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호광 무창(1)
“생각보다 풍광이 괜찮습니다요. 하하! 저는 살면서 소주, 항주가 천국 같다 하여 늘 그곳 경치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창의 경지 또한 볼 것이 산더미로군요!”
수레를 끌고 무창 성도 안으로 들어가는 아룡은 눈에 비치는 풍경이 꽤나 맘에 들었는지 연달아 감탄사를 올리고 있었다.
강과 호수 근처에서 불어오는 사람은 상쾌하여 뜨거운 햇살을 견디게 해주었고 맑은 햇살 아래 우뚝우뚝 속은 가람의 불탑과 누각들이 초록색 수풀과 어우러져 문인(文人)들의 시상을 자극하는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 뭐라 하였느냐. 무창도 볼 것이 꽤 많을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게 말입니다요! 무창이 이 정도면 소항은 얼마나 대단하다는 것인지!”
당태세는 피식 미소를 머금고 수레 밖을 바라보며 무창의 풍광을 살펴보았다.
무창은 젊은 시절, 행협장의(行俠仗義)의 뜻을 품고 천하를 주유하던 시절에 비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옛 고택과 높은 탑은 여전히 그의 기억에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 길과 길옆을 흐르는 수로와 강변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전란의 상처가 무창 역시 훑고 지나갔을 터이지만 지금 당태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활발한 시장과 오가는 인파의 행렬뿐이었다. 단지 사내들의 머리가 상투에서 변발로 바뀌었고, 가끔 지나가는 팔기(八旗)의 깃발이 보이고 있다는 것만이 시대가 변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시대가 변하고 있는 게지.”
당태세는 혼잣말을 중얼대며 자신의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 ‘무창 견정문’에 대한 내용을 조심스레 읽어보았다. 산동의 금월방주 장철오는 생각보다 꼼꼼하게 견정문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
-견실하게 문파를 운용하고 상업에도 몸을 뻗어 약방(藥房)과 하역에도 손을 대고 있음. 세간의 평도 나쁘지 않아 무창에서는 존경받는 방회로 자리 잡고 팔기에도 협조적임.
당태세는 종이를 다시 품 안에 밀어 넣고 뭔가 잇새에 낀 것처럼 혀를 볼 안에서 꿈틀대더니 아룡이 들리지 않게 욕을 내뱉고 다시 바깥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입에서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고.”
견정문의 진윤타(陳允妥), 이도협(理度鋏) 진윤타.
원래 무림의 인사들이란 것이 말보다는 주먹이 먼저 나가는 게 일상일 정도로 성격이 불같은 이들이 많았고, 과격한 언사 정도는 애교로 치부해 버려도 될 법한 기풍이 있었다.
그나마 대처에 있거나 명망 있는 정도무문의 굴레 안에 있다면 어느 정도 문파의 예규로 문도들을 다스리지만 그 문파의 이해충돌이 있는 경우라면 숨겨두었던 문도들의 흉폭함이 종종 드러나곤 하였다.
이럴 때 이도협 진윤타는 빛을 발하는 위인이었다.
“그 놈에게는 이치에 맞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지.”
당태세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지나간 일들을 떠올렸다.
구봉문과 사형문 같은 과격한 문파들이 서로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점점 날선 공방이 이어지면 성내의 다른 문파들은 견정문을 불러왔다. 이도협 진윤타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중재하고 화평을 이끌어내는데 탁월한 위인이었다.
그의 별호 이도협(理度鋏)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이유 없는 싸움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가급적이면 서로에게 모두 이득이 되는 쪽으로 대화를 열어가는 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렇다고 말만 번지르르한 사내도 아니었다.
그와 견정문이 지니고 있는 도법과 창법은 그 운용이 견실하고 공방이 두터워 상대방이 능히 몇 합 안에 승부를 내지 못하면 견정문의 중후한 방어에 의해 지리멸렬해질 수밖에 없었다. 진윤타는 견정문의 절기를 모두 체득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장문인 중 하나라는 평도 있었다.
그런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사내이니 그가 북경 구대문파의 수장을 맡아야 한다는 소리 또한 여기저기에서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진윤타는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문파의 수장을 당태세에게 넘겨 버린 위인이었다. 당태세는 당시의 일을 회상하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여우같은 놈이지. 결코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아.”
당태세는 진윤타를 딱히 신뢰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육 대 사 정도로 신뢰하는 편이었다. 당태세가 아는 한 견정문은 항상 신뢰를 받았지만 어디에서도 손해 보는 일 역시 하지 않았다.
“대인군자(大人君子)도 아니고 소인배(小人輩)도 아니었던 놈이지.”
당태세는 그 날, 황성이 이자성의 군대에게 포위되고 북경구대문파가 배신을 결정하지 못했을 때, 지루한 격론에 방점(傍点)을 찍고 황제를 배신하기로 결정짓는데 견정문의 공이 컸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견정문은 늘 다툼이 있는 곳에서 합의를 도출해 내는 역할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당태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직접 물어볼 것이다.”
당태세를 태운 수레는 이제 무창의 도성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아룡이 쓸 만한 객잔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기웃대고 있었다.
“확인해 보면 알 노릇이겠지.”
당태세는 혼잣말을 중얼대며 생각이 정리되자, 이제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견정문을 찾아봐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창은 개봉과 비슷한 규모일지라도 강을 끼고 있으니 그 복잡함이 개봉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때였다.
“어라? 오른쪽에 큰 객잔들이 많으니 그리 한 번 가 보겠습니다!”
아룡이 갑자기 당나귀를 옆으로 급히 돌리며 수레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 서슬에 수레바퀴가 길가의 돌멩이 사이에 올라탔다가 빠지면서 양옆으로 급하게 덜컹거렸다.
순간 당태세의 오른발이 수레의 난간에 부딪히고 다시 튕기면서 극심한 통증이 당태세의 무릎과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숙부님! 숙부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이놈아! 그렇게 휙 수레를 꺾으면 어떻게 하느냐!”
“아니, 그 아래 돌멩이가 있을지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요?”
당태세는 목괴를 뻗어 아룡의 모가지를 낚아채고 그대로 턱을 부숴버릴까 하는 충동이 머리끝까지 올라왔지만 그러기엔 지금 욱신대는 통증이 너무 컸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개봉에서 치룬 오자평과의 마지막 일전에서 다리를 너무 무리하게 놀린 탓이었다.
“멀쩡한 다리로 막았어도 모자랐을 일인데…….”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숙부?”
당태세는 고개를 흔들며 괜찮다는 듯 다시 인자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아니다. 아룡. 얼른 객잔을 찾아보는 것이 낫겠구나. 다리가 조금 부은 듯하니 숙소를 잡은 뒤 정양을 하는 것이 낫겠다.”
“알겠습니다. 숙부. 저는 무두리입니다! 무두리라고 불러주십시오.”
언제든 꺼질 것 같은 살의(殺意)를 다시 지펴 올리는 데는 탁월한 재주가 있는 아룡이었다.
“그래. 무두리. 숙소부터 찾아보자.”
아룡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곧장 부두가 앞의 대로를 따라가더니만 가장 커다란 객잔 안으로 우격다짐 밀고 들어갔다. 객잔 주인이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아룡은 그를 보고 턱을 쳐들고 호쾌하게 외치다시피 말했다.
“주인장! 가장 크고 깨끗한 방! 침상 두 개짜리로 준비해 주시오! 돈 걱정 마시고!”
주인이 아룡의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재빨리 수레와 나귀를 내가는데, 당태세가 수레에서 내려 절뚝거리며 길을 찾자 객잔 주인은 화급하게 일꾼과 함께 뛰어나와 당태세를 부축하며 말했다.
“아이고! 몸이 불편하시면 진작 말씀하지 그러셨습니까! 대삼! 일층의 큰 방으로 숙소를 마련해드려라! 어디서 이렇게 크게 다치셨습니까?”
“아니오. 고질(痼疾)이라오. 그냥 조금 정양하면 나을 것이오. 수레가 흔들려서 조금 더 아픈 것뿐이니…….”
당태세의 입에서 말은 그렇게 나왔지만 오른발이 땅에 닿자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당태세의 하는 양을 보고 있던 객잔주인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이리저리 보더니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래도 약을 쓰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 무창이 호광에서도 좋은 약재가 많이 들어오는 동네입니다. 괜찮은 의자(醫子)와 약재상도 많지요! 뜸과 침을 같이 쓰는 의자도 있으니 필요하시면 금세 불러드리겠습니다!”
“글세… 괜찮다니까 그러시는구먼.”
그때 슬쩍 방을 확인해보고 돌아온 아룡이 객잔주인과 당태세의 대화를 듣더니만 끼어들었다.
“숙부님, 그러지 마시고 주인 말대로 한번 해보십시오. 이 먼 길을 오시면서 제대로 약 한 첩 안 쓰지 않았습니까? 원래 늙으면 기력이 떨어져 그냥 객사(客死)하는 게 태반이란 말입니다. 그런 건 막아야지요.”
“아니…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데…….”
객잔주인은 미친놈 보듯이 아룡을 쳐다보다가 다시 당태세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부박(浮薄)해도 조카분 말이 옳긴 합니다요. 어르신들은 때에 맞춰 약을 써야 병이 더 안 크는 법이지요. 제가 좋은 곳을 소개시켜 드릴 테니 한번 써 보십시오. 그런데 무창에는 어인 일로 오신 겁니까?”
“그냥 한 번 유람삼아 들러 본 것입니다.”
아룡의 말에 객잔주인은 박수를 치더니 더 심각한 표정으로 당태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시다면 시간도 넉넉하실 테니 한번 약을 써 보십시오. 탕약 같은 건 우리 객잔에서도 달여 드릴 수 있습니다. 무창에 오셨으면 몸도 마음도 편하게 계시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셔야지! 안 그렇습니까?”
졸지에 환자가 되어버린 당태세는 쓰다 달다 말하기도 번거로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차피 한 번은 의자에게 상세를 보여야겠다고 마음도 먹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태세는 객잔주인에게 어쩔 수 없다는 듯 투덜대며 말하였다.
“별 일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주인께서 그렇게 말하시니 그 성의도 무시 못 하겠구먼. 여기 괜찮은 의자나 약재상이 있다 이거지요?”
“네. 의자 하나 바로 모셔다 드릴까요?”
그 순간, 당태세의 머리가 차가와지며 번개처럼 스쳐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는 주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예전에 듣기로 이 곳 무창에 진가 성 쓰는 약방이 꽤 명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거… 뭐라더라? 견정… 뭐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 견정문에서 하는 진가약실(陳家藥室) 말씀이시구려?”
찾았다.
당태세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객잔주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소이다! 진가약실 맞는 것 같구먼! 그곳이 꽤 용하다 들었는데 실제로 그러하오?”
객잔주인은 당태세의 말을 듣더니 빙긋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휘휘 저었다. 당태세의 들뜬 표정이 순간 멍하게 바뀌어버렸다.
“그건 예전 말입니다요. 진가약실 용하다는 말도 몇 년 전까지의 일입지요. 요즘은 고영약당(高英藥堂)이 무창에서 제일 잘나가는 약방입니다. 그곳 약재를 이제 진가약실이 따라가지 못하지요.”
“아, 그, 그렇소?”
“마침 우리 집에 들르는 의자(醫子)가 고영약당에서 약을 떼어다 쓰는 사람이올시다. 한번 그 사람에게 진맥을 받아 보시는 것이 나으실 게요. 야! 대삼! 너 빨리 어디 좀 다녀와야겠느니라!”
당태세는 눈을 껌벅이며 앉아 객잔주인이 하는 일을 지켜보다가 나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진가약실이… 별 볼일이 없다 이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