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호광 무창(8)
백설같이 하얀 무늬 없는 장포에 흰 바지를 갖춰 입은 이도협 진윤타는 중키에 살집이 있는 노인이었다. 한때는 탄탄하게 목과 가슴을 받치고 있었을 어깨는 이제 살짝 구부정하고 배에도 나잇살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건장한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멀리서 천천히 움직여 중앙의 탁자를 향해 나아가는 노인의 발걸음은 약간 느린 편이었지만 몸을 꼿꼿하게 세워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것이 일신의 보법이 일가를 이룬 사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그의 옷차림이나 그의 신색이 아닌, 노인이 보이는 인자하고 근엄한 표정이었다.
노인은 온화하고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좌중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둘러보며 슬쩍 묵례를 보이는데, 그 짧은 동작에서도 장자(長子)의 풍도가 보였다. 가히 무창의 약업(藥業)을 한 단계 위로 올려놓은 사내였다.
견정문의 장원에 초대된 모든 이들은 저절로 미소를 머금은 채 진가약실의 가주가 입장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오직 한 사내. 목괴를 짚은 채 술잔을 쥐고 있는 귀린갈 당태세만이 눈썹을 찌푸린 채 이도협 진윤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월의 두께가 쌓여 이도협의 얼굴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그의 보법과 몸 움직임은 여전히 당태세의 뇌리에 남아있는 진윤타와 일치하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당태세는 저렇게 온화한 포대화상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진윤타를 본 기억이 없었다.
늘 점잖고 실리와 명분 사이를 저울질하던 세리(稅吏)같던 딱딱한 진윤타의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은 모든 것에 만족하고 사람들에게 관후한 부가옹(富家翁)의 모습이었다.
당태세는 말할 수 없는 거북함과 분노가 아래에서 부글대며 치미는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 긴 세월 네 놈은 대체….”
“노야, 뭐라 하셨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옆에 서 있던 진언표가 의아하다는 듯 당태세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자신의 아버지가 장원의 가운데에서 의자와 상인들을 보며 두 손을 올리자 다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부친을 바라보았다.
진윤타는 아들과 비슷해 보이는 잔잔한 미소로 사람들을 둘러본 뒤 입을 무겁게 열었다. 노인의 목소리는 깔끔하고 정중하였다.
“무창의 동도 상인들이여, 활인(活人)의 길을 걷는 의자 여러분. 이 진모가 염치없이 이 연회를 연 김에 한 말씀을 드리고자 하겠소. 우리가 이렇게 같은 길을 가는 기연을 얻어 함께 한 지도 어느덧 십년이 넘은 듯 하외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부침도 있었소. 앞으로도 좋은 일과 슬픈 일이 함께 할 것이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시절이 안 좋고 처지가 각박하지만 다시 이것을 이겨낼 때가 올 것이라 생각하오.”
노인이 잠시 맘을 멈추자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어질어 보이는 표정과 그의 중후한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마냥 기분이 좋아지는 듯 보였다.
“조만간 이 노부가 고영약당과도 회합을 열 것이오. 이 무창을 피폐하게 만드는 지지부진한 반목을 거두어내고, 예전과 같은 활기찬 시장을 만들도록 하겠소이다.”
“좋습니다!”
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에 앉아있던 상인들이 손을 들고 좋다는 말을 외치기 시작했다. 손을 들고 좋다고 외치는 사람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삼분의 일 정도였는데 대부분은 상인의 행색을 하고 있었다.
당태세는 눈을 돌려 다른 탁자들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의자(醫子)들은 상인들과는 다른 행색을 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의자들은 진윤타의 말에 손을 들기보다는 팔짱을 끼고 노인의 말을 경청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당태세가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당태세의 뒤에 있던 진언표가 슬쩍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백포를 입고 있는 진윤타와 달리 청포에 검은 바지를 받쳐 입은 진언표의 모습은 말 그대로 푸른 벌판 위를 고고하게 걷고 있는 청학처럼 보였다.
“소생, 진가약실과 견정문의 후계로서 여기 계시는 이도협 장문인께 질문드릴 것이 있습니다.”
일시에 모든 이들의 눈길이 진언표에게 쏠렸다.
당태세는 진윤타의 눈길이 순간 잠시 흔들리다가 다시 평온한 표정을 찾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윤타는 진언표의 발언과 표정을 보며 말없이 고개를 들어 보이더니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말하였다.
“소문주는 무슨 일이기에 중인환시(衆人環視)에 말을 꺼내는가? 그토록 급한 일이 따로 있단 말인가?”
“예전부터 늘 말씀을 드리고 답을 얻고자 하였으나 마땅히 답을 주신 적이 없어 불가피하게 이리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시 여쭙게 되었습니다.”
일순간 스쳐가는 진윤타의 서늘한 눈빛을 받으면서도 진언표는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서서 진윤타를 향해 일성을 날렸다.
“지금 무창의 부둣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이 일어납니다. 고영약당에서 고용한 비류(非類)와 하오문들이 부둣가를 돌아다니며 우리의 약재를 사는 이들을 기습하고 괴롭힌 지가 이미 한두 해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대로 병법을 아는 이들까지 고용하여 우리가 약재를 사는 것을 막고 거래하는 곳을 들쑤시고 다녀 상인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말없이 진언표의 말을 듣고 있었다.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크게 내는 이가 없었다.
“그보다 더 심한 것은 의자(醫子)들의 처지입니다. 그 사갈 같은 족속들은 우리 약재를 들이는 의원들을 하나씩 찾아가 행패를 부리며 고영약당의 약재를 쓰지 않을 바에는 문을 닫으라 협박하고 심지어는 의자를 때리고 의원을 부수기까지 합니다. 이들의 행패에 이미 수많은 이들이 문을 닫거나 고영약당의 약재를 쓰고 있습니다. 진실로 지금 이 자리에 와서 우리 진가약실을 응원해 주시는 의자 여러분의 기개에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진언표의 말에 표정 없이 진윤타의 연설을 듣고 있던 의자들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도협 진윤타는 여전히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그의 표정은 아까만큼 밝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믿고 약방과 의자를 찾는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병에 걸려 곤고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 하늘을 보며 눈물을 흘릴 때 찾는 곳이 누구입니까? 결국 우리 약재상과 의자들밖에 없을진대! 우리가 재주가 없어 그들을 보살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압력에 의해 그들을 보는 것을 막는다면 우리가 어찌 활인(活人)을 업으로 다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힘이 없습니까?”
진언표를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소생 진언표, 견정문의 소문주이자 진가약실의 소장주로 간청 드리오니 견정문의 봉문(封門)을 풀어주십시오. 지금 당장 문도들을 풀어 사방의 의자들과 중요한 약재상들을 보호하게 하십시오. 몇 안 되는 호법들로 순찰을 도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전력으로 저들과 부딪힌 다음에서야 실마리가 잡힐 것이니….”
“그만!”
순간, 쩌렁쩌렁한 진윤타의 목소리가 좌중을 압도하였다.
진윤타는 여전히 인자한 표정 그대로였지만 사방으로 땅을 타고 뻗어나가는 그의 묵직한 소리는 일시에 좌중의 시선을 빼앗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태세는 아직 진윤타의 내공이 건재하다는 것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이를 드러내며 눈빛을 감추었다.
“지금 소문주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가. 견정문이 도검을 잡고 일어난다는 것은 이 시국에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만약 그렇게 된다하면 실로 두 집단이 무창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것 외에는 아무 이득도 없느니라.”
“그렇지 않사옵니다.”
진언표는 진윤타의 말에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말을 받았다.
“고영약당이 저렇게 오만방자하게 변하여 의자들을 쉽게 건드리게 된 것은 그때 양중일 노사가 노상에서 봉변을 당했음에도 우리가 지키지 못한 것이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때 이후로 그들은 진가약실과 견정문을 늙은 호랑이 취급합니다! 지금이라도 과감하게 문도들을 내어 그들에게 대항해야 합니다!”
“좋은 말이네!”
옆에 앉아있던 의자 하나가 환호를 하였다. 하지만 그에 맞서는 진윤타의 말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사방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리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명약관화(明若觀火)하지 않느냐. 저들은 팔기(八旗)를 등에 업고 있으니 우리를 더 야단스레 핍박할 것이다. 어찌하여 소문주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가?”
“우리가 조용히 있으니 저들이 더 우리 무창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소문주는 그만 조용히 하라! 그것이 경사스런 하례에서 할 말인가!”
진윤타의 마지막 말에는 웅혼한 내공이 실려 있었다. 당태세 조차 슬쩍 눈살을 찌푸릴 만큼 강한 압력이 공기를 타고 쏟아졌고 진언표는 부친의 말을 듣자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고영약방과의 일은 내가 직접 만나 그들과 담판을 지을 것이다! 그러니 더는 그 일을 거론하지 말라! 이 일은 하례와 관계없는 일이니 더 가납하지 않을 것이야!”
“알겠습니다.”
의외로 순순히 진언표는 진윤타의 말을 따랐다.
진윤타는 장내의 불편함이 그제야 해소되었다는 듯 팔을 들고 악사(樂士)들을 불렀다. 장내에 경쾌한 남쪽의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자 어색하기 그지없던 사람들의 인상이 조금씩 풀리며 다시 주변의 벗들에게 잔과 음식을 권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술을 홀짝대던 아룡이 피식 웃더니만 여전히 앞을 보고 있는 진언표를 보며 한마디를 던졌다.
“노형, 노형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은 좀 서툰 것 같소. 지금 이렇게 화기애애하게 술자리를 가져야 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싸움 이야기를 꺼내면 모두가 당황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소?”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실수를 하였군요.”
진언표는 아룡의 말을 받으며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억지로 웃고 있는 것이 분명한 웃음이었다. 당태세는 진언표의 그런 표정과 진윤타의 대응을 복기해보며 뭔가 콕 짚어낼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슬쩍 고개를 숙인 진언표가 당태세를 보며 빠르게 속삭였다.
“노야, 잠시 후원에서 저를 만나주실 수 있겠습니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당태세는 진언표의 표정을 보고는 멀리서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 진윤타를 지켜보았다. 어차피 진윤타에게 달려가 칼을 박기에는 동선이 그리 좋지도 않았고 때도 잘못 잡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앞에 있는 진언표부터 없애야 했다. 당태세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한참동안 주변을 살펴보더니 천천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후원에서 뵙지요.”
진언표가 슬쩍 몸을 돌려 사라진 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당태세는 자신의 목괴를 짚고는 아룡에게 잠시 어디를 다녀오겠다는 시늉을 하며 자리를 떠났다. 당태세는 앞장서 움직이고 있는 진언표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손가락을 눌렀다.
“……내가 뭘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군.”
당태세의 입에서 고소(苦笑)가 밀려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