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하남 개봉부 구봉방
이미 동편의 성벽은 아침햇살에 물들어 얼굴을 노랗게 빛내며 검은 그림자를 치맛단처럼 아래로 드리웠다.
밤보다 어두운 성벽 아래의 그림자를 일단의 사내들이 소리 없이 헤쳐 나갔다. 사내들은 모두 오와 열을 맞추고 아침공기 사이로 창날을 세운 채 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이른 시각에 성도의 거리를 나섰던 백성들은 사내들의 모습을 보자 화급하게 거리와 골목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사내들이 행군하는 거리는 넓으면서도 조용하였다. 오직 훈련받은 사내들의 발자국소리만이 골목과 골목사이를 메우는데, 긴 뱀과 같은 행렬은 곧게 펴졌다가 구부러지며 성의 남쪽을 향해 곧장 내려갔다.
“오와 열을 맞추라.”
고색창연한 구(舊)성도의 거리를 지나가는 사내들 사이에서 군관의 짧은 명이 흘러나왔다. 병사들은 말없이 상관의 명을 따랐다. 흩어지던 발소리가 다시 한 사람이 내는 발소처럼 크고 명확하게 바뀌었다.
사내들은 남쪽의 앞에 위치한 장식 없는 평범한 대문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이미 군사들의 말소리는 그곳까지 도달하였는지 소리 없이 양 문이 열렸다.
“경계를 늦추지 말라.”
군관의 마지막 말은 빠르고 낮았다.
병사들 역시 입을 다물고 창대를 꽉 쥔 채 열린 문을 통해 장원의 안으로 들어섰다. 구봉방(九鳳幇)이라는 작은 현판 아래로 한없이 긴 병사들의 행렬은 마치 굴 안으로 들어가는 구렁이와 같았다.
병사들이 들어간 평범한 대문 안쪽은 사방으로 널찍하게 트여 마치 궁궐의 안마당과 같은 장려한 광장이 놓여 있는데 광장의 바닥은 빈틈없이 포석이 깔려 모래알 하나도 묻어있지 않을 정도였다.
광장의 앞에는 마치 웅크린 호랑이 같이 날렵하게 생긴 긴 전각이 높여 있었는데 그 가운데 문이 열리며 백포로 온 몸을 감싼 초로의 사내가 병사들 앞에 나타났다.
백포노인이 나타나자 사방 벽의 작은 출입구를 타고 도수(刀手)들이 노인과 같은 흰 옷을 받쳐 입고 재빠르게 나와 열을 맞추는데 그 질서정연함이 정문으로 들어온 녹영의 군사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한편 그 백포노인의 옆에는 두 명의 사내가 각각 월도(月刀)와 장창(長槍)을 들고 뒤에서 노인을 호위하고 있었으니 그 위엄이 사해평정의 부월(斧鉞)을 받은 대장군과 같고, 그 표정에 서린 위엄은 가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대신(大臣)에 버금갈 지경이었다.
백포노인, 구봉방주 오자평은 그의 앞에 도열한 녹영군의 위세를 보더니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서 들어온 군관에게 치사를 보냈다.
“공사다망할 것인데 이리 병력을 끌고 와 주시니 삼가 고마울 따름이네.”
“이것이 공무(公務)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구먼. 내가 실언을 한 것 같으이. 이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군관의 발언에 오자평은 슬쩍 웃음을 짓고 손을 들어보였다. 하지만 눈매는 매섭기 그지없었으니 마치 자신을 향해 도발하는 하급자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오자평은 슬쩍 도열한 녹영군을 보더니 수염을 쓰다듬고 앞의 군관에게 중얼거렸다.
“참장은 지금 어디 있는가?”
오자평의 말투는 군관을 반쯤은 자신의 부하로 보는 듯싶었다. 군관은 슬쩍 인상을 쓰면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구봉방주의 말에 절도 있게 답하였다.
“지금 뇌옥의 사병들과 함께 개봉부로 진격하셨습니다.”
“좋아. 계획대로구먼. 내가 올 때까지는 군사들을 넣지 않겠다 하였겠지?”
“그… 그것까지는 제가 잘 모릅니다.”
“자네는 영 두서가 없구먼. 그래서 이런 과업을 어찌 달성하려고.”
오자평은 혀를 가볍게 차더니만 손을 번쩍 들고 사방에 깔린 구봉방도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비록 목소리는 낮았지만 내공이 실린 소리는 쩌렁쩌렁 울리며 드넓은 구봉방의 연무장을 뒤흔들며 사방을 진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모든 방도들은 들으라. 오늘 우리는 개봉부의 뇌옥에서 하늘을 거역하고 천하의 순리를 거꾸로 돌리기로 한 역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떠난다. 비록 우리는 지금까지 황상의 명을 받아 개봉부에서 관에 충성하며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것만을 우리의 천직으로 삼았도다! 오호라! 하지만 이 위급한 시기에 어찌 칼과 창을 쓸 수 있는 무예가 있는 이들이 그저 하늘만을 보며 앉아있을 수 있겠는가!”
구봉방주 오자평의 말은 청산유수로 흘러나와 듣고 있는 칼 든 이들의 마음을 격동시켰다.
“우리의 피와 살은 모두가 황제께서 주신 것이며 이 성벽과 물길은 우리의 힘으로 낸 것이 아니랴. 그러한데 몇 안 되는 패역한 죄인들에 의해 개봉부가 무너질 처지가 되니 이 어찌 통탄스럽지 않은가! 우리는 어서 개봉부로 달려가 죄인들에게서 개봉지부를 구하고 우리의 무공이 대청(大淸)의 간성(干城)임을 개봉부와 천하에 고할 것이다!”
“존명!”
“나를 따르라! 모두 개봉부로 갈 것이다! 개봉지부의 목숨을 구하자! 문을 열어라!”
오자평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흰 상의를 입고 칼을 찬 사내들이 일제히 가슴에 손을 얹고 함성을 지르며 열을 맞추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을 보던 녹영군의 군관 역시 군졸들을 바라보며 힘차게 명을 내렸다.
“병사들은 문을 열어라!”
군관의 목소리에 오자평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내린 명과는 전혀 다른 별도의 명이었다. 하지만 명을 받은 군사들은 군관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신들이 들어온 구봉방의 문을 향해 달려가더니 문을 지키는 구방봉도의 양해를 구하기도 전에 빗장을 내리고 활짝 문을 열어 재꼈다. 그 모습을 보던 오자평이 눈살을 찌푸리며 군관을 쳐다보았다.
“여봐라! 우리가 나갈 곳은 저곳이 아니라 다른 남문이다! 대체 어떻게 지시를 하달 받았기에…….”
그 순간, 오자평은 채 자신의 말을 잇지 못하였다.
군졸들이 문을 연 것과 동시에 일단의 사내들이 모두 칼을 한 손에 들고 열린 문을 통해 파도처럼 쇄도하기 시작하는데, 들어오는 자들의 복장은 십인십색이었으나 모두 하나같이 오른쪽 팔뚝에 붉은 천을 매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들의 한 가운데 서서 대도(大刀)를 하늘 높이 치켜든 젊은 사내가 오자평을 가리키며 쇠 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저곳에 역적 오자평이 있다! 개봉부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전에 저 놈을 죽여라!”
“구봉방을 죽여라!”
“구봉방을 없애라!”
구봉방주 오자평은 그제야 앞에서 소리 지른 사내가 흑풍방주 백당락이라는 것과, 지금 들어오는 자들이 개봉부의 타 방회에 소속된 방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자평이 눈을 부릅뜨고 무슨 연유인지 몰라 사방을 둘러보는데, 그 모습을 보던 녹영군의 군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녹영군은 역도 구봉방을 모두 섬멸하라!”
“빌어먹을!”
그제야 구봉방주 오자평은 어렴풋이 진상을 알 수 있었다. 오자평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허리에 찬 보검을 뽑아들며 사방에 있는 구봉방도들에게 명을 내렸다.
“모두 구봉방도는 싸워라! 저들이야말로 역도(逆徒)니라! 군졸들과 하오문을 모두 척살하라!”
“존명!”
구봉방도에게 방주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누구 하나 방주의 말에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순식간에 드넓은 구봉방의 연무장에서 녹영군과 개봉 팔십 방회의 정예가 한데 모여 구봉방도들의 칼에 맞서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칼과 창이 부딪히고 칼과 칼이 부딪히며 비명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단도와 몽둥이의 대결이 아니라 진짜 창검의 싸움이었다.
햇살이 성벽을 넘어 개봉부를 환히 비추기 시작하는 순간, 사방에서 피와 살이 튀기고 사람들이 죽어 넘어가기 시작했다.
구봉방도 개개인의 무력은 개봉 팔십방회의 사내들을 상회하고 있었지만 삽시간에 불어난 개봉 팔십맹의 맹도들의 숫자에 이내 밀리기 시작했다.
그곳에 갑주와 창으로 무장한 녹영군이 가세하기 시작하자 일순간 호각이었던 구봉방의 세력은 일시에 중군(中軍)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주 볼만하구나! 내 오늘을 꿈꾸면서 살았거늘!”
걸걸한 목소리를 내며 한손에 박도를 들고 최전선에서 칼을 휘두르던 숭호방의 이방주가 입이 찢어지라 웃어대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개봉부의 방주들이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있던 오자평은 이를 부드득 갈며 가운데에서 전황을 감독하는 흑풍방주 백당락을 노려보았다.
“영도(影刀)! 환창(幻槍)! 저 백가의 목을 끊어오라!”
“존명!”
월도와 장창을 든 두 사내가 구봉방주의 명을 듣고 동시에 화답하며 자리를 뜨려는 순간, 두 사람의 뒤에서 나직막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인을 놔두고 어디를 날아가려 하느냐, 날개들아!”
도수와 창수의 몸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나무로 된 괴창을 목발처럼 옆에 낀 채 그들을 노려보며 괴기스럽게 웃고 있는 기이한 늙은이 하나가 서 있었다. 노인의 입이 다시 열렸다.
“날개 잘린 봉황이 어찌 구만리장천을 날겠는가? 오늘 내가 봉황을 잡아먹겠구나!”
“뭐 하는 늙은이냐!”
“죽은 여섯 날개에게 물어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인의 몸이 바람을 일으키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절뚝거리는 듯 괴상한 보법으로 발아래 포석을 박차고 뛰어노는 신형은 범인(凡人)의 것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월도의 사내 앞에 도달한 노인의 괴창이 앞으로 움직이며 뱀처럼 월도 사내를 휘감았다. 번쩍이는 창날이 붙은 괴창의 끝머리가 번개처럼 움직이며 월도 사내의 소매와 어깨의 옷섶을 단번에 찢어발겼다. 순간 장창을 든 사내가 재빨리 옆에서 파고들며 장의 끝으로 원을 그리며 노인을 압박해 들어갔다.
“어디서 행패냐!”
순식간에 번득이는 창날이 아홉 번 소용돌이를 그리며 괴창의 노인을 밀어내며 압박했다. 하지만 괴창을 들고 있는 노인은 절뚝대며 창을 피하면서도 눈을 번득이면서 창수의 어깨와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좋을시고! 제대로 배운 창이로구나!”
순간 괴창이 창대 사이에서 꿈틀대더니 창대를 치고 퉁기며 거리를 좁히더니 그대로 창 든 사내의 몸을 향해 뚫고 들어갔다. 창수의 눈이 커지며 재빨리 창을 위로 들며 발을 멈추고 몸을 뒤로 빼냈다. 그 순간 월도를 든 사내가 노인의 머리를 향해 육중한 월도를 날렸다.
장창과 얽혀있던 괴창이 순간 아래로 내려가는가 싶더니만 창을 든 노인의 몸이 고양이처럼 땅 아래로 허리를 낮추며 머리 위를 지나가는 월도를 피하였다.
노인의 눈은 육중한 월도를 다루는 사내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다리에 힘을 주고 창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깜짝 놀란 창수가 다시 창을 수습하며 괴창을 든 노인을 향해 창날을 내리려는 순간 창대를 후려치는 척 위로 솟구쳤던 괴창이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반대로 창대를 뒤집었다.
텅 비어버린 창수의 가슴팍으로 괴창의 창촉이 빨려 들어가는가 싶더니 이내 노인은 방향을 뒤집어 자신의 뒤에서 월도를 들고 달려오는 도수를 맞이하였다. 월도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며 천지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순간 노인의 괴창이 연못에서 튀어 오르는 용처럼 하늘로 솟구치며 도수의 품 안으로 빨려드는가 싶더니만 이내 도수의 품 안에서 벗어났다.
노인은 어느새 창수와 도수의 사이에서 벗어나 괴창을 땅에 짚은 채 구봉방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수와 창수는 노인의 등 뒤에서 가슴과 목에서 선혈을 내뿜으며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오랜만이구나. 구봉문주 오자평.”
노인의 깊은 눈동자가 검을 든 채 망연히 서 있는 백포노인을 응시하였다. 백포노인은 눈을 껌벅이며 괴창을 짚고 있던 노인을 살펴보더니 생각이 난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 네놈은 그 때 성벽 앞에서 석공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틀렸다. 오자평. 네놈의 기억은 그저 며칠 전의 일 외에는 기억을 못하느냐?”
“뭐?”
“내 눈을 보고 네 얼굴을 보아라. 그래도 네놈이 나를 모른다 하겠느냐!”
“누… 누구냐?”
“나는 십칠 년 전, 네놈이 이자성에게 황제와 함께 팔아먹은 사람이다!”
순간 구봉방주 오자평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오자평은 자신의 머릿속에 생각난 이름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휘젓다가 다시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기이한 신음과 함께 손가락을 내밀고는 노인을 가리켰다.
“다… 다다… 당태세? 당태세!”
“오냐! 기억하느냐!”
당태세의 괴창이 들리며 아직 핏물이 떨어지는 창촉을 구봉방주에게 향하였다.
“네놈을 만나려고 지옥에서 돌아왔다. 오자평!”
당태세의 부릅뜬 눈동자 아래로 시뻘건 입이 열리며 하얀 이가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