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하남 개봉부 (17)
문짝이 부서지는 것과 함께 들려온 사내의 말은 주문(呪文)과도 같았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장의 여기저기에서 갑자기 골패와 판돈이 하늘로 흩뿌려지며 십수 명의 사내들이 품에서 칼을 빼 들고 주변에 서 있던 구봉방도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 명의 구봉방도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지만 이내 사태를 파악한 구봉방도들 역시 품 안에서 단도와 몽둥이를 뽑아들고 손님들 사이로 몸을 날렸다.
사방에서 비명과 고함과 욕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구봉방도와 맹회의 사내들이 여기저기에서 칼부림과 주먹다짐을 하는데 애꿎은 손님 몇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후덥지근하던 도장 안은 지옥도로 탈바꿈을 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손님들이 판돈을 내던지고 입구를 향해 내달리고 구봉방도와 다른 방회의 사내들은 서로가 서로를 얼싸안고 칼부림을 이어갔다. 비명과 욕설은 점점 심해졌고 그 사이에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소리는 점점 늘어났다.
“맙소사…….”
쓰러져 있던 붉은 머리가 사방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며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데 마찬가지로 칼을 들고 당태세와 대치하고 있던 깡마른 사내 역시 이를 뿌드득 갈면서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이걸 노렸느냐! 네 놈은 어디서 온 놈이냐! 무슨 방에서 왔느냐!”
깡마른 사내의 고함소리에 당태세도 귀신같이 눈을 홉뜬 채 사내를 보며 으르렁댔다.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명부(冥府)에서 왔다고.”
“이런 견자 놈이!”
깡마른 사내의 눈썹 끝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사내의 손에 들린 쌍검이 허리와 목을 타고 회리바람처럼 돌며 당태세를 압박해 들어갔다. 하지만 당태세의 목괴는 질풍노도 같은 쌍검의 연격을 받으면서도 잘리지도, 꺾이지도, 수를 놓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정면으로 사내의 쌍검을 막아내고 받아내었다.
당태세의 눈빛이 번득였다.
순간 목괴가 회전하며 창처럼 뻗어 깡마른 사내의 요혈을 찍으며 사내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깡마른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절름발이 노인의 목발에서 나오는 출수가 쌍검을 쓰는 자신보다 변화무쌍하고 난측(難測)하여 제대로 방어를 할 수가 없었다. 깡마른 사내는 이제야 몸을 추스르고 비틀대며 일어나는 붉은 수염을 보고 고함을 질렀다.
“적참(赤斬)! 도와다오!”
그 말을 들은 붉은 수염이 재빨리 박도를 움켜쥐고 당태세의 뒤를 향해 뛰어들었다. 당태세가 붉은 수염의 박도를 눈치 채고 힘차게 쌍검사내의 몸을 강공으로 물리친 뒤 다시 몸을 돌려 붉은 수염을 향해 거리를 좁혔다.
벽에 붙어 힘겨운 방어를 하던 쌍검 사내는 이를 부드득 갈더니만 당태세의 등을 향해 쌍검을 치켜들고 몸을 날렸다.
“어라?”
순간, 사내의 발이 휘청하더니만 그대로 무릎이 풀썩 꺾였다. 왼쪽 다리가 말을 안 듣더니 이제는 오른다리도 무겁게 느껴졌다. 깡마른 사내는 멍하니 자신의 발을 바라보다 불현듯 자신의 오른쪽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찢어진 옷자락이 붉게 물들어 선혈이 허벅지를 타고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사내는 검을 떨어트리고는 자신의 손으로 옆구리를 막았다. 그제야 사내는 당태세가 마지막 공격을 퍼붓기 직전 우수가 들어와 자신의 옆구리를 강타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인의 단도는 이미 혈맥과 내장을 다 뚫은 채 자신이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뽑혀 나간 것이었다. 깡마른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벗이자 동료인 붉은 수염, 적참(赤斬)이 강맹한 일격으로 절름발이 노인을 몰아치고 있었다.
마른 사내는 입을 열었다. 동료에게 말하고 싶었다.
노인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지금 싸우는 것은 그저 노인에게는 대련에 불과하다고. 그는 일격에 두 사람을 해치울 수 있는 인간이라고. 격이 다른 고수였다고.
하지만 마른 사내의 입은 이미 말라붙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몸을 구부렸다. 마치 아이가 모태(母胎)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처럼 사내는 그렇게 웅크린 채 천천히 숨이 잦아들었다.
“망할! 뭐야! 왜 안 넘어져! 왜 안 죽어!”
붉은 수염의 사내는 이제 악에 받쳐 박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용력에 두 쪽이 나야 정상인 노인의 목발은 마치 쇳덩이로 만든 것처럼 멀쩡하게 자신의 칼을 튕기며 온몸의 요혈을 난타하고 있었다.
붉은 사내의 도법은 정확하고 패도적이어서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베고 부술 수 있는 능(能)이 있었다. 하지만 그와 맞서 싸우는 후줄근한 노인의 목발은 그런 사내의 도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노인은 목발을 가지고 칼을 퉁기고 누르며 붉은 수염의 온몸에 요혈을 하나하나 때리고 있었는데 혈자리를 두들겨 맞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고통이 밀려들어왔다. 그것도 강도를 조절하여 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붉은 수염은 그제야 칼을 들고 있는 자신이 쥐새끼고 막대를 들고 있는 노인이 고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앞에 있는 노인의 몸이 한없이 커져 천장에 닿고 손에 쥐고 있는 목발이 금강불괴의 신병(神兵)처럼 보였다. 눈이 어지럽고 두려움이 엄습했다. 붉은 수염 사내는 자신의 박도를 땅에 내던졌다.
“살려주십시오! 이기지 못합니다!”
사내의 외침과 함께 당태세의 목괴가 멈추었다.
사내의 몸짓을 본 구봉방도들이 당황하며 사방으로 파리 떼처럼 흩어지며 각자도생을 노리기 시작했다. 비등하던 도장 안의 싸움이 순식간에 한쪽으로 몰리며 승세가 굳어졌다. 싸움의 함성대신 신음이 도장 안을 가득 메웠다.
“네가 싸움을 관두었느냐.”
“네.”
당태세는 무릎 꿇은 붉은 수염을 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른발의 찌릿대는 통증은 이제 허벅지를 타고 허리께까지 올라왔지만 기색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당태세는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네가 이 도장의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아는 것을 전부 말하겠느냐.”
“말하겠습니다.”
“나는 구봉방을 멸하고 전 구봉문주, 구봉방주 오자평을 참할 것이다.”
수간 붉은 수염의 눈이 땅바닥에 고정되며 몸동작이 멈추었다. 당태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너는 네 목숨을 부지하는 대신, 평생 구봉방이라는 이름을 쓰지 말며 구봉방 근처에도 가지 말라. 그리하면 목숨을 얻을 수 있으리라. 이 약조를 지킬 수 있겠느냐?”
“……그것은 어렵겠습니다.”
붉은 수염은 내던진 박도를 다시 잡았다.
사내가 무릎을 펴고 다시 몸을 곧게 세우자 당태세는 호승심 대신 평온하기 그지없는 눈매의 붉은 수염사내를 볼 수 있었다.
“소생, 대홍수로 조실부모하고 이곳 개봉부에서 부모나 다름없는 방주를 만나 지금까지 구봉방으로 살아왔습니다. 무공을 폐하고 숨이 끊길지언정 어찌 근본 없는 위인으로 평생을 구차하게 살아가리까?”
“기회를 버리느냐?”
“버리겠습니다.”
당태세는 목괴를 쳐들고 자세를 취했다. 붉은 수염 역시 박도를 움켜쥐고 당태세를 향해 맞섰다. 긴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는 듯, 붉은 수염은 자세를 취하자마자 그대로 땅을 박차고 뛰어들며 당태세의 머리를 향해 큰 칼을 휘둘렀다.
당태세의 목괴가 슬쩍 사선으로 올라가며 박도를 퉁겨내고 오른손의 단도가 붉은 수염의 가슴을 정확하게 꿰뚫고 지나갔다. 두 사내의 위치가 엇갈리는 순간 이미 붉은 수염의 숨은 끊겨 있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붉은 수염을 바라보던 당태세의 얼굴에는 무엇이라 형언 못 할 착잡함이 가득 들어 있었다.
“헛되어 귀하구나.”
당태세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누워있는 아룡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룡은 정신을 못 차리고 누워있었다. 하나 반 식경정도 더 누워있으면 스스로 눈을 뜨고 일어날 때를 찾을 터였다. 당태세는 자신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단도의 손잡이를 한참동안 만지작거리다 다시 뜻 모를 한숨과 함께 품 안으로 단도를 감추었다.
도장의 사방이 정리되었는지 한 사내가 비척대며 달려와 당태세를 보고 두 손을 모으고는 넙죽 허리를 숙였다.
“노대협께 보고 드립니다. 이곳 도장은 이제 맹회의 수중에 들어왔고, 남아있는 재물은 모두 맹회의 분배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흑풍방주와 알아서 하라. 내가 알 일이 아니니라.”
“존명!”
“대신 도장의 장부와 거래선 모두 흑풍방주에게 보내거라. 그곳에서 할 일이 따로 있을 것이다. 아, 그리고….”
당태세의 말에 고개를 숙였던 맹회의 방도가 눈을 번쩍 떴다.
“저기 누워있는 사내를 내가 말하는 객잔으로 옮겨주게. 객잔의 주인이 저 자를 알 것이니 맡기면 될 것이야.”
“알겠습니다.”
당태세는 그제야 뒷짐을 지고는 근처에 있는 의자에 몸을 얹었다. 욱신대는 오른발의 통증은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당태세는 허리를 주먹으로 두들기며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시작인데 지금부터 이래서야 어찌하나? 힘들수록 정신을 차려야지?”
당태세는 혼잣말을 내뱉고 다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구봉방을 도말하는 계획은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힘이 아닌 모략과 협상의 시간이었다.
***
“어서 오십시오. 노대협. 활약이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문각의 호종을 받으며 흑풍방에 들어온 당태세를 흑풍방주 백당락이 쾌한 얼굴로 맞이하였다. 어느새 문각은 당태세의 하인이라도 된 듯 슬쩍 고개를 들고 뻐기면서 주변의 흑풍방도들을 바라보았다. 당태세는 백당락과 함께 자리에 앉아 술을 한잔하며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구봉방의 움직임은 있소?”
흑풍방주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지금 그놈들이 다른 일을 벌일 새가 없을 것입니다. 거사일이 내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까? 몸을 사려도 사려야 할 때지요. 습격당한 것을 보고받아도 뭔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만사 조심해야 할 것이오. 맹주.”
당태세의 입에서 나온 맹주(盟主)라는 말에 흑풍방주가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자신의 성정에 솔직하였다.
“노대협의 충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지금부터는 제가 일을 해야 할 시간이군요.”
“녹영방의 인물과 거래선을 튼 정황이 있더이까?”
흑풍방주가 손을 들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젊은 흑풍방도가 히죽 웃으며 장부를 들어보였다. 사내는 글과 셈을 다 할 줄 아는 이 같았다.
“빨간 줄로 표시까지 해 놨습니다.”
사내가 펼쳐 보인 창해전당의 장부와 도장의 장부에는 일치하는 이름이 하나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 그에게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그 사내의 이름은 한두 번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의 보름에 한 번 꼴로 등장하였고, 가져간 금액도 꽤 쏠쏠하였다.
“이 자가 누구요?”
“개봉부 녹영군의 참장입니다. 이곳에서 가장 경력이 오래 된 장교지요. 벼슬은 참장이지만 위의 부장이 지금 공석인지라 이자가 각 영(營)의 실무를 담당한다 들었습니다.”
“참장이 개봉부의 모든 군사를 담당한단 말이오? 그 윗선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총병은 개봉부만을 관할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내의 군사(軍事)까지 세세하게 관여하진 않겠지요. 원래 이런 일은 아랫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이 고래의 전통 아닙니까?”
고래의 전통. 명(明)대부터 있던 안 좋은 습속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넘어오는구나.
당태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장부를 보고 있던 흑풍방주의 눈이 번쩍였다.
“이 금액과 장부가 온전히 저희 안에 들어왔으니 이제는 말을 섞어봄직 합니다. 이번 일은 제게 맡기시지요.”
“하실 수 있겠소?”
당태세의 말에 흑풍방주가 슬쩍 품안에서 단도를 꺼내들었다. 당태세가 자세를 바로잡자 흑풍방주는 자신의 머릿단 하나를 그대로 끊어버리더니 땅바닥에 내던졌다. 어느새 흑풍방주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변해있었다.
“개봉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소이다. 대의를 위해서인데 신체발부(身體髮膚)를 어찌 아끼겠소이까?”
물끄러미 흑풍방주를 바라보던 당태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을 입으로 가져갔다. 술잔이 입에서 떨어지며 노인의 입이 열렸다.
“그 정도 각오라면 못할 것이 없겠지.”
“어제까지는 노대협의 싸움이었겠지만 이젠 내 싸움이기도 합니다.”
흑풍방주의 말투는 어딘가 대의(大義)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당태세는 사내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태세는 술을 다시 잔에 따랐다. 발의 통증은 가시지 않았지만 지금은 한 잔 더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내가 싸움의 주인공인 것보다 중요한 게 있겠소.”
당태세의 말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말이나 진배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