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하남 개봉부 (16)
“몸은 괜찮으십니까? 조금 쉬었다가 돌아가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흑풍방주가 목괴를 짚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당태세를 뒤에서 따르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당태세를 바라보는 흑풍방주의 눈은 이제 경이로움을 넘어 존경과 흠모의 빛이 가득하였다. 개봉부 내에서 권장도검으로 능히 맞설 자 없다고 일컬어지던 팔익을 두 사람이나 해치운 고수였다.
이젠 흑풍방주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게가 늙은 절름발이에게서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당태세는 흑풍방주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별로 힘을 쓴 것도 아니오. 팔익의 무위가 저 정도라면 두셋 정도는 오늘 한나절에 해치울 수 있겠지.”
“대단하십니다!”
흑풍방주의 찬탄을 뒤로 하면서 당태세는 몸을 부지런히 놀렸다. 하지만 오른발의 통증은 점점 심해지는 중이었다. 두 번째의 곤술가는 괜찮았으나, 첫 번째 권사를 상대할 때 일격을 뿌리치던 수가 무리를 준 모양이었다.
당태세는 굳이 자신의 몸 상태를 흑풍방주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한다고 줄어들 고통도 아니었고, 미룬다 한들 중지될 일들도 아니었다.
아마 지금쯤 아룡은 도장 어딘가에서 늘씬하게 두들겨 맞고 있을 터였고 그를 두들겨 패고 있는 이들은 어쨌건 당태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문제는 아룡이 아니라 그를 기다리는 팔익 두 사람이었다. 어차피 만나서 결착을 볼 일이라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고, 어차피 대결하며 다시 느낄 고통이라면 지금 느낀다 한들 다를 바가 없었다.
“뜻하신 계책은 잘 진행되고 있을까요?”
“아마 잘 진행되고 있다고 봐야겠지. 딱히 그 녀석이 할 일이라는 것이 고육지계밖에 없을 테니.”
“그러다 죽으면 어쩝니까?”
죽으면 그만이지 뭐가 대수요 라는 말이 입 앞까지 나왔지만 당태세는 자신의 속내를 굳이 흑풍방주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더듬어 생각하니 아룡이 여기서 죽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은 되지 않을 성 싶었다. 당태세는 한참동안 길을 걷다가 조용히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리 쉽게 갈 놈은 아닐게요.”
어느새, 두 사람은 동쪽 하구의 근처까지 도달해 있었다. 흑풍방주는 슬쩍 고개를 숙이고는 당태세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노대협, 여기서 인사를 드리고 저는 눈에 안 띄는 곳에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저 용모는 너무 눈에 띄니 말입니다.”
“도장에도 우리의 사람들이 들어가 있는 것은 맞소?”
“북쪽의 사문방과 남쪽의 기천무극방이 도장 안에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최대한 이쪽 근처와 연이 없는 아이들로 채워놓았다고 하니 별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알겠소이다.”
“노대협, 들어가셔서 신호를 주시면 바로 쑤셔놓은 벌집처럼 방도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때를 봐서 거사하시면 될 것입니다.”
“내 선에서 알아서 처리해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모든 방의 일이니 저들도 같이 움직여야 맹회(盟會)의 의의가 있습니다.”
“딴은 그렇구먼.”
당태세는 알겠다는 듯 슬쩍 고개를 낮추고는 빠르게 목괴를 짚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흑풍방주가 슬쩍 제방 위쪽으로 모습을 감추자 흑풍방주가 없어진 곳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둑을 타고 당태세의 뒤쪽에서 한참 떨어져 따라오는 중이었다. 저들은 흑풍방의 후위로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질 경우 도장을 들이칠 것이었다.
흑풍방주도 오늘 당태세가 하는 일에 모든 것을 다 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흑도의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내가 조장하는 꼴이라니.”
당태세는 쓴웃음을 머금고 도장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여전히 날은 더웠고 사람들은 넓은 도장 안에 들끓었다.
패를 쥔 사내들의 눈에는 탐욕이 가득하고 돈을 잃은 사내들의 눈에는 절망이 감도는데, 인간사 오욕칠정이 이 어두운 토굴 안에 모두 모여 있었다.
당태세 역시 욕망이 없다면 이곳에 다시 들어오지 못했을 터,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품에 넣어둔 것을 옳고 정당하다 여기면서 찜통 같은 열기를 이겨내는 것이 틀림없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꽉 악물었다.
“어디 보자, 돈은 바꿔 오셨소?”
붉은 수염 장한이 당태세를 알아보고 먼저 아는 척을 하였다. 당태세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는 자신의 소매 안에서 돈을 꺼내려는 시늉을 하였다. 그 순간 붉은 수염 사내가 겸연쩍은 표정을 짓더니만 고개를 슬쩍 흔들었다. 당태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왜? 뭐가 잘못되기라도 하였소?”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없는데…… 그 돈을 받기는 좀 민망하게 되었소이다.”
당태세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붉은 수염은 입맛을 다시더니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그게 말이오… 노사의 조카라는 이… 지금 혼절해서 누워 있소이다.”
***
“몇 대 때린 것도 아닙니다. 그냥 옆구리 한두 번 쥐어박았달까… 그런데 갑자기 게거품을 물고 혼절하지 뭡니까.”
작은 문을 밀고 들어온 방은 그리 작지 않은 크기였다. 흙벽을 파 만들어낸 방 안에는 단출한 집기와 상자들이 몇 개 널려있었고 방의 구석에는 사람이 쉴 수 있는 침상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리고 아룡은 바로 그 침상 위에 누워있었다.
각진 얼굴의 마른 사내가 당태세를 보자 어이없다는 듯 누워있는 아룡, 단성룡을 가리키며 팔짱을 끼었다. 누워있는 아룡을 안색으로만 판단하자면 이미 반은 저승 문에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냥 옆구리 몇 대요? 진짭니까?”
“허허, 정말이라고 해도 그러시네. 골패판에서 시비를 붙여서 이 방까지 끌려올 때만 해도 아주 기세등등합디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족(漢族)욕을 하기 시작하는데…….”
붉은 수염이 각진 사내의 말을 거들었다.
“어지간한 말에는 꿈쩍도 안 하는 우린데… 정말 부아가 치밀더만.”
마른 사내가 넌더리가 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정말 우리는 몇 대 살짝 쥐어박은 것 밖에 없수다. 이 정도로 약골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하지만 맞을 때까지는 기를 쓰고 명나라 욕을 하더구먼. 나름대로 소신은 있다고 해 줘야 할지…….”
당태세는 목괴를 짚고 누워있는 아룡을 살펴보았다. 비몽사몽간에 누워 있는 것은 절대 허튼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룡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슬쩍 목과 팔의 맥을 짚어보니 빠르고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순간, 스멀스멀 뒤에서 기어 올라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당태세의 뒤에 있던 두 사람이 조용히 운기(運氣)를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갑자기 당태세의 머릿속이 북풍한설을 만난 것처럼 차가워졌다.
지금 이 작은 방안에서 모략을 꾸미는 자는 당태세 하나 뿐이 아니었다.
당태세는 두 사람을 속이는 중이었고, 두 사람은 당태세를 속이고 있는 것이었다.
당태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붉은 수염의 사내는 끝을 짧게 자른 박도(朴刀)를, 그리고 마른 얼굴의 사내는 벽감 뒤에 숨겨 두었던 쌍검(雙劍)을 꺼내드는 중이었다. 당태세가 그들을 바라보며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조카의 혈을 찍었구먼.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될까?”
“그건 우리가 물어보고 싶은 말인데.”
붉은 수염이 입을 열자 깡마른 사내가 쌍검을 양손에 나눠지며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당신을 데리고 온 문사 두 명이 말하더구먼. 취중에 자신들 두 명이 기습을 했는데도 꿈쩍 안 하던 노고수가 갑자기 조카의 버릇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더라고 말이야.”
빌어먹을.
당태세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역시 먹물 놈들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일처리를 복잡하게 하는군. 그냥 입구에서부터 시비를 걸 것이지.”
당태세의 말에 깡마른 사내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내의 손이 주사위를 굴리듯 허공에서 꿈틀거렸다.
“우리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야. 들어온 손님을 다 내쫓을 일 있는가?”
붉은 수염도 히죽대며 자신의 박도를 빙빙 돌려보았다. 하잘것없는 손동작이지만 사내의 박도는 틀이 잡혀 있었다. 명실상부 고수의 칼놀림이었다. 당태세의 눈은 두 사람의 모든 동작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모든 세세한 것을 살피는 중이었다.
“왜 우리에게 다가온 거지? 늙은이? 저 젊은 놈은 아무것도 모르더군. 그냥 몇 대 쥐어박아 놓고 당신과 같이 끝을 보기로 했지.”
당태세의 입이 비틀리며 히죽 웃음이 올라왔다.
“나랑 같이 끝을 보겠다고?”
“대체 전당에는 왜 간 거야? 그리고 같이 갔던 우리 아이는 어쩌고 혼자 돌아왔나?”
깡마른 사내가 쌍검을 가슴 앞으로 끌어올리며 중얼거렸다. 당태세는 천천히 발을 움직여 방의 가운데로 걸어들어 갔다. 붉은 수염과 마른 사내가 당태세의 움직임에 맞춰 같이 발을 앞으로 내었다. 당태세의 입이 열렸다. 붉은 수염의 박도가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먼저 명부전에 가서 생사부(生死簿)에 이름을 올리고 있겠지.”
“그래?”
두 사람은 딱히 놀라는 표정도 아니었다. 이미 도장을 하면서 어지간한 산전수전은 다 겪어본 이들 같았다. 이번 일전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당태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거리를 벌리고 당태세를 양옆에서 포위하기 시작했다. 당태세 역시 품 안에서 단도를 꺼내들고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붉은 수염과 마른 사내가 당태세의 모습을 보며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목발과 단도 한 자루로 우리 둘을 상대하겠다?”
“늙은이,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는 있느냐?”
그를 상대하는 두 사람의 손은 이제 가슴 위로 올라와 있었다. 출수는 자격(刺擊)으로 시작할 것이다. 구봉문의 절기 심문검(心門劍), 혹은 비천절도(飛天切刀). 하지만 둘 다 동일하게 출수는 일문일자(一門一刺)의 식. 초와 식을 알면 문제될 것은 없는 법.
당태세의 입이 열리며 하얀 이가 드러났다.
“구봉방은 조만간 내 손에 모두 죽을 것이다.”
두 사람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문답(問答)이 무용(無用)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왼발을 앞으로 내밀더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도검을 일순간 가슴팍에서 앞으로 번개처럼 출수하였다.
“좋을시고!”
당태세의 목괴가 위로 들리며 동시에 찔러 들어오는 쌍검과 박도를 한꺼번에 몰아치며 방향을 틀었다.
당태세의 몸이 빙글 한 바퀴 돌며 오른손에 쥐고 있는 단도를 뻗어 붉은 수염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하지만 붉은 수염의 박도가 빙글 자신의 목을 감고 돌면서 들어오는 당태세의 단도를 퉁겨 보냈다. 도법은 호쾌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붉은 수염의 박도가 파도처럼 휘몰아치며 여덟 팔(八)자를 그리며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사선을 그리며 당태세를 습격했다.
당태세의 목괴가 날선 칼을 막아내며 빙글 당태세의 허리춤에서 돌아 붉은 수염의 목을 찌르기 위해 솟구쳤다. 그 순간, 마른 사내의 쌍검이 목괴의 진로를 가로막고 번개처럼 방향을 바꿔 당태세의 목을 향해 미끄러졌다.
당태세는 화급하게 몸을 뒤로 빼며 오른손의 단도로 들어오는 칼날을 퉁기고 뒤로 빠져나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무위는 그리 뛰어난 것이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협격은 생각 외로 고강하고 단단하였다.
사문(師門)에서 단련한 투로가 아닌 실전으로 단련된 몸짓이었다.
“죽어라!”
순간 붉은 수염이 박도를 다시 휘두르며 당태세의 앞을 향해 튀어 들어왔다. 전위(前衛)는 붉은 수염, 중군(中軍)과 후위(後衛)는 마른 쌍검! 당태세의 목괴가 들어오는 박도를 마주치며 옆으로 튕겨내고 붉은 수염의 박도와 마른 사내의 쌍검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병법을 도외시한 당태세의 움직임에 두 사람이 잠시 몸을 멈칫하는 사이, 당태세는 그대로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왼발에 힘을 주고 목괴로 상체를 밀며 오른 어깨를 그대로 숙여 황소가 머리로 들이받듯 붉은 수염의 가슴팍을 번개처럼 들이받았다.
창졸간의 일격에 붉은 수염의 몸이 그대로 작은 문짝에 부딪히며 문짝이 박살났다. 천둥번개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며 산산조각 난 나무문짝이 바깥으로 튕겨나가는데, 그 소리를 들은 도박꾼들의 시선이 일제히 작은 방 쪽을 향하였다.
“신호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도장(賭場)의 중앙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