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호광 무창(7)
당태세의 다리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차도가 있었다.
발을 디디는 것 뿐 아니라 서 있을 때나 앉아있을 때 운공을 하게 되면 단전에서 모이는 내공의 힘이 예전보다 훨씬 강해진 듯싶었다. 원래 다리를 다치게 되면 골반이 뒤틀리고, 골반이 뒤틀리면 허리가 무너지는 법이었다.
지금까지 두 개 문파의 장문인과 맞서 싸우면서 용케 버티며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당태세의 집념과 용의주도함, 그리고 상대들의 방심 때문이었지 결코 무공의 현격한 차이로 이긴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상대나 자신이나 모두 나이를 먹어 예전의 무공을 선보인 것이 아니어서 가능했다.
당태세는 비록 몸이 굳고 무공이 퇴보하였더라도 십칠 년 전의 근성이 그대로 퇴락하지 않고 남아 있었기에 그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라 결론 내렸다.
하지만 이제 당태세는 조금씩 자신의 무공이 퇴보하는 것을 막을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다리가 제대로 기둥 역할을 해주고 틈틈이 연공을 하며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괴창(拐槍)술로 막는다면 완승은 못하여도 신승(辛勝)은 가능할 것 같았다.
‘거기에 만약 해도침옹 양중일을 만난다면 날개가 생기는 격이겠지!’
당태세는 홀로 생각을 하다가 기분이 좋아서 히죽 미소를 짓고 말았는데, 이내 머릿속의 생각이 다른 쪽으로 다가가자 미소는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그는 무창에 놀러온 것이 아니었다.
“견정문을 없애야지.”
당태세는 다짐하듯 소리 내어 자신의 할 일을 곱씹었지만 이내 눈살을 찌푸리고 목괴로 애꿎은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다름 아닌 무창신룡 진언표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당태세는 골목에서 마주쳤던 준수한 용모의 사내를 생각해보더니만 신경질이 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투덜거렸다.
“왜 애비보다 나은 자식이 튀어나오는 건가.”
진언표를 본 것은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사내의 언행으로 미루어봤을 때 실로 호협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식인지 알 도리는 없었지만 표리부동한 사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진언표를 구하기 위해서 무공까지 보이지 않았던가.
“내 각오가 아직 미흡하구나.”
당태세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정작 진언표를 어떻게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야 침방에 죽치고 앉아 있다가 들어오는 진언표를 없앤 뒤 침방과 함께 깔끔하게 태워버릴 수도 있고, 그리 된다면 견정문과 고영약당 사이에 싸움도 격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 틈을 타서 견정문주 진윤타를 죽여 버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아직 포기하는 수는 아니지만…….”
당태세는 다시 고개를 도리질하고 숨을 습하니 들이마셨다가 다시 투덜대기를 수차례 반복하였다. 아무래도 마음을 다시 다잡아야 할 때가 온 것이 틀림없었다.
“저들은 나를 죽이고 내 자식을 죽이고 내 문파를 멸문시키고 내 나라를 박살낸 것들이다.”
당태세는 주문처럼 소리죽여 말을 되뇌고 또 다시 되뇌었다. 한 번 말을 반복할 때마다 노인의 눈매가 매섭게 변하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같은 하늘을 지고 있으면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 후사가 어찌 되었든, 지금의 일이 어찌되었든, 그는 과거의 빚을 갚아야만 하였다. 그러하라고 지금 숨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좌고우면하지 않을 것이니.”
노인이 땅바닥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인상을 쓰고 있는 찰나, 객잔의 방으로 들어온 아룡이 당태세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숙부님, 어디 아프십니까? 다리가 다시 도지신거예요? 무슨 말을 중얼거리시는 겁니까?”
“아니다. 허허, 예전에 외웠던 시의 마지막 구가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아무리 해도 생각이 안 나.”
당태세가 웃으며 말하자 아룡은 그럴 법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원래 숙부님 연세가 되면 아침 기억과 저녁 기억이 다르다 하였습니다. 예전에 제가 살던 부둣가에는 자기 자식 이름도 까먹던 노파가 있었는데 뭘 그리 서러워하십니까? 늙으면 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냐? 서글프구나.”
당태세가 표정을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룡은 그제야 들어온 이유가 생각났는지 손바닥을 치더니만 당태세를 보고 말하였다.
“숙부,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그 놈이 찾아왔어요!”
“그놈이 누구냐?”
“그 놈 있지 않습니까! 침방에서 난장판 피우고 숙부를 위험하게 했던 그 허여멀건한 공자 말입니다! 말만 번지르르한 놈!”
“진가약실 소장주 말이냐?”
아룡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놈이 글쎄, 숙부를 뵙고 청할 것이 있다 하지 뭡니까요?”
당태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아닌 게 아니라 객잔에 당태세를 찾아온 것은 바로 무창신룡 진언표였다.
“노야(老爺), 다른 게 아니라 이번 보름날이 저희 진가약실에서 저희와 같이 뜻을 하는 약재상과 의자들을 불러 같이 만찬을 즐기는 하례(賀禮)가 있습니다. 꽤 큰 잔치가 될 법한데 제가 사과도 드릴 겸 두 분을 모시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아룡은 진언표의 말을 듣더니만 입이 귀밑까지 걸렸다가 다시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어깨에 힘을 주었다.
“허! 허험! 그 무례함을 작은 잔치 한 번으로 넘어가려 하다니 좀 너무하다 생각되지 않소? 굳이 그렇게 강권한다면야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도 있겠소만….”
“비록 우리 진가약실의 규모가 줄었다 하지만 그래도 무창의 약업(藥業)에 관련된 이 중 삼 할은 찾아올 것입니다. 잔치도 본문(本門)인 견정문에서 열 것이라 규모가 다른 곳에 비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근사한 음식과 술도 많이 준비해 놓았습니다.”
“술이라?”
진언표의 말에 아룡의 눈이 반사적으로 돌아가자 진언표는 웃으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어떠십니까? 제가 두 분은 제 귀빈으로 초대할 터이니 그 잔치에서 여독(旅毒)을 푸시는 것도 좋은 방법 아니겠습니까?”
“숙부님, 저렇게 간곡히 간청하는데 저 말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아룡이 옆에서 변죽을 올리는데 정작 당태세는 우두커니 선 채 말을 아끼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일이 너무나도 쉽게 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견정문에 아무런 제재도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기회.’
지금 진언표는 남의 속도 모르는 채로 그에게 황금 같은 호기를 주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 이 기회를 놓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이렇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에 잠시 당태세가 어안이 벙벙해진 탓이었다.
“아… 그래도 되겠소이까? 우리는 의자도 아니고 약재상도 아닌 것을….”
당태세의 말에 진언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따로 친분을 나눈 귀빈들이라 하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약업에 관련된 사람뿐 아니라 저희 문도들도 있으니까요! 그때 골목처럼 시끄러운 일이 발생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하하!”
말을 마치고 껄껄 웃는 진언표에게는 거리낄 것이 없는 장부의 기상이 그대로 나타났다. 당태세는 진언표의 웃는 모습을 보자 저절로 입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 말씀하시니 저희도 참석해 보겠습니다. 그런 잔치라면 마다할 수가 없지요!”
“그럼요, 숙부님! 저희가 원래 이런 걸 좋아하지 않습니까?”
아룡의 말에 진언표는 알겠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태세에게 예를 표하였다. 당태세 역시 예를 표하며 진언표에게 웃는 낯을 보였다. 하지만 진언표가 객잔에서 사라져 밖으로 나간 뒤 당태세의 웃고 있던 눈동자는 서서히 날카롭게 변하고 있었다.
“마다할 수가 없지.”
당태세의 마지막 독백을 들은 아룡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무두리.”
당태세가 슬쩍 아룡을 부르자 아룡이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당태세는 슬쩍 텁수룩한 자신의 턱수염을 만져보더니 아룡을 바라보았다.
“슬슬 머리도 한 번 더 밀어야겠지만… 내가 수염을 다듬는 건 어떨 것 같으냐?”
아룡의 눈이 둥그레지더니 놀랍다는 듯 입을 벌렸다.
“만주족처럼 면도를 하시겠다는 겁니까? 윗수염만 빼고요?”
당태세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아룡의 입이 다시 옆으로 활짝 벌어졌다.
“역시 숙부님은 풍류를 아신단 말씀이야! 제가 어찌 두 손 놓고 있겠습니까? 당장 하시죠!”
신나서 떠드는 아룡의 말을 듣는 당태세의 입에 슬며시 쓴웃음이 올라왔다.
***
진언표가 이야기한 진가약실의 하례는 생각보다 훨씬 거창한 모임이었다.
무창에 모여 있는 의자와 약재상의 삼 할이라고는 하나 그 사람들은 얼추 백 명이 넘어 보였고 그들을 수용하고 잔치를 베풀고 있는 견정문의 장원 역시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였다.
일찍이 약재상들을 하나로 묶고 그들을 이용해 치부하였다고 하더니 실로 전성기의 영화를 짐작할 수 없었다. 수많은 손님들이 여기저기 앉아있는 상과 의자들만 하여도 모두 정갈하고 고급 진 것에 나오는 요리들과 술도 까다롭고 정성스레 고른 것이 분명하였다.
장강의 물고기에 하북의 명주, 남쪽의 향료와 기묘한 음식이 만나니 이곳이 극락이 아니고 무엇이런가.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은 일생의 고단함을 잠시 잊고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하루가 주어진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잔칫상에 초대받은 아룡의 입은 아예 닫힐 줄을 몰랐다.
“대단하구먼…….”
당태세조차 그 위용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정도 위세는 예전 북경이 있었던 견정문도 갖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당태세의 감탄은 진심이었고, 그들을 안내하던 진언표의 입에는 슬쩍 미소가 감돌았다.
“이 모든 건 제 부친께서 이루신 거지요. 전 이것들을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당태세는 대답대신 앞에 놓인 백주를 마시며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지금 당태세의 품 안에는 날카롭게 벼려진 단도 하나가 있고 손에는 목괴가 잡혀 있었다. 소문주 진언표의 친구라는 명목 하에 제대로 된 수색도 받지 않고 하례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조만간 이 하례에는 이도협(理度鋏) 진윤타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다.
그 순간, 당태세는 잔칫상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가 진윤타의 목에 칼을 들이박고 자신이 누구인지 온 천하에 고할 참이었다. 아직 불구대천의 원수는 다섯이나 남아있었지만 지금 앞에 만난 원수 하나를 해치우지 못한다면 남아있는 다섯 역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당태세가 표정을 굳히는 순간, 옆에 서있던 진언표가 슬쩍 웃음을 지으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당태세는 은근히 진언표의 시선이 불편했다. 왠지 모르게 이 젊은 친구 옆에 있으면 자신이 다짐하고 있는 일에 대한 불안감이 슬슬 밀려오는 것이었다.
“노야, 잠시 후면 견정문주께서 나오실 것입니다.”
“오, 자네 부친 말씀이로구먼.”
진언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당태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제가 하례를 기하여 문주께 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아무쪼록 노야께서는 제 말이 천하의 공도(公道)에 부합한지를 살펴주십시오.”
“뭐라고?”
진언표의 웃고 있던 표정은 어느새 진지한 얼굴로 변해있었다. 당태세는 빤히 진언표를 보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언표는 안도의 한숨을 쉬듯 짧은 숨을 내쉬고는 다시 웃음을 머금고 앞을 바라보았다.
젠장맞을. 이게 무슨 짓이냔 말이다.
당태세가 혼자 속으로 투덜거렸다. 지금 그의 일은 진언표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일이 이상한 쪽으로 꼬이는 중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진언표는 아예 이런 부탁을 하려고 자신을 이 자리에 부른 것 같았다. 그때였다.
“진가약실의 주인이신 견정문주, 이도협(理度鋏)께서 나오십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하얀 옷을 입은 백발의 노인이 슬쩍 안채에서 모습을 나타내었다. 당태세의 시선은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곳을 향해 움직였다.
그곳에는 원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