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하남 개봉부 뇌옥(2)
변발을 치고,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 나무 목발을 왼쪽에 짚고 뚜벅뚜벅 석판이 깔린 뇌옥의 안으로 걸어 들어오자 창살 안에 있던 사내들이 웅성대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창살 밖에서 두 손에 단창을 짊어진 묵룡과 백호 역시 뜻밖의 상황에 잠시 멈칫거렸다. 지금까지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던 백호가 뒤로 물러나는 수직사령을 보며 어울리지 않게 분노에 찬 일갈을 날렸다.
“네 이놈! 지금 노인을 앞에 내밀고 뭐 하는 짓이냐!”
“잠깐 기다려라, 백호.”
“왜?”
묵룡은 백호를 진정시키더니 다가오는 당태세를 노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냥 노인이 아니다.”
당태세가 슬쩍 묵룡을 노려보더니 한 장 정도의 길이를 남겨두고 제자리에 우뚝 섰다. 묵룡이라는 자의 공부는 이미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한 것이 틀림없었다. 백호 역시 묵룡의 기운에 밀리지 않는 내공을 지닌 듯 보였으니 그 실력은 난형난제일 터였다.
게다가 그들이 쥐고 있는 단창은 옥졸의 장창을 취하여 만들어낸 급조품(急造品)이니, 병기에 구애받지도 않는다고 봐야할 것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당태세의 이가 드러났다.
“이번에는 꽤 싸워볼 만 하겠구먼.”
그때였다. 창살 안에서 한 사내가 당태세를 보더니 철창문을 잡고 다급하게 외치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다름 아닌 석장 황충수였다.
“노사! 노사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황석장. 창살 앞에 가까이 있지 말게. 다칠 것이네.”
“노사!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노사께서는 우리 편 아니었습니까?”
묵룡이 황충수와 당태세를 한참동안 보더니 입맛을 다시고는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누군가 했더니 그때 황가를 면회 왔던 노인이었구나. 그때도 기이한 늙은이가 왔다 싶었더니만 일이 이렇게 되는구먼.”
“구면이냐?”
백호의 말에 묵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용의주도한 늙은이로다. 직접 적진까지 들어와 염탐을 하고 다시 들이칠 줄이야.”
묵룡의 말에 당태세도 묵룡을 노려보았다. 노인은 턱을 치켜들고는 오만한 눈빛으로 두 사내를 바라보았다.
“내가 노쇠해 근력이 딸릴지언정 너희 같은 것들을 염탐할 만큼 절박하진 않다.”
“허, 제법 말장난도 하는구먼.”
백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묵룡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당태세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놈은 누구의 사주를 받았느냐? 청(淸)의 개냐? 아니면 곽가방의 청부냐?”
“나는 명을 받고 품을 파는 종자가 아니다.”
“그럼, 무엇이냐! 우리 구봉방의 일을 방해하려고 나타난 위인이라 이거야?”
백호의 말에 당태세는 눈을 끔벅거리더니 씩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으로는 살기를 가득 담고 입은 쩍 벌어져 새하얀 이가 드러나는 노인의 표정은 말 그대로 먹이를 탐하는 늑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대지약우(大智若愚)라더니 네 놈, 생각보다 감이 좋구나!”
“구봉방을 없애겠다고?”
“엄밀히 말하면 구봉방주 오자평과….”
당태세의 오른발이 한발 뒤로 빠지며 목괴가 왼손 어귀에서 팔랑개비처럼 맴돌았다. 그 모습을 보던 백호와 묵룡 역시 두 손에 쥐어진 단창을 잡고 몸을 낮추었다.
“…방주의 명으로 개봉부를 쑥밭으로 만들려는 정신 나간 제자들을 없애려 한다.”
“허, 너 혼자서?”
백호의 이죽거림에 당태세 역시 이죽거리며 대답을 받았다.
“이미 팔익 중에 넷이 죽었는데 할 만하지 않겠느냐?”
순간 묵룡의 얼굴에서 미소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옆에 서 있던 백호 역시 표정을 굳히더니 두 자루 쌍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묵룡은 한 자루 단창을 귀 옆에 바싹 붙이고, 또 한 자루는 가슴팍에서 당태세의 눈을 향해 뻗은 뒤 조용히 방위를 밟기 시작했다.
“늙은이, 네놈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넌 오늘 이 자리에서 죽어 나갈 것이다.”
“젊은이가 노인보다 빨리 가는 것이 어찌 서럽지 않으랴. 오늘은 슬픈 날이로다.”
백호의 발이 당태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움직였다. 사내의 손에 들린 두 자루의 단창이 하얀 빛살이 되어 당태세의 몸을 향해 떨어졌다.
당태세의 목괴가 움직이며 들어오는 날붙이를 막고 또 다른 날붙이를 끝으로 밀어붙였다. 목괴는 방패이자 창이 되어 백호의 공격을 막아내며 매섭게 백호의 가슴팍을 찔러 들어갔다.
그 순간 백호는 발로 땅을 밀어내듯 몸을 뒤로 퉁기며 당태세의 공격범위를 벗어나고 그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들어와 당태세의 어깨와 가슴팍을 찔러 들었다.
당태세의 몸은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처럼 부드럽게 옆으로 움직이며 묵룡의 창날을 피하고 다시 목괴를 휘둘러 검은 사내의 후속타를 방비하였다.
백호의 몸이 다시 숨 쉴 틈 없이 밀려들며 두 자루 창날로 당태세의 목을 노렸다. 당태세의 목괴가 앞으로 나오며 두 자루 창날을 한꺼번에 밀어젖히더니 바로 몸을 틀고 묵룡과 백호의 틈새로 빠져나갔다.
어느새 공수의 자리가 뒤바뀌고 두 사람은 뒤로 돌아간 당태세를 향해 등을 돌렸다. 당태세의 눈이 뇌옥의 불빛을 받아 기이한 광채를 내뿜었다.
“생각보다는 단순하군.”
당태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묵룡이 몸을 낮게 숙이고 들어오며 양손의 단창을 회전시키며 당태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함께 백호가 옆으로 파고들며 두 자루 단창을 휘두르며 위와 아래에서 당태세의 요혈을 노렸다.
당태세는 목괴를 뻗어 백호와의 거리를 띄우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묵룡의 공격에 대비했다. 순간 묵룡의 몸이 가볍게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라 당태세의 머리 위를 점하였다.
묵룡의 두 손에 들린 단창이 낙뢰처럼 하늘에서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것을 보고 있던 백호 역시 몸을 낮게 숙이며 당태세의 몸을 향해 단창을 뻗었다.
그 순간, 당태세는 몸을 움츠리는가 싶더니 마치 팽이가 돌 듯 왼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제 자리에서 벗어나 백호를 향해 몸을 던졌다. 순식간에 백호와 당태세의 몸이 칼날 하나 들어가지 못 할 만큼 바싹 붙었다.
당태세의 어깨와 백호의 어깨가 서로 맞닿으며 서로의 얼굴에 입김을 내뿜을 정도로 밀착되는 순간, 백호의 양손과 당태세의 목괴가 같이 움직였다.
백호가 단창을 짧게 올려 잡고 당태세의 양 목을 찌르러 들어오는 순간 목괴가 땅에 떨어지며 당태세의 손이 백호의 목을 잡고 빙글 한 바퀴를 돌렸다.
묵룡은 자신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는 백호를 보며 순간 멈칫하며 공격을 멈추는데, 당태세의 목을 노리던 백호의 두 손이 갑자기 힘이 풀린 듯 축 늘어지며 단창 두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백호!”
백호가 풀썩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백호의 몸이 아래로 내려앉자 드러난 당태세의 손아귀에는 새파란 단도가 잡혀 있었다. 당태세는 슬쩍 손을 내려 백호가 쥐고 있던 단창 하나를 손에 쥐더니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묵룡을 쳐다보았다.
“너희들은 협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무위를 뽐내고 있더군.”
노인의 얼굴에는 희로애락의 표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너희가 합을 맞춰서 상화좌우에서 연격으로 들어왔다면 승부는 예측할 수 없었겠지.”
이미 백호는 숨이 끊어져 있었다. 백호가 단창을 짧게 잡는 순간보다 당태세가 목괴를 버리고 품에서 단도를 꺼내 백호의 심장에 칼을 박는 속도가 더 빨랐다. 냉정하던 묵룡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하는 빛이 떠올랐다.
묵룡은 단창 두 개를 가슴에서 엇갈려 십(十)자로 만들더니 당태세를 향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당태세 역시 단창과 단도를 들고 몸을 절름거리며 묵룡을 향해 다가갔다. 묵룡은 절름대는 당태세를 바라보며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저 절뚝거리는 오른발이 허초인지 실제로 다리를 저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당태세의 몸이 기우뚱거리며 사내를 향해 다가올수록 묵룡의 두 손은 거리를 재기 위해 가슴팍 위에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호흡이 가빠졌다.
“구봉십자도(九鳳十字刀)로 내 움직임을 잴 수는 없다.”
묵룡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당태세를 바라보자 당태세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구봉문의 허접한 삼류도법으론 내 몸에 상처 하나 낼 수 없어.”
“뭐가 어째!”
순간 묵룡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 치밀어 오르더니 두 손을 교차했던 십자의 형이 부서지고 사방에서 연격이 튀어나왔다. 도 대신 단창을 들었지만 강렬하고 빠르게 교차하는 창날의 움직임은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당태세는 가볍게 왼손을 들어 쥐고 있는 단창으로 들어오는 두 자루 단창의 연격을 여유롭게 막으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오른발의 통증이 찌릿찌릿 무릎과 허벅지를 타고 눌렀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쓸 틈은 없었다.
묵룡은 이를 악물고 당태세의 몸에 연격을 하나하나 날리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수십 번의 공격으로 당태세를 탈진하게 만들려는 수작 같았다.
“그런 것이 통하겠는가.”
당태세는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뒤로 물러나 뇌옥의 철창살을 뒤에 등지고 서 있었다. 묵룡의 상체는 이미 땀으로 가득하여 불빛에 번들대고 있었다. 당태세는 그의 목을 향해 단창을 겨누었다.
순간 묵룡의 두 팔이 같이 움직이며 왼팔은 당태세의 창을 날리고 오른팔의 창날이 그 사이를 틈타며 당태세의 목을 향하였다. 당태세의 눈이 번득였다.
노인은 빛나며 들어오는 묵룡의 창날을 단도로 받아 넘기고 왼손에 든 단창으로 묵룡의 단창을 얽어버린 뒤 오른쪽으로 날려버렸다. 단창을 들고 있는 당태세의 왼손이 자유로워졌다.
죽는다.
묵룡의 안색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대협! 걱정 마시오! 우리가 돕겠소!”
그 순간, 갑자기 철창 안에서 손들이 불쑥 빠져나와 당태세의 손목과 장창을 잡았다. 당태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갇혀있던 죄수들이 모두 손을 내밀어 당태세를 잡아챈 것이다. 당태세가 당황하며 몸을 빼지 못하는 사이 묵룡의 눈이 잠시 깜박이더니 다시 이를 악물었다. 당태세 역시 이를 드러내며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순간 당태세의 손이 펼쳐지며 단창과 단도가 동시에 땅에 떨어졌다. 노인은 활짝 편 손을 그대로 뒤로 돌리는가 싶더니만 온몸의 힘을 모아 쌍장(雙掌)으로 철창을 그대로 후려쳤다.
쾅!
소리와 함께 철창이 흙먼지와 함께 부르르 떨리며 강렬한 진동이 전해졌다. 철창 안에서 당태세를 잡고 있던 사내들이 순식간에 철창의 진동을 온몸으로 받고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졌다. 당태세를 잡고 있던 손이 풀려나며 육신이 자유로워지는 것과 동시에, 묵룡이 단창을 집어 들고 당태세의 가슴팍으로 뛰어들었다.
그때였다. 당태세의 펼쳐졌던 두 팔이 앞으로 합쳐지며 묵룡의 단창을 엇갈린 두 팔뚝 사이에 끼워버렸다. 묵룡의 치켜뜬 눈과 당태세의 부릅뜬 눈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묵룡이 단창을 쥔 손에 힘을 넣는 순간, 당태세의 엇갈린 두 손이 장에서 권으로 바뀌며 그대로 위로 올라가 묵룡의 턱을 쳐 올렸다.
묵룡의 고개가 슬쩍 올라가자 권은 다시 장으로 바뀌며 아래로 내려와 묵룡의 단창을 쥔 오른손을 동시에 감싸는 것 같더니만 왼쪽으로 번개처럼 꺾어버렸다. 순간 묵룡의 팔꿈치에서 두둑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망할!”
묵룡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는 것과 오른손이 벌어져 단창이 손에서 놓이는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묵룡의 왼손에는 아직 단창이 잡혀 있었고 묵룡은 이를 악물고 왼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묵룡이 왼손의 단창을 당태세의 목에 찌르는 것보다 당태세가 묵룡의 손에서 흘러나온 창을 잡아 그대로 묵룡의 턱 아래에 꽂아버린 것이 더 빨랐다.
검은 거구의 사내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당태세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빼는 순간에도 묵룡은 단창을 든 채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절뚝거리며 당태세가 뇌옥을 가로질러 가 자신의 목괴를 주워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나서야 묵룡의 몸은 천천히 기울어지더니 그대로 모로 쓰러져 버렸다. 뇌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뇌옥 한 곳에서 비명과 함께 고함이 튀어나왔다.
“노사! 이게 뭐요! 뭐하는 거요!”
황충수의 절규였다. 당태세는 말없이 단도를 돌판이 깔린 뇌옥의 바닥을 목괴로 찍으며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같은 편인 줄 알았는데! 당신은 지사인 줄 알았는데!”
당태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죄수는 울부짖었고 노인은 말이 없었다. 노인이 수직사령과 함께 문을 나서자 살아남은 옥졸들이 죽은 시신들을 옮겨 가기 시작했다.
물이 뿌려지고 바닥에 남아있던 핏물이 씻겨 내려갔다. 하나둘 떠들던 죄수들은 입을 닫았고 결국 옥문이 다시 소리를 내며 닫히자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횃불만이 따닥따닥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람들 대신 떠들고 몸을 흔들었다. 이지러지는 창살의 그림자를 보며 누군가 훌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