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호광 무창(3)
남평수의 허락을 기다리고 말고 하기도 전에 사내들이 한 사내를 받쳐 들고 침방 안으로 들어왔다. 당태세는 사내의 몰골을 보더니만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두 사내가 어깨를 떠메고 들어온 사내는 이미 축 늘어져 두 다리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지도 못하였고, 이미 시뻘겋게 젖은 상의를 타고 핏물이 뚝뚝 발 아래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아룡이 눈살을 찌푸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서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남평수는 당황한 기색 없이 다친 이를 둘러매고 온 사내들에게 명을 내렸다.
“탁자 위에 눕히게.”
순식간에 탁자 위의 물건이 치워지고 사내가 위로 올라갔다. 남평수는 팔을 걷어붙인 채로 가죽주머니에 말아놓은 침들을 펼쳐놓더니 주저 없이 단도로 사내의 웃옷을 찢어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룡은 그제야 정신을 수습하고 남평수와 문을 밀고 들어온 사내들을 보며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아니! 여보시오! 지금 사람 기다리는 거 안 보여? 우리가 먼저 와서 진료를 받아야 하는데 늦게 온 주제에 왜 새치기야!”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이 청년은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어렵겠소.”
남평수의 조용한 말에 아룡은 더 화가 난 듯 보였다.
“아니, 한족은 질서도 없고 법도 없나!”
당태세가 뭐라고 말을 꺼내 새도 없이 어깨를 들썩대며 시비조로 말을 하는 아룡은 이미 자기가 내뱉은 말에 자기가 역정을 내는 상황까지 도달한 듯싶었다.
눈에 분기가 탱천하여 의자와 들어온 사내들을 노려보는 것이 조만간 칼이라도 꺼낼 형국이었다. 당태세가 표정을 굳히며 슬쩍 자신의 목괴를 들어 올리려는 찰나, 앞에서 시원시원한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참으로 미안하게 되었소! 대협! 노사! 참으로 황망한 일이라 내가 죄를 지었소이다!”
당태세와 아룡의 고개가 일제히 한쪽으로 쏠렸다. 울려 퍼진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기묘하게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은, 아니 아직 앳된 티가 흐르는 소년 장한이었다.
소위, 전해지는 글에 관옥(冠玉)같은 얼굴이라는 찬사가 있지만 지금 당태세 앞에 서 있는 사내야 말로 그 칭송에 적합한 얼굴이었다.
얼굴은 하얗고 붓으로 그린 듯한 눈썹 아래 커다란 눈동자와 장인이 깎은 듯한 콧날과 붉은 입술이 놓여 있는데 코 아래 엷은 터럭만 없었다면 변복(變服)을 한 미녀라고 해도 될 법한 미색(美色)이었다.
하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커다란 키는 그가 장부임을 증명하고 있었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아룡도 한차례 숨을 돌리고 사내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는 기이한 매력이 있었다.
“우리는 이 동네에서 거간을 하는 상인들이오. 조금 전 상대편 상인들과 이문에 대한 논쟁이 격해져 한바탕 드잡이질이 있었는데 서로 금도(襟度)가 부족하여 이렇게 피를 보는 상황이 생기고 말았소이다. 아무쪼록 대협께서는 넓은 아량으로 모자란 소인들의 말썽을 해량(海量)해 주시길 바라겠소이다!”
사내는 생긴 것만큼이나 말 또한 고아하였으니, 듣는 이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자신을 낮추면서도 품격은 잊지 않고 있었다.
아룡은 불에 바람을 잔뜩 넣은 채 사내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사과가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은 듯 어깨를 들썩이더니 슬쩍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당태세가 알겠다는 듯 아룡을 대신하여 말하였다.
“알겠소이다. 의자 말씀처럼 지금 사람의 명이 중한 것 아니겠소. 나는 기다릴 만 하니 어서 일을 하시구려.”
“둘 다 화해를 하였으면 잠시 조용해 주시구려. 그리고 자네 둘은 물을 떠오게.”
남평수의 표정이 변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상사 관심 없는 처사(處士)같은 몰골이었는데, 환자가 들어오고 피를 보자 사내의 표정은 마치 법률을 앞에 두고 죄인을 판별하는 판관 같은 엄숙한 표정이 되었다.
남평수의 손이 피가 꿀럭꿀럭 새어 나오는 환자의 가슴팍과 배를 이리저리 어루만지는가 싶더니만 어느새 손에 들려있는 네 치 정도의 뾰족하고 굵은 대침(大鍼)이 그대로 사내의 갈빗대 사이를 쑤시고 들어갔다.
그를 지켜보던 아룡의 표정이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는데 누워있던 사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날선 대침이 들어간 곳을 통해 피와 물이 흘러나오는데 그를 보던 남평수의 눈이 찌푸려지더니만 이내 가느다란 침들을 수 개 뽑아들더니 환자의 가슴팍과 목과 머리에 번개같이 꽃아 넣었다.
당태세가 보기에도 침을 찌르는 빠르기와 정묘함은 가히 경지에 도달한 위인이었다. 남평수는 환자를 보며 혼자 책을 읽듯 중얼거렸다.
“이놈, 귀는 들리지만 혈을 침으로 막아 놓았으니 몸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지금 칼날이 네 배를 뚫고 위장을 건드렸으니 예후가 좋지 않다. 고여 있던 어혈은 지금 내가 침으로 뽑았고, 칼로 찢어진 곳은 지금 내가 다시 꿰매고 있으나…….”
어느새 남평수의 두 손은 시뻘겋게 물든 채 환자의 배 위에서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침의는 칼이 들어간 곳보다 한 치 높은 곳에서 피침(鈹鍼)으로 길게 배를 째더니 지혈을 하면서 동시에 상백피 껍질을 바늘에 꿰어 상한 위장을 봉합하고 있었는데, 그 손길이 거침없고 들어가고 나가는 방향에 헛갈림이 없었다.
‘전란 때도 보기 힘든 일을 혼자서 스스럼없이 하는구나!’
당태세는 그 손놀림을 보면서 속으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명의(名醫)의 반열에 오를 법한 실력이었다. 남평수는 어느새 자신의 수기(手技)를 마무리하고 책을 읽는지 환자에게 말을 하는지 모를 독백을 다시 중얼대고 있었다.
“일단 꿰매고 난 뒤 사흘을 지나야 네 생사를 확인할 수 있음이다. 그 뒤 약재를 써서 매일 갈아주되, 보름이 되도록 덧나지 않으면 살 것이오. 그 때에도 고통이 심하고 고름이 찬다면 생사의 갈림을 내가 판단하지 못하리라.”
어느새 아룡도 침을 꿀꺽 삼키며 남평수의 의술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참동안 말없이 그를 지켜보던 아룡은 귓속말로 소곤대듯 당태세에게 소리죽여 말하였다. 조금 전까지의 방약무인함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숙부님, 저 의원에게 다리를 맡겨 보십시오. 분명 차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구나.”
그때 하아 하는 긴 한숨과 함께 환자의 숨소리가 고르게 돌아왔다. 그를 데리고 왔던 사내들도 그제야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남평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닦으니 아까 아룡에게 사과를 했던 미장부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남평수에게 예를 갖추었다.
“남대가, 이 일은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진실로 우리 동무의 은인이십니다!”
“과한 일을 벌이지 말라. 사람의 목숨을 사고파는 이들이 목숨을 아낄 줄 몰라서야….”
미장부는 머쓱하니 웃음을 짓고 누워있는 친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당태세와 아룡을 보며 다시 인사를 올렸다. 다시 말을 거는 사내의 표정은 진지하면서도 따스함이 넘쳐흘렀다.
“다시 한 번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런 황당한 일을 겪게 해 드려 죄송할 따름이오. 기다려 주시니 이 진모가 그저 감사드릴 노릇입니다!”
예의범절이 바르고 태도마저 진실 되어 보이니 아룡조차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화답할 정도였다. 당태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공자의 말을 받았다.
“괜찮소이다. 이제부터 치료 받으면 될 일이오.”
“그렇다면 남대가. 이 노사의 치료비는 우리 진가약실이 대겠습니다. 우리에게 맡기시오.”
“또 쓸데없는 짓을…….”
남평수가 투덜대며 미공자를 바라보았지만 딱히 사내가 하려는 일을 막지는 않는 듯 보였다. 대신 침의는 같이 들어온 사내들에게 활갯짓을 하며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다들 되었으니 모두 나가거라! 이제 환자만 남고 다들 가서 일 보시게! 언표, 자네도 나가게!”
“그럼 잘 부탁드리오!”
미장부와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나간 다음이 되어서야 약방은 다시 고즈넉한 정취를 되찾았다. 침상으로 옮겨진 환자의 작은 신음소리만이 간간히 울리는 침방 안에 남은 것은 당태세와 아룡, 그리고 침의 남평수 셋뿐이었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진맥을 해 보겠습니다. 환자는 다리를 올려 보시구려.”
당태세가 말없이 오른발을 들어 남평수의 앞에 보이자 남평수의 표정이 다시 심각해졌다. 한참동안을 바라보던 남평수의 입은 닫혀서 열릴 줄을 모르더니만 굳게 닫혀 있던 입이 열리며 작은 한숨이 먼저 새어 나왔다.
“이 다리를 땅에 디딘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구먼.”
남평수는 말을 끝내자마자 긴 장침을 하나 꺼내 불문곡직 당태세의 무릎 아래쪽으로 마구잡이처럼 쑤셔 넣었다. 보고 있던 아룡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지만 정작 당태세는 수염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남평수가 당태세에게 물었다.
“아프지 않습니까?”
“아프지 않소.”
“큰일일세.”
남평수는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장침 하나를 뽑아 반대쪽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아룡은 이제 꿈을 꾸듯 멍하니 긴 침이 사람 허벅지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남평수의 입이 다시 열렸다.
“아픕니까?”
“조금 저리오.”
“시간 좀 걸리겠습니다. 한 식경은 침을 맞아야 진정이 되시겠소.”
“그리 오래 걸립니까?”
아룡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남평수가 아룡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고목에 싹 틔우는 일인데 어찌 한 식경이 긴 시간인가? 어차피 진가약실 소장주가 돈까지 다 내주었는데 좀 기다리면 어떤가?”
“진가약실 소장주?”
눈이 둥그레진 당태세의 말에 남평수는 침상에 누운 채 신음하는 칼 맞은 사내를 슬쩍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그 허여멀건 계집애같이 생긴 놈 말이외다. 저 자도 진가약실의 친구요. 내가 그쪽에서 약을 받으니까 이런 사달이 일어나는 게지.”
당태세는 눈을 끔벅이며 바닥을 바라보고 있다가 슬쩍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룡을 넌지시 불러 세웠다. 무슨 영문이냐는 듯 돌아보는 아룡에게 당태세가 은근한 소리로 말을 걸었다.
“무두리. 어차피 한식경이나 걸릴 일이라면 네가 여기에 나와 같이 있을 이유가 없다. 재미없이 노인 침 맞는 것이나 볼 바에는 근처에 나가서 술이나 한 잔하고 오는 게 낫지 않겠느냐?”
“숙부님을 혼자 두고 말입니까?”
“한 식경 있다가 오면 되는 일 아니냐! 어차피 약값도 굳었겠다 네가 여기 앉아있을 이유가 뭐가 있어? 시간 날 때 놀다 오너라!”
아룡이 잠시 머리를 갸웃대더니만 이내 표정이 환해지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약방문을 열고 활기차게 밖을 향해 뛰쳐나갔다. 남평수는 다시 침을 놓을 자리를 찾아 고민하면서도 당태세를 향해 책을 읽듯 중얼거렸다.
“숙질사이가 좋은 것 같으면서도 멀게도 느껴지는 게 참으로 희한합니다. 두 분이 사업이라도 같이 하시는 모양이오.”
“확실히 의자께서는 눈썰미가 빠르시구려. 혈기방장한 젊은 놈이 여기 앉아서 무슨 일을 하겠소이까?”
남평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원래 환자와 의원 둘이 같이 있는 것이 훨씬 집중도 잘 되고 걸리적거리지도 않는 법이외다.”
“대신 내 궁금한 것이 몇 개 있는데 그걸 답해주실 수는 있겠소이까?”
남평수가 혈을 손으로 짚어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노사께서는 뭐가 그리 궁금하십니까?”
남평수의 말에 당태세의 눈이 차가운 빛을 발하였다.
“내가 걸을 수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