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하남 개봉부 구봉방(2)
오자평은 이 아침, 자신의 목전에 들이닥친 일이 생시인지 환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구봉방의 방도들은 사방에서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녹영군의 창날에 맞고 하나둘 포석에 붉은 피를 뿌리고 있었다. 이미 저택 안은 하얀 구봉방도의 옷이 아닌 다채로운 개봉 팔십방회의 맹도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발 앞에는 그가 정성들여 키워놓았던 팔익의 필두였던 영도와 환창이 과거의 귀신에게 맞아 죽은 채 말없이 누워 있었다.
“저기 구봉방주가 있다! 잡아라!”
순간 녹영군의 군관이 외친 소리 하나에 구봉방주 오자평의 정신이 번뜩 돌아왔다.
사내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목괴의 노인과 아래에서 계단을 타고 쇄도해 들어오는 녹영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내는 당태세에게서 등을 돌렸다.
늙은 구봉방주의 몸은 신속하게 연무장을 빠져나가 본전이 있는 곳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혀를 차더니 목괴를 겨드랑이에 끼고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비루하구나, 오자평! 네놈을 찾아 저승에서 이곳까지 달려왔건만!”
당태세의 울부짖음에 오자평은 답하지 않았다.
백포노인은 본전의 옆으로 달려 내려가더니 한없이 긴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당태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목괴를 짚고 태산을 올라가는 묘용은 있어도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당태세는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렸다.
당태세의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괴창이 계단참을 찍고 다시 몸을 허공으로 띄우고 다시 한참을 껑충 뛰어 내려간 뒤에는 왼발로 계단참을 박차고 다시 몸을 아래로 뛰었다. 마치 계단 아래로 몸을 물수제비처럼 튀기는 형국이었다.
자칫 잘못 계단을 헛디디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머리가 박살날 참이었다.
“괴창의 날이 다 나가겠구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당태세의 몸이 평지에 착지했다.
이곳은 구봉방의 저택 안에서도 최심부에 해당하는 듯, 머리 위에 빛나는 태양빛이 일정 땅 아래로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당태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모든 것이 돌로 이루어져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기이한 공간이었다. 순간, 당태세의 귀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물소리구나.”
당태세는 몸을 돌려 소리의 근원을 찾아보았다. 바로 당태세가 내려온 계단참의 옆으로 검은 물줄기가 흘러내려가는 중이었다. 다름 아닌 운하(運河)였다. 원래 개봉부는 운하로 유명한 수향(水鄕)인 바, 거대한 저택 아래로 물길이 뚫려 있다 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용의주도하구나, 오자평.”
당태세의 눈에 밧줄이 풀린 채 흘러 내려가는 작은 배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자평은 자신이 배를 타고 떠나가면서 정박되어 있던 다른 배들의 홋줄을 다 끊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당태세는 어둠 속을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자평이 배를 타고 나간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직 다른 배들은 이리저리 운하와 석축에 서로 몸을 부대끼며 천천히 물을 타고 떠내려가는 중이었다. 당태세가 짐승처럼 몸을 낮추더니 목괴를 딛고 왼발에 힘을 주며 일순간 몸을 날렸다.
노인의 몸이 훌쩍 어둠 속으로 솟구쳐 운하 속으로 빠져드는가 싶더니만 이내 흔들리는 작은 배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당태세는 목괴를 빼 삿대처럼 물속을 찍으며 바르게 배를 젓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빠르게 몸이 앞으로 나아갔다. 배는 물살을 가르며 끝없는 어둠 속을 떠내려갔다. 당태세는 앞의 어둠을 향해 절규하듯 외쳤다.
“어디로 갔느냐, 구봉문주!”
그때였다. 갑자기 사방이 확 트이며 햇살이 정면으로 당태세의 목선을 내리쬐었다. 당태세가 몸을 숙이고 이마에 손을 가져가며 앞을 확인하는데, 어느새 당태세가 탄 작은 배는 운하를 타고 빠른 속도로 개봉부의 중심을 향해 날듯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저 앞에 하얀 도포를 두른 사내가 삿대를 찍으며 정신없이 앞을 보며 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틀림없는 구봉문주였다. 당태세는 눈을 부라리며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오자평! 어디로 도망가느냐! 네가 갈 곳이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그 순간, 백포노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물살을 타고 그를 쫓아오는 당태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사내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추격하고 있는 것이 당태세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백포노인은 삿대를 물속에서 내 던지더니 자신의 허리춤에서 다시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당태세의 입에서 저절로 껄껄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입술이 마르고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는데, 입에서는 미소가 떠나갈 줄을 몰랐다.
“드디어 만나는군. 구봉문주! 어찌 오늘이 즐겁지 않겠느냐!”
하얀 섬광이 물 위에서 빛났다. 섬광은 어느새 햇살과 함께 당태세가 타고 있는 거룻배에 출렁대며 떨어졌다. 흰 도포에 빛나는 장검을 들고 있는 구봉방주 오자평의 머리 위로 빛나는 일광(日光)이 쏟아졌다. 신장(神將)같은 노인의 입이 열리며 저주가 쏟아져 나왔다.
“순천문주 귀린갈 당태세!”
오자평의 이에서 부드득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놈은 무엇을 하다 지금 나타났단 말이냐! 조금만 더! 한 발짝만 더 나갔으면, 일각만 내게 시간이 더 주어졌더라면 모든 것을 손에 움켜줬을 것인데!”
당태세가 오자평의 말을 듣더니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참으로 시간을 잘 맞춰 온 것이로구나. 네놈이 이렇게 낙망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이보다 좋은 것이 있을까? 하늘이 날 도와 구원(舊怨)을 청산하시는구나!”
“웃기는구나, 귀신아! 내 앞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귀신? 귀신은 네놈이지. 네놈이 개봉지부를 죽이고 개봉부를 지옥도로 가져가려 했으니 네가 사람들을 죽이는 악귀 나찰 아니더냐?”
“천만에! 나는 개봉부를 불태우려던 게 아니다.”
당태세의 표정이 변하자 오자평은 코웃음을 치고 자신의 손을 들어 보이더니 주먹을 움켜쥐었다.
“썩어빠진 개봉지부를 없애고 그를 친 뒤에 내가 개봉부를 융성하게 만들 수 있었다! 전란에 휩싸인 이 성을 다시 재건할 수 있었단 말이다!”
“네가 개봉부를 재건해? 개봉지부를 없애고?”
당태세의 말에 오자평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가락으로 쌓아올린 개봉의 성곽을 가리켰다.
“저 성곽을 쌓는데 들어가는 비용 중 얼마를 개봉지부가 먹는지 아느냐? 이미 10년 전에 끝났어야 할 공사였다! 내가 천천히 사람들과 관을 설득하여 온전하게 인부들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정당하게 삯을 주고 이 성의 수축을 앞당긴 거다! 그 탐욕에 대한 저항을! 그 오랜 시간의 성과를 네놈이 무엇을 아느냐!”
당태세가 오자평의 말을 듣더니 실쭉 입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네놈이 일꾼들을 포섭하여 뇌옥에 처넣고 그 인건비를 그냥 꿀꺽한 게 아니고? 예전에도 북경에서 각 성의 위사를 돌릴 때 네놈이 돈을 뜯어먹던 방법 아니었나?”
“뭐?”
“그리고 그 일꾼들에게는 청나라를 뒤엎고 명나라를 다시 세울 기회라고 꼬드겼겠지. 뇌옥에 있다가 영을 받고 한 번에 개봉부를 뒤엎자고 말이야. 책임은 구봉방이 질 거라고 하면서 말이지. 아닌가?”
오자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느새 두 사람이 탄 운하의 물줄기는 잦아들며 넓은 물길로 나왔는데 주변에 떠다니던 거룻배들은 두 사내의 모습을 흘낏거리며 삿대를 저어 거리를 두고 있었다.
“개봉지부는 죄인들이 죽이고 너는 그들을 살인멸구(殺人滅口) 하고… 네놈과 녹영군이 어지러운 개봉부를 구하였다 했겠지? 참장에게는 그동안 얼마나 퍼 준거지? 집 몇 채는 살 정도를 주었는가? 아니면 개봉부를 서로 사이좋게 나눠 다스리자 하였나?”
“네 이 놈…….”
오자평이 말문이 막힌 채 이를 부드득 갈자 당태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히죽대며 목괴를 앞으로 가져왔다. 오자평의 검과 목괴의 길이는 거의 비슷해 보였다.
“뒤에서 세력을 조정하고 세력을 조장하는 것이 네놈의 특기였지. 네가 십칠 년 전의 일을 잊으리라 생각하느냐? 이번에도 당했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오자평의 날카로운 눈이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손에 들린 검이 천천히 위로 들렸다. 당태세의 목괴와 왼발이 앞으로 나왔다.
“멍청하던 흑풍방주가 갑자기 영리해진 게 아니었구나. 귀린갈. 네놈의 책략이구나.”
“그래. 십칠 년 전, 황제와 내 뒤통수를 친 네놈에게 두 번은 속지 않아야지.”
당태세가 과거를 논하자 오자평의 혈색 좋던 얼굴에 주름이 잡히며 눈살이 찌푸려 들었다. 그것을 비웃듯 당태세가 쏘아붙였다.
“네놈이지?”
“뭐?”
“네놈이 이자성에게 붙자고, 팔대문파를 꼬신 것이 네 놈 아니더냐? 그런 머리를 쓸 놈이 네놈 말고 또 있더냐?”
당태세의 강렬히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보던 오자평은 이를 악물더니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늙은 북경 구대문파의 모사(謀士)는 당태세와 그의 괴창 대신 흐르는 물결과 하늘에 떠있는 태양을 보더니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 과거의 자신에게 던지는 말 같았다.
“닥쳐. 당태세! 그 날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라도 구봉문을 유지해야 했어! 선대에 대한 유훈을 지켜야 했단 말이다.”
당태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절개를 못 지키고 나이 먹은 것들은 늘 이 모양인가.”
오자평의 몸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당태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빛살을 허공에 뿌렸다. 사내의 검이 빛나며 당태세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하지만 당태세의 목괴가 빛살 한가운데를 끊어버리며 검의 예기를 튕겨내고 창촉을 오자평의 몸을 향해 날렸다.
오자평의 검날이 허공에서 그대로 방향을 바꿔 당태세의 목을 향해 떨어졌다. 순간 당태세의 괴가 그대로 위로 올라가 손잡이로 오자평의 검을 막으며 다시 오자평의 목을 향해 찔러나갔다.
구봉방주는 가볍게 왼손으로 들어오는 창촉을 밀어버리고는 다시 검을 회수하며 당태세의 넓적다리와 허리를 동시에 찔러 들어갔다. 당태세의 괴창이 검을 막으며 다시 공수가 교대되었다.
단 두 번의 공방으로 사내 둘은 더 이상 할 것이 없었다. 상대의 검과 창을 내가 뻗어내어 나에게 뿌리는 것과 진배없었다. 화경에 이른 사내들의 움직임에서 승부를 가르는 것은 실수와 착오뿐이었다.
그 순간, 오자평의 몸이 앞으로 움직이며 오른발이 번개처럼 앞으로 뻗어 당태세의 오른발을 걷어찼다. 당태세가 발을 급하게 뒤로 빼냈지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당태세의 오른발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당태세의 온 몸을 철편으로 때리는 듯한 통증이 울려 퍼졌다.
“크악!”
당태세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선미에 엎어져 버리는데, 오자평의 칼날이 당태세의 목을 향해 번개처럼 내리 꽂혔다. 순간, 당태세가 두 팔로 배의 밑전을 강타하며 몸을 옆으로 굴렸다.
당태세를 노리던 칼은 그대로 배의 밑창에 꽂히고 당태세의 쌍장을 맞은 배가 앞뒤로 출렁대며 너울댔다. 오자평이 비틀대며 중심을 잡는 사이 당태세는 두 팔의 힘으로 몸을 퉁기고 일어나 오자평을 향해 쌍장을 연거푸 날려댔다.
박혀있던 칼을 잡고 있던 오자평 역시 칼을 팽개치고 두 손을 권으로 바꾸어 들어오는 당태세의 쌍장에 맞서갔다.
앞뒤로 휘청이는 배 위에서 당태세가 오자평을 향해 오른팔을 뻗어 일격을 날리자 오자평은 팔뚝으로 들어오는 당태세의 장을 막은 뒤 자신의 오른손으로 당태세의 왼 어깨를 향해 충권을 내던졌다.
하지만 휘청이는 다리와 물결이 오자평의 권을 옆으로 틀어버렸고, 그 틈을 타 당태세의 좌수가 교묘히 뚫고 들어와 오자평의 어깨를 가볍게 쳐올렸다.
오자평이 인상을 쓰며 다시 몸을 날려 당태세를 향해 다가오더니 오른손을 뻗어 당태세의 가슴팍에 강권을 날렸다. 당태세의 두 손이 들어오는 오자평의 권을 막으려는 순간, 오자평의 권은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당태세의 눈과 오자평의 눈이 동시에 번쩍였다.
오자평의 우각이 다시 당태세의 오른발을 향해 채찍처럼 날아왔다. 그 순간 당태세의 왼 무릎이 들어오는 오자평의 오른발을 막으며 그대로 꼿꼿하게 서서 버텼다. 당태세의 부서진 오른발이 당태세의 온몸을 지탱한 채 학처럼 외발로 흔들리는 배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오자평을 보며 얼굴이 일그러진 당태세의 입에서 말이 새어 나왔다.
“두 번 같은 수에 당하는 바보가 어디 있나!”
순간 당태세의 몸이 오른발을 축으로 한 바퀴 돌면서 당태세의 우수가 권이 되어 오자평의 옆구리를 찍었다. 오자평의 손이 들어오는 당태세의 권을 막는 순간, 위에서 당태세의 좌수가 오른 겨드랑이 사이로 채찍처럼 뻗어 내려오더니 오자평의 가슴팍을 정확하게 내리쳤다.
쩍 하는 소리가 배 위에서 울려 퍼지며 오자평의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두 노인은 그대로 뒤로 벌러덩 넘어지며 뱃전에 드러눕는데, 뱃전에서 넘어온 물이 당태세와 오자평의 온 몸을 흠뻑 적셨다.
“빌어먹을…….”
당태세는 이를 드러내며 있는 인상을 다 쓰고 있었다.
오른 다리부터 허리까지 아예 감각이 없었다. 사내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 굴러다니는 괴창을 짚었다. 당태세가 비틀대며 몸을 일으킬 때까지도 오자평은 누운 채 신음을 내고 있을 뿐이었다.
“……늙은이…이런 묘수(妙手)는 어디서 익혔느냐.”
“원래 지니고 있던 것이다.”
“뭐?”
“필살의 기예(技藝)를 보는 놈들이 살아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오자평의 입에서 선혈이 꾸역꾸역 넘어왔다.
구봉문주는 힘을 내 상체를 일으켰다가 자신의 가슴팍을 어루만지고 고개를 들어 당태세를 보더니만 피식 김이 새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구봉문주의 얼굴에는 허탈한 미소가 올라왔다.
“그렇겠군. 그랬겠어.”
“무간지옥에서 영원히 참회 하거라.”
“순천문주.”
구봉문주 오자평의 물음에 지칠 대로 지친 당태세의 눈꺼풀이 다시 힘을 받아 올라갔다. 이제 오자평의 얼굴은 하얗게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내가…… 내 삶이…… 실패한 것인가?”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당태세의 짧은 말을 들은 오자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오자평의 눈이 서서히 흐려지며 일그러진 표정 그대로 고개가 뒤로 떨어졌다. 채 감기지 못한 구봉문주의 눈은 하늘을 향한 채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당태세는 뱃전을 기다시피 하며 구봉문주에게 다가가 백포노인의 품속을 뒤졌다.
당태세의 눈썹이 다시 찌푸려지더니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사내의 손에는 겹겹이 접힌 증서(證書)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충룡문주 주통산의 전대에서 나온 것과 같은 형식의 문서에 도장까지 똑같이 찍혀 있었다. 팔대문파의 서명이 다 들어가 있는 문서는 필체마저 동일하였다.
“……그저 이 종이 하나를 얻으려고 그 짓을…….”
당태세는 풀썩 제자리에 주저앉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흔들리는 뱃전 위로 보이는 하얀 햇살과 창천(蒼天)은 깨끗하여 눈부시기만 하였다.
“재주 많은 놈…… 죄 많은 놈… 천지신명이여. 왜 어찌하여…….”
조용해진 두 사람의 배를 향해 거룻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비틀거리며 뱃전을 잡고 일어나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직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 않은 아침이었건만 당태세는 오늘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칠 년 만에 다시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노인은 하루가 십 년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힘든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