을 차분히 들어보게. 부친께서 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지 내가 모르지 않을 것 같네. 너무나도 숫자가 차이나지 않는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찌 이것을 그냥 보고 있단 말입니까? 저는 무가의 사람입니다. 무가의 사람이 어찌 협(俠)을 버리고 산단 말입니까? 이것은 인(人)의 문제가 아니라 하늘의 도리 아닙니까? 권리를 탐하는 자가 악한 수단으로 약자들을 핍박하여 기회를 얻고자 합니다!”

진언표의 눈이 번득였다.

“이를 어찌 임협의 아들이라는 자가 이런 작태를 보고 있으란 말입니까? 어찌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다 하여 사람이 절개를 꺾는단 말입니까!”

순간 당태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진언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십칠 년 전, 자신이 구대문파를 모아놓고 했던 말과 진배없는 말이었다.

시꺼멓게 황성을 포위하고 있는 이자성 군을 보며 견정문주 진윤타가 당태세와 같은 말을 던졌을 때 당태세가 오연한 표정으로 좌중의 문파들을 보며 내뱉은 말이었다.

‘어찌 사람이 황은을 입고 절개를 꺾는단 말인가!’

“저는 사람이 칼을 쥐고 무공을 닦아 힘을 기르게 되면 그 힘으로 구세(救世)하고 활인(活人)하라는 말을 듣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다름 아닌 제 부친께서 해주신 말이지요! 지금 비록 부친과 제가 가는 길이 다르지만 저는 여전히 아버지의 그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습니다! 어찌 백성들을 괴롭히는 이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제가 그들의 주구가 되어 백성을 같이 괴롭히고 이문을 착취하단 말입니까?”

진언표의 말이 너무나도 깊숙이 당태세의 마음을 후벼 팠다. 냉철한 머리는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당태세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저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살고 싶습니다! 도리를 저버리는 상인이 되고 싶지도 않고, 되는대로 세태와 타협해 불의가 득세하는 걸 바라보는 무력한 장문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남는 것은 고통과 배신, 그리고 죽음만이 있을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불의를 묵과한 채 장수하느니 떳떳하게 길거리에서 죽겠습니다!”

“살아도 후회 많은 삶이 될 것인데.”

“후회 없는 삶이란 게 있겠습니까?”

진언표는 당태세에게 말을 하고 나서, 자신이 노인에게 말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싶은 표정을 지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듣는 호방한 말이었다. 한참동안 잊고 있던 과거의 유산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예전 모습이었다.

당태세는 결국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은 이미 진언표에게 가 있었다.

“좋아. 이 노부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뭐든 도와주겠네!”

감격한 진언표가 한쪽 무릎을 꿇더니만 두 손을 맞잡고 당태세를 올려다보았다.

“노야(老爺)! 감사드립니다. 노야 같은 고수께서 저희와 함께 해주시면 천군만마가 따로 필요 없습니다!”

“내 소문주와 함께 고영약당의 전횡을 막도록 하겠네. 어디서부터 할지를 정해보게!”

“알겠습니다.”

“단, 내가 그대에게 한 가지 약조를 받을 것이 있어.”

당태세의 두 눈이 싸늘하게 변하자 진언표는 무릎을 꿇은 채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태세는 진언표를 바라보며 마음속에 정리해둔 말을 천천히 꺼내기 시작하였다.

“나는 내 조카와 함께 무창에 왔지만 조카 몰래 이곳에 온 목적이 있다. 나는 이곳 무창에 옛 무림에서 시작되어 아직도 풀지 못한 구원(舊怨)을 해결하러 온 것이야.”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진언표의 입이 벌어졌다.

“한 사람의 생사여탈(生死與奪)을 나에게 맡겨다오. 그 일에 대하여는 선악(善惡)의 구분을 내가 할 것이니, 소문주는 그 일에 대해서 관여하지 말라.”

진언표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누굴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노대협의 뜻을 거스르진 않겠습니다.”

당태세의 눈이 기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진언표는 그런 당태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좋다. 그럼 일을 시작하세.”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노야께서 하실 일을 정해놓은 뒤…….”

“아니야.”

“네?”

당태세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진언표를 보며 말하였다.

“오늘 이 시간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게. 분명 자네의 부친은 오늘 자네의 일을 빌미로 자네의 운신 폭을 줄이려 할 것이네. 그 전에 자네가 먼저 선수를 치고 어쩔 수 없이 일이 진행되도록 해야 할 것이야. 호랑이 등을 탄 것처럼 말이네.”

당태세의 말은 진언표에게는 마치 책사의 간언 같았다. 지금까지 그가 부친의 명을 받은 뒤 전전긍긍 자신의 힘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부분을 꼭 집어서 가르쳐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 신통하십니다! 제가 가장 괴로워하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저희가 고영약당의 패거리들을 물리치고 난 뒤에도 그들은 이 파, 삼 파 계속 몰려들어와 결국 그곳을 빼앗고, 저는 아버지의 질책을 받고 집에서 근신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태반이었지요.”

당태세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가서 자네와 내가 고영약당에게 빼앗긴 곳을 수복하는 것일세. 그리고 난 뒤 잔당이 다시 들어오면 그것은 내가 처리하면 될 일이니.”

진언표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그런 사내를 보면서 히죽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시작해 보세. 어디부터 그놈들을 쫓아내는 것이 낫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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