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호광 무창(6)
흙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던 안령도의 사내는 손을 부르르 떨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한 발만 더 내디뎠으면 자신들을 그렇게 골려 먹었던 진가약실의 차기가주 진언표의 목을 끊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늙은이가 자신의 발을 걸어 하늘이 내려준 때를 날려버렸다.
사내는 입에 가득 찬 흙을 내뱉고는 몸을 뒤집어 재빨리 일어나 목발을 짚고 있는 노인을 노려보았다. 순간, 안령도의 사내는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분노가 재빠르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노려보는 노인의 안광은 조금 전까지 머리를 굽신대던 비루한 늙은이가 보였던 눈빛과 천지차이였다. 안령도의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너… 너는… 누구냐?”
그를 노려보던 노인은 사내의 물음을 답하지 않고 오히려 차가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네놈의 도법은 태원(太原) 부운도(浮雲刀)렷다? 천하의 핍절한 백성들을 구하겠다고 부운처사가 완성한 도법 아니더냐?”
안령도 사내는 눈을 크게 뜨고 노인을 노려보았다. 처음 보는 늙은이가 자신의 도법의 내력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것도 개조(開祖)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하니 범상한 노인이 아닌 것이 분명하였다.
“뭐야! 넌 누군데 그것을 알고 있는 게냐!”
“상인들이 자신의 목숨을 지키려고 만들었던 도법을 배운 놈이 돈 많은 놈 뒤에서 협잡질을 하는데 그 도법을 쓰고 있다니. 부운도의 선인(先人)들이 부끄럽다 하겠구나.”
“시, 시끄럽다!”
“게다가 마지막 초식은 제자를 방패삼아 뒤에 숨어 있다가 암수를 날려? 그게 스승이 할 짓이냐? 이 놈들은 다 네 제자일 텐데!”
안령도의 사내는 이제 채 말을 하지도 못하고 진땀만 질질 흘리는 판국인데, 말문이 막히기로는 건너편에서 두 동강난 곤을 쥐고 이 광경을 바라보는 진언표도 마찬가지였다.
앞에 서 있는 노인이 오른발을 못 써 절절매던 침방 안의 병약한 노인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노인의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세는 가히 만부부당(萬夫不當)의 기운이었다. 진언표는 감히 입을 떼지도 못한 채 두 사람의 대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부운도법을 쓴다는 불량배 두목은 격동했던 심신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지 다시 몸을 똑바로 세우고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당태세의 엄중하면서도 비정한 말투에서 뭔가 다음에 일어날 일을 느낀 것 같았다.
“오냐, 내가 태원 부운도의 전인이다. 그러는 네 놈은 누구냐?”
“내 용모를 명왕에게 말하거라. 그가 일러주리라.”
두목의 입이 신경질적으로 뒤틀렸다.
“웃기는군, 늙은이!”
안령도가 물 위로 튀어 오른 잉어처럼 펄떡이며 공기를 가르고 당태세의 목을 향해 치솟았다. 햇살을 받은 도신이 빛살이 되어 당태세의 몸을 일격에 꿰뚫었다.
하지만 날이 노인의 육신에 닿기도 전에 노인의 목괴가 위로 올라가며 파죽지세로 들어오는 안령도를 쳐내고 돌진하는 사내의 가슴팍을 가볍게 밀어붙였다. 안령도의 사내가 눈에서 광망을 뿌리며 몸을 먼지와 함께 휘감았다.
안령도가 마치 용의 꼬리처럼 하늘에서 치솟더니 땅을 향해 채찍처럼 뿌려졌다. 순간 노인의 목괴가 쏟아지는 안령도를 가볍게 받아내고 다시 위로 튕겨 보냈다.
진언표의 곤을 일격으로 양단했던 안령도가 노인의 목괴를 베지 못하고 퉁겨 올라가자 진언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것은 진언표 뿐이 아니었다. 안령도의 사내는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늙은이가 자신의 공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경지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검결을 무를 도리도 없었다.
“이야아!”
안령도의 사내는 괴성에 가까운 기합을 발하며 당태세를 향해 안령도를 밀어 넣었다. 사내는 이 일격에 혼신의 힘을 다한 듯싶었다.
세차고 과격하며 허점 하나 보기 힘든 쾌격(快擊)이 당태세의 몸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그 순간 노인의 몸은 눈을 속이듯 천천히 움직이며 들어오는 안령도의 도배를 슬쩍 목괴로 누르는 척 하더니만 칼을 잡은 두목의 손목을 향해 뱀처럼 휘어져 들어갔다.
“끄어억!”
곧이어 두목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흘러나왔다.
“엄살이 심하구나.”
노인의 몸은 바람을 타고 흐르듯 칼 든 사내의 몸을 타고 움직이며 한가로이 입을 움직였다. 하지만 노인의 손아귀 아래쪽에서는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목괴가 칼 든 사내의 오른손과 어깨를 누르고 튕겨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왼손과 왼 어깨 사이로 들어가서 기이한 방향으로 사내의 몸을 젖히며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사내의 양팔은 그대로 축 늘어져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와 함께 두둑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울리더니 그대로 사내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며 엉덩이 뒤로 다리뼈가 툭 뛰어나온 채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진언표는 그제야 안령도를 쓰던 두목의 두 손과 어깨가 탈구되고 한쪽 다리가 뽑힌 것을 알 수 있었다. 쓰러진 사내를 바라보는 노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살기가 흘러나왔다. 진언표는 자기도 모르게 등 뒤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썩은 정파는 부둣가의 하오문만 못하다.”
쓰러진 사내가 뒤늦게 구걸했다.
“어… 사… 사… 대협… 살려…….”
“됐다.”
어느 새 노인의 손에 들려 있던 안령도가 그대로 두목의 가슴팍에 박혀버렸다. 진언표가 입을 열어 말릴 새도 없는 신속한 출수였다. 절름발이 노인은 길가의 꽃을 따듯 사람 하나를 간단히 해치운 것이었다.
진언표가 멍하니 사방의 광경을 둘러보고 있자 노인이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협은 다친 곳이 없으신가?”
여전히 기세가 태산 같고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닌 목소리였으나 노인의 눈빛은 어린 후학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진언표는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아니,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 진모. 대협에게 태산 같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우레와 같은 존성대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냥 늙은이라 부르시게”
“어찌 제가 그런 실례를….”
그 순간, 당태세의 북풍한설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진가약실의 진언표에게 이 노후(老朽), 구명(救命)의 대가로 하나만 부탁하고 싶네. 과하지 않은 청이니 들어주기를 바라오.”
내공이 깃들어 있던 웅혼한 목소리에 진언표는 가슴까지 저릿저릿해졌다. 젊은이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으며 대답하였다.
“무슨 말씀이든 하십시오. 이 진 모, 목숨으로 말씀하신 것을 이행하겠습니다!”
“그대는 이 모든 일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시게.”
“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진언표를 보며 당태세는 눈썹하나 움직이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무공을 썼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마시게. 형제와 부모는 물론이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발설치 말게. 나는 그저 절름발이 노인으로 남을 것이네.”
“아니, 어찌…….”
망설이던 진언표를 보던 당태세의 눈이 엄한 빛을 띠었다.
“하겠는가 말겠는가!”
“안 하겠습니다! 절대 노대협의 일을 발설치 않겠습니다! 발설하면 벼락을 맞아 죽겠습니다!”
휴우, 그제야 당태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노인은 다시 목괴를 잡고 비틀거리며 골목을 거슬러 올라 침방으로 향하였다. 진언표는 마치 술이라도 취한 듯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당태세가 골목을 올라가는 것을 진언표가 멍하니 보고 있는 순간, 골목 여기저기에서 그제야 사람들이 하나둘 튀어나오더니 진언표와 주변에 널브러진 시신을 보며 소리를 질러댔다.
“맙소사! 아직도 암수가 숨어 있었나!”
“소문주, 괜찮으십니까?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진언표는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주위 사람들을 말리고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당태세가 걸어간 골목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뒤에 서 있던 사내들은 주변을 둘러보고 멀어지는 진언표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찬사를 보냈다.
“결국 이 놈들도 무창신룡 진언표의 손에 쓰러졌구나.”
“그렇게 사람들을 괴롭히더니만 이리 될 줄 알았네.”
“역시 소문주 아니신가. 상처하나 없이 이 말종들을 물리치셨으니!”
“그래 무창신룡 아닌가!”
진언표는 뒤에서 들리는 낯 뜨거운 찬사에 슬쩍 얼굴을 굳히며 앞을 향해 걸어갔다.
당태세는 그곳에서 이전에 보았던 헌헌장부에게 붙들려 뭔가 한소리를 듣고 있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얼어붙게 만들 것 같은 기운을 폭사하던 고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조카의 잔소리에 어쩔 줄 모르는 늙은이만 남아 있었다.
“숙부님, 갑자기 사라지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러시다가 나귀하고 마차를 도둑이라도 맞으면 어쩌시려고 침방 밖으로 나가셨어요? 아까 보니까 칼부림이 사방에서 나는 동네 같던데!”
“내 치료가 잘 된 것 같아서 잠시 내려갔다가 조금 늦었느니라. 아닌 게 아니라 싸움도 벌어지고 해서 구경 좀 하느라고….”
“맙소사. 지금 연세가 몇이신데 그런 일을 하십니까? 지금 숙부님이 싸움구경 하실 참입니까?”
“그러게 말이다. 안 그래도 네 말마따나 큰일 날 뻔하였구나!”
술을 마신 벌건 얼굴에 옆구리에 손을 올린 채 당태세를 바라보던 아룡은 슬쩍 아래쪽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진언표를 발견하고는 다시 쌍심지를 올려붙였다.
“이보쇼! 뭘 그리 보고 있는 거야? 아까 침방에 환자 던져놓고 갔던 사람 아닌가? 우리에게 볼 일이 있나 왜 자꾸 얼쩡대오?”
진언표는 웃음을 머금고 다가가더니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아룡이 무슨 일이냐는 듯 진언표를 쳐다보자 진언표는 그와 당태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거듭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 벗이 누워있는 것을 재차 확인하러 왔다가 글쎄, 다른 하오문과 시비가 붙었지 뭡니까. 노대인께서 근처에 계시다가 놀라신 것 같아 확인을 하러 온 것입니다.”
진언표의 말을 들은 아룡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퉁방울만 하게 부릅뜨고 진언표에게 고함을 질렀다.
“어허! 이 사람이 어째 아까부터 자꾸 우리 숙부님을 싸움터에 끼어들게 해! 우리 숙부님이 비록 행색은 이래도 대청(大靑)에 충성을 맹세하신 분이야! 그 심기가 대단하신 분이라고! 비록 몸 하나 제대로 움직이기 힘드신 분이지만 그 속에 품은 뜻이 범인과 달라요! 우리 숙부님 털끝 하나라도 상처가 있었으면 오늘 당신하고 나 둘 중 하나는 죽었어!”
“어허, 무두리. 왜 이러느냐. 군자의 모범을 보여야지.”
“험! 험! 내 오늘은 숙부의 낯을 보아 참는 것이오! 앞으로는 주의하시오!”
그제야 진언표는 뭔가 깨달은 듯 당태세를 보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다시 한 번 크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였다.
“노야(老爺)와 대협께 참으로 결례가 많았습니다. 이 진언표, 비록 이렇게 살고 있지만 나름대로 올곧은 가문에서 학식 높은 스승께 학문도 전해들은 사람이오. 이 실수를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여 드릴 것이니 대협께서는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십시오.”
“아, 되었고! 우리는 돌아갈 것이니 더 이상 민폐나 끼치지 마시구려! 숙부님, 돌아갑시다!”
“그래, 알았다.”
노인은 바람 빠진 듯한 목소리를 내며 비틀비틀 장한의 뒤를 따라 걷는데, 힘이라고는 하나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진언표는 그렇게 비틀대며 걸어가는 노인의 기척에서 투기(鬪氣)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새삼스레 놀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진언표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서 나귀를 맨 수리가 침방을 벗어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찾던 귀인(貴人)이신가.”
한참동안 사라진 수레의 자취를 바라보던 진언표의 입에서 뜬금없는 독백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