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호광 무창(5)
당태세는 약방문을 열고 목괴를 짚으며 천천히 약방의 앞마당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지끈대는 무릎과 발목의 아픔도 조금씩 가라앉는 중이었고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던 찌릿한 통증은 어지간히 발에 무게를 싣지 않는 이상 괜찮았다. 괴이할 정도로 놀라운 침술이었다.
“이 정도면 혼자 견정문을 쓸어버릴 수도….”
당태세는 혼잣말을 중얼대다가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이를 드러내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혼자 눈살을 찌푸렸다 폈다를 반복하던 당태세는 고개를 흔들더니 다시 한마디를 내뱉었다.
“괜한 말을 들은 것인가. 기분만 찝찝하구나.”
당태세는 아까 약방 안에서 남평수가 해 준 이야기를 떠올려보았다. 남평수의 말에 의하면 지금 무창의 약방가와 약재 값을 흔드는 것은 팔기 순무를 뒤에 업고 있는 고영약방의 전횡이라 하였다.
“지금까지 정착되어 있던 약재상들의 관례를 권력과 돈을 동원해 흔들기 시작한 게 고영약방입니다. 말이 통하는 자는 돈으로 매수하고, 기개 있게 청탁을 거절하는 자는 몽둥이와 칼로 협박하여 하나둘 자신에게 약재의 매매권을 넘기게 하였지요. 지금은 거진 무창 약재상의 육칠 할이 고영약방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약재상들은 싫어하고 말이오?”
“당연한 노릇이지요! 가격을 올리고 내리는 것을 정하는 게 오직 고영약방인데 그것을 누가 좋아한단 말입니까? 저같이 끝까지 진가약실의 약을 쓰겠다는 이들은 이모저모로 불이익을 받지요.”
“남의원도 불이익을 받았소?”
“제가 해도침옹의 제자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으니 제게 직접 위해를 가하지는 못합니다만… 제 손님들을 겁박했지요. 그래서 찾아오는 이가 대폭 줄었고요. 그나마 진언표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침방을 계속 열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진언표라. 진언표.
이도협(理度鋏) 진윤타의 독자.
그리고 지금 진가약실을 대표하는 사내이자 고영약방에 맞서는 인물.
당태세는 침방의 마당에서 남평수가 마지막으로 내뱉을 말을 다시 떠올렸다.
“개인적인 도움을 받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지금 무창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협객은 진언표 하나뿐입니다. 그 아비는 관후하여 움직이지 않지만 그는 불의함을 보면 몸이 먼저 움직이고 공정하지 않음을 보면 자신의 수족이라 하여도 과감하게 내치지요. 지금 남아있는 사 할의 약재상이 고영약방의 말을 따르지 않음은 오직 진언표의 사람됨과 그 출중한 무공을 믿기 때문이오.”
“아까 본 젊은이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오?”
“무창의 영걸(英傑)이라 하여도 될 것입니다.”
머릿속에서 나누던 대화를 복기한 당태세의 표정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영걸이라니, 영걸이라. 황성을 버리고 야반도주한 호리(狐狸)같은 놈의 자식이 영걸이라!
“답답하구먼.”
당태세는 슬쩍 침방의 마당을 빠져나가 골목길을 내려다보았다. 떠들썩한 부둣가에 비해 침방이 있는 이 골목길은 사람의 왕래가 없었다.
남평수가 말한 것처럼 고영약방의 전횡 덕에 찾는 이가 없는 골목이 된 것일 터였다. 당태세는 머리를 싸 만지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세상 어디를 가든 자신의 뜻과 합치되는 것은 없고 그곳에서 자신이 할 일을 찾는 것이 사람의 길이라지만 이번 일은 개봉과 제남과는 또 다른 난관이었다.
“내가 그 영걸의 집안을 없애야 한다 이건가.”
당태세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한 말을 다시 곱씹고 있었다.
어차피 각오하고 떠나온 길이었다. 언제든 없앨 각오를 하고 데리고 다니는 종자와 언제든 길에서 객사(客死)할 것을 각오하고 움직이는 누더기 같은 몸뚱이였다.
머리마저 변발로 치고 한 번도 웃지 않았던 근엄한 얼굴을 광대처럼 일그러뜨리며 다니는 과정이었다. 후회나 동정 따위는 사치일 뿐이었다. 하지만 당태세는 그 모든 것을 각오한 자신의 마음 한편에 아직 무른 구석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협객에 영걸이라. 불의함을 보면 움직이는 영걸이라고.
“어이, 늙은이.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냐?”
그때였다. 한 무리의 껄렁한 사내들이 당태세의 앞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다섯 명의 젊은 사내들은 웃통을 모두 벗어 던지고 한 손에는 긴 몽둥이와 칼을 들고 있었는데 백주에 이런 식으로 길을 돌아다니는데도 아무도 저지하지 않는 것이 기이할 정도였다.
개중 두목으로 보이는 사내가 턱으로 남평수의 침방을 가리키더니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늙은이, 지금 저 집에서 나오는 거냐?”
“아… 예… 제가 다리가 불편하여…….”
“허, 아주 당당하네? 가지 말란 소리 못 들었나?”
저벅저벅 당태세의 앞으로 걸어오는 사내의 손에는 큼지막한 안령도가 들려 있었다. 무창 성도에서 칼을 빼 들고 골목을 횡행할 수 있다면 미친놈이거나 뒷배가 있는 놈이 분명하였다. 당태세는 이 자들이 남평수가 말한 고영약방의 하수인들임을 직감했다.
“아니, 저는 이곳에 초행입니다. 그저 발이 아파 들린 것 뿐이온데…….”
“아, 초행이라고? 근데 이 골목에 이런 침방이 있는 건 누구에게 들었소? 그놈 이름이 뭐요?”
이놈들 봐라. 사람들을 죄는 것이 악독하기 그지없는 방법을 쓰는구나.
당태세가 슬쩍 목괴를 잡은 왼손에 힘을 주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당태세를 공격할 것이고 말을 하면 이곳을 소개해준 의원을 치겠다는 것 아닌가.
당태세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지만 다시 분을 죽이고 차근차근 말하였다.
“아니 저는 그저 다리가 하도 아파 지나가는 이에게 물었을 뿐입니다요.”
“그러니까 그놈을 만난 곳이 어디냔 말이야. 그 동네, 그 골목이 어디냐고. 엉? 우리가 그곳에 가 보겠다는 거 아니냔 말이야. 이 멍청한 늙은아!”
노인의 눈동자에 서서히 불꽃이 올라왔다. 당태세의 목괴가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고 다친 오른발이 뒤로 빠졌다. 그 순간, 여름 아침 종소리처럼 청아한 목소리가 다섯 불한당의 뒤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백주에 골목에서 여러 장정이 노인 하나를 핍박하다니, 이 무슨 금수 같은 짓이냐!”
목소리와 함께 다섯 명의 시선이 동시에 뒤로 돌아갔다. 당태세 역시 뒤에 나타난 사내를 쳐다보았다.
익히 들었던 목소리, 꽃 같은 미모에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자신의 몸만 한 육척곤을 한 손에 들고 불한당을 노려보는 이는 다름 아닌 진가약실의 진언표였다. 그를 보던 안령도의 두목이 인상을 쓰면서 이를 드러내었다.
“오, 누군가 했더니 진낭(陳娘) 네놈이구나. 이 오라비가 보고 싶어 왔느냐?”
“노인에게 무기를 들고 협박하는 놈들을 어찌 그냥 보고 있으리.”
“얘들아!”
비릿한 웃음을 짓던 두목이 안령도를 앞으로 가져오자 그게 신호인 듯 나머지 네 명도 몽둥이와 칼을 뽑아들고 진언표를 둘러쌌다.
다섯 사내가 천천히 원을 그리며 진언표를 향해 무기를 들어 올리는데, 정작 가운데 서 있는 진언표는 당당하게 두 발을 땅에 딛고 그들 바라보는 이들을 벌레 보듯 노려보는 중이었다.
“진언표, 네 놈이 혼자 돌아다니기만을 기다렸다. 오늘 같은 날이 이 금대협에게도 오는구나! 네 놈의 목을 들고 약방으로 돌아가 전공을 칭송받을 일만이 남았어!”
“허, 재주도 없는 놈들이 머릿수만 믿고 설치는구나!”
“뭐가 어째?”
진언표는 싱긋 웃음을 지어보이더니만 자신의 곤을 바닥에 한 번 찍고 퉁 하니 허공으로 올리더니 두 손으로 휘감아 바람을 일으키고는 곤을 등 뒤로 숨기고 손을 들어 안령도의 두목을 가리켰다.
“사내대장부가 하늘 아래 두려워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떳떳하지 못한 삶이니 어찌 창검이 두려우랴! 장부로 태어나 칼을 잡았으면 구세(救世)활인(活人)만이 그 나갈 길이라, 앞에 걸리는 환란이 두렵다고 목숨을 아낄 것인가!”
“허! 네가 구세를 하겠다고?”
“힘없는 자를 착취하고 그 돈으로 제 배를 불리는 자들을 처리하며 다시 백성에게 저당한 몫을 돌려주는 것이 힘 있는 자가 해야 할 일! 그것이 구세가 아니라면 의무일진대!”
안령도를 든 사내는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는 듯 인상을 험하게 구겼다.
“얘들아! 쳐라! 목만 끊어 와라!”
두목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네 명의 부하가 일사불란하게 위치를 바꾸며 진언표를 압박해 들어갔다.
진언표의 곤이 앞으로 뻗는 순간 옆에 서 있던 봉을 든 사내가 먼저 위치를 바꾸고 일격을 날렸다. 진언표의 곤이 옆으로 퉁겨나가자 그 틈을 타고 박도를 든 사내가 칼을 아래에서 위로 흩뿌렸다.
진언표의 손목을 일도에 끊어버릴 일격이었다. 하지만 진언표는 곤을 회수하는 대신 그대로 몸을 돌려 그 자리에 빠져나가 다른 곳에서 그를 습격하는 또 다른 박도사내의 공격을 막으며 그와 합을 주고받았다.
그 순간, 뒤로 빠져나간 또 다른 봉수가 번개처럼 진언표의 허벅지를 올려쳤다.
뻑하는 소리와 함께 진언표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진언표는 박도의 공격을 뿌리치더니만 자신의 손에 들린 육척곤을 그대로 앞으로 뻗어 자신을 때린 사내의 봉을 위로 올려치고는 그 사각으로 자신의 곤을 창날처럼 찔러 넣었다.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봉수 하나가 쓰러졌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어느새 삼각(三角)의 진형을 다시 짠 채 진언표를 압박해 들어갔다.
당태세는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저자들의 행색은 하류 잡배나 마찬가지였지만 무공은 뒷골목에서 몇 번 칼을 맞부딪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분명 근본 있는 무공을 배운 무인들이었고, 초라하니 불량배로 행색을 바꾼 자들일 뿐이었다.
“고영약당이라…… 고약하구먼.”
“그대로 들어가라!”
안령도를 든 사내가 팔을 걷어 올리더니 세 사람의 부하와 함께 참전하였다. 두령이 포위망에 들어가자 갑자기 합진의 세력이 일신(一新)하였다.
봉으로 길게 찌르는 순간, 두 명의 박도가 진언표의 사각에서 뛰어들며, 그들이 진언표를 막아내지 못하면 안령도의 사내가 살벌한 일격을 진언표에게 날렸다.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정확도를 지닌 진형이었다.
당태세가 보기에도 수백수천 번의 연무가 없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협격이었다.
하지만 진언표는 가볍게 눈썹을 찌푸리더니 자신의 곤을 위로 들어 올리고는 다시 자신을 향해 들어오는 두 명의 도수를 보며 슬쩍 몸을 뒤로 뺐다. 두 사람의 박도가 동시에 위아래에서 치고 들었다.
그 순간, 진언표의 몸이 다시 한 발 물러서는가 싶더니만 두 손으로 잡고 있던 곤이 상하를 뒤바꾸며 동시에 박도 두 개를 튕겨내고 일순간 생긴 두 도수의 사각으로 다시 좌우가 바뀐 곤이 일격을 가하였다.
실로 번개 같은 공격에 칼잡이 둘이 신음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대로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이를 보고 있던 봉수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는 순간, 진언표의 몸이 바람처럼 다가오더니 보이지도 않는 손놀림으로 손을 움직여 손목과 허리 어깨 정수리를 연달아 내리쳤다.
흠잡을 데 없는 연격이었다.
봉수는 눈이 뒤집힌 채 그 자리에서 몸이 무너져 내리는데, 그 순간을 타고 그림자처럼 안령도의 사내가 봉수의 뒤에서 튀어나오더니 진언표의 곤을 번개처럼 내리쳤다.
“젠장!”
살기 띤 안령도의 쾌격에 맞은 목곤이 썩둑하며 둘로 갈라졌다.
아무리 나무로 만든 곤이라도 어지간한 도의 일격에 잘리지는 않는 법인데 두목의 안령도는 진언표의 목곤을 수수깡처럼 베어버렸다. 분명 이름을 숨긴 고수(高手)의 손놀림이었다. 진언표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하였다. 안령도의 사내의 입에 히죽 웃음을 맴돌았다.
“잘 가라. 진낭!”
사내의 외침과 함께 안령도가 위에서 아래로 흩뿌려졌다. 진언표는 죽음을 감지한 듯 인상을 쓰면서도 끝까지 안령도의 궤적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 순간, 진언표의 눈에 들어온 안령도의 궤적이 기이하게 변하였다.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던 안령도의 날끝이 갑자기 허공으로 휙 치솟더니만 이내 땅을 향해 꺾이더니 그대로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커억!”
일순간 벌어진 광경과 연이어 들려온 안령도 두목의 비명에 진언표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보았다. 그리고는 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눈이 번쩍 떠지며 입을 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절뚝대며 목발을 짚었던 노인이 안령도 두목의 뒤에 서 있는데, 그 노인의 매서운 눈빛은 안령도를 든 두목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어나라. 개야.”
노인의 목소리는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살기가 가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