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41화 (41/226)

41. 하남 개봉부 (13)

“숙부, 아침나절부터 안 보이시기에 대체 어디를 헤매고 다니시는 지 궁금했습니다. 오늘은 어디를 다니신 겁니까?”

“개봉하면 역시 운하 아니더냐. 소항만은 못해도 여전히 풍취는 여전하더구나. 그래도 예전 풍광이 더 남아있으면 좋을 것인데…….”

“좋은 구경하셨으면 된 거지 과거를 왜 따지십니까?”

늦은 저녁, 각자 저녁을 해결하고 객잔에 들어온 아룡과 당태세의 대화는 다사로운 듯 하면서도 무미건조하였다.

매일 술에 절어 들어오던 아룡은 이제 그것도 시들해졌는지 멀쩡한 상태에서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고, 그 반대로 당태세는 매일 저고리가 흠뻑 젖을 정도로 개봉부를 움직이며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젊은이는 무료하고 늙은이는 신세한탄을 할 새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봄이었다. 아룡은 오랜만에 잘 먹지도 않는 차를 들이키며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제가 오히려 문제입니다. 이젠 술을 먹던 아름다운 가기의 노래를 듣던 별 감흥이 없습니다요. 개봉에서 흥이 나는 것은 이제 질린 모양입니다그려.”

아닌 게 아니라 아룡이 자기 돈으로 그렇게 술과 기루에 퍼부을 정도면 이미 집안에서 쫓겨나고도 남았을 처지였을 것이다. 온전히 남의 돈이니까 쓰는 맛이 있는 것인데 이젠 그것마저 질릴 정도라면 개봉에 대해 심드렁해 질대로 심드렁해졌다는 말이었다.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준비한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허어, 이제 갈 때가 되긴 한 모양이로다. 개봉에 오래 있기도 하였지! 하지만 이대로 그냥 다른 곳에 가기는 좀 아쉽지 않느냐?”

“아쉽다니요?”

“내가 운하를 돌면서 들어보니 성 동쪽 하구에 있는 도장(賭場)이 개봉의 규례를 따라 각종 도박을 여는데 그곳의 풍광이 예전과 같고 진귀함이 있다 들었느니라. 나는 원래 도박의 소양이 없어 그냥 듣기만 했다만….”

당태세가 슬쩍 아룡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원래 그런 곳은 장부의 호협한 기상이 있는 이들이 한 번씩 들리는 곳 아니더냐?”

어차피 아룡이 금월방에서 늘 하던 짓이 노름과 술판 아니었던가. 당태세가 슬쩍 아룡을 보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박이라…… 좋긴 하지요.”

어째 단성룡, 아룡의 얼굴은 당태세의 기대와는 달리 뜨뜻미지근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는 한족들만 잔뜩 있는 도장(賭場)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워낙 속임수를 잘 쓰고 남의 돈 떼어먹는 데 이골이 난 게 한족들 아닙니까? 원래 도박이라는 것이 격 높은 사교가 동반되어야 하는데 격조 높은 청인들하고 칠 일은 만무하니 그런 데 헛돈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태세가 속에서 불이 확 피어오르는 것을 겨우 삭히면서 다시 좋은 말로 은근히 아룡을 꼬셔보았다.

“아니다 아룡, 이미 너는 무두리 아니더냐? 네가 이미 만주족의 혼을 가진 용(龍:무두리)이라면 어찌 한족 사이에 있다고 그들과 같은 그릇이 되겠느냐? 원래 어느 곳이나 귀천은 있는 법이니 그런 비루한 것들과는 시비를 붙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습니다! 제가 무두리라는 것은 남들이 몰라줘도, 하늘과 숙부님이 알아주면 되는 것이지요!”

당태세의 말에 아룡이 슬쩍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는데 당태세가 짝하니 손뼉을 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네 놈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본 이중 가장 호걸이라 할 만하다. 그렇지! 네가 그런 마음이 있다면 어찌 굳이 도방 같은 곳을 가겠느냐!”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뭐라고?”

“숙부님의 말을 들으니 제가 꼭 그곳에 가봐야 하겠습니다. 장려한 개봉의 옛 풍습대로 펼쳐지는 도박들도 보고! 그곳에서 제가 어떤 기상과 배짱이 있는지 개봉의 한족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룡은 손에 깍지를 끼고 앞으로 죽 뻗는 것이, 이미 도방에 가지 못해 안달이 난 듯 보였다. 역시 청개구리 같은 아룡의 심사를 그동안 잘 읽어두었던 당태세의 승리였다. 아룡은 이제 완벽하게 당태세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당태세는 슬쩍 의미모를 미소를 짓더니만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구나! 내 조카가 그리 말한다면 내 어찌 그곳까지 조카를 안내하지 않을 수 있으랴!”

두 사내가 같이 어깨를 맞대고 하늘을 보며 껄껄 웃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객잔 주인만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

두 사람이 운하의 도방에 도착한 시간은 아직 해가 채 중천에 뜨기도 전이었지만 도방 안은 사람들로 메어 터지고 있었다.

이미 더워지기 시작한 봄의 기운은 이제 여름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겉보기보다 훨씬 넓은 도방 안쪽은 말 그대로 사람들의 열기로 한여름과 진배없는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도방은 작은 초옥의 입구에서 시작되어 땅을 파고 들어가 아예 나중에는 계단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서 널찍한 토굴이 나오는데, 그 윗선에 작은 구멍들을 숭숭 뚫어놓아 햇빛과 공기가 통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당태세가 대충 모여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니 얼추 백에서 백오십은 되는 듯싶었다.

도박의 종류도 다양해서 골패, 엽자패, 쌍륙에 장기와 바둑으로 판돈을 거는 사람도 있고 널찍한 우리에서는 투계(鬪鷄)까지 선을 보이고 있었다. 거의 사람이 볼 수 있는 노름판은 다 모아 둔 것 같았다.

당태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인 두 사람이 이야기해 준 팔익의 인상착의를 떠올렸다.

-저희 둘이 노사와 조카에 대해 먼저 언질을 놓겠습니다. 보통 그 두 분은 쌍륙판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붉은 수염에 큰 체구를 가진 장부나 머리가 둥글고 얼굴이 각진 사내를 찾으시면 될 것이오.

“저는 아무래도 골패를 많이 해 봤으니 그 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숙부님은요?”

“나는 일단 이리저리 구경해보고 자리를 잡아야겠구나. 너무 많은 돈을 허비하지 말거라.”

당태세의 말에 아룡은 웃음으로 당태세의 말에 대답하였다.

“무두리가 어찌 강가의 잡어(雜魚)들에게 돈을 털리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아룡이 허위허위 골패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것을 본 당태세는 몸을 돌려 쌍륙이 벌어지는 곳을 향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곳에서 당태세는 문인들이 설명해 준 두 명을 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붉은 수염에 어깨를 드러낸 기골 장대한 장한 하나가 변발을 치고 얼굴이 각진 마른 체구의 사내와 같이 조를 짜 앉아 있었는데 그 사람 모두 몸에서 풍기는 기도가 무지막지하기 이를데 없었다.

“구봉방주가 사람 키우는 능력은 줄어들지 않았구먼.”

당태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두 사람을 향해 목괴를 움직였다. 당태세가 다가가기도 전에 두 사람은 당태세의 기척을 보고 동시에 고개를 움직였다. 기감을 읽을 수 있는 예리한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당태세를 향해 다가와 두 손을 모았다.

“조카분과 오신다던 노사 맞으십니까?”

“아…두 분이 그 지사(志士)분들이오? 내가 개봉의 고명한 문사 두 분을 만나서 이렇게…….”

깡마른 사내가 슬쩍 쓴웃음을 짓고는 당태세의 장광설을 가로막았다. 이미 알 것은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이미 저희도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 문제라는 조카 분은 어디 있습니까?”

“골패를 하는 곳으로 갔다오. 그 놈의 이름은 아룡이고, 백포에 푸른 바지를 입고 인물이 훤하니 금세 알아보실 것이외다.”

붉은 수염이 장한이 당태세의 말을 듣고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카 되시는 분이 청(淸)의 습속을 따르고 같은 동포를 천하게 여기는 것을 당연히 여긴단 말입니까? 그 버릇을 고쳐 달라 노사께서는 말하신 것이고요?”

당태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몸이 비루하여 훈계에 한계가 있소이다. 참으로 창피하고 면목 없는 일이오만……”

“소생이 보아하니 노사께서는 젊은 시절 꽤나 몸을 쓰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어려우신 듯하군요. 저희가 어찌 속의 근심을 모르겠습니까?”

이미 붉은 수염의 사내는 당태세의 무위를 조금이나마 인식하는 듯 보였다. 당태세가 그나마 다리를 절고 목괴까지 끼지 않았다면 아마 대놓고 의심부터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태세는 이 순간만큼은 망가진 자신의 오른발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노사께선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오늘 조카의 습벽을 완전히 뜯어 놓겠소이다. 오늘 밤이 지나면 조카는 다시는 같은 동족을 핍박하지 못하게 될 것이오.”

적발수염 옆에 서 있던 깡마른 팔익이 조용히 목소리를 낮춰 당태세에게 말하였다. 당태세는 순간 깡마른 사내의 무위가 오히려 적발사내보다 높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둘이 같이 덤벼든다면 당태세로서도 버거운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저기… 그게 어찌 되는 겁니까? 제 조카… 목숨은 안전하겠지요? 어디 부러진다든가….”

당태세의 말을 들은 적발사내가 소리를 낮춰 웃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아마 심하면 몸 여기저기에 멍이나 들겠지요.”

깡마른 사내도 적발사내와 입을 맞췄다.

“우리도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오. 대 놓고 사람을 치죄하진 않습니다. 골패 중에 시비가 붙으면 우리가 이 도방 끝에 있는 방 안에서 고신을 합니다. 그래야 도방이 돌아가지요.”

“시비가 붙지 않으면요? 제 조카는 호락호락한 위인은 아니라서…….”

깡마른 사내의 입에 다시 고소가 올라왔다.

“걱정 마십시오. 이 도방 안에는 우리 부하들도 꽤 깔려 있소이다. 바람 잡는 건 제 부하들이 하게 될 거요.”

“아, 그렇습니까. 안심입니다.”

부하들. 구봉방도들.

당태세의 눈에 노름과 관계없이 주위를 돌아다니거나 물과 술을 전해주거나 음식 심부름을 하는 젊은 사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구봉방의 영역이니 저들 모두 구봉방도라고 보는 것이 당연했다. 호랑이굴이라 해도 다름없는 곳이었다. 당태세는 천천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두 분의 일하시는 모습을 보니 옛날 손무와 오자서를 보는 것 같소이다! 마치 병법에 쓰여 있는 듯 군사들을 몰아 적을 포위하는 것을 보는 듯싶구려! 실로 초야에 묻힌 인재가 두 분 아니겠소!”

“허허, 무슨 과찬이신지…….”

붉은 수염이 고개를 돌리며 쑥스럽다는 듯 말하자 당태세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어찌 제가 사례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정도 두 분께 사례를 해야 하겠소!”

“어허! 이 일은 우리가 어디까지나 명의 은혜를 잊지 않는 이들을 위한 일이오. 어찌 다른 보답을 받겠소?”

붉은 수염은 말은 그리 하였으나 눈동자로 당태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고, 마른 사내는 아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속내가 빤히 보이는 짓이니 당태세는 다시 한 번 채근하기로 하였다.

“가만있자… 내 지금 가진 것이라곤 집안의 보도(寶刀)뿐인데, 이것이라도 내 바꿔 두 분께 희사를 하고 싶소이다. 근처에 혹시 아는 전당(典當)이라도 있으십니까?”

“집안의 물건이라니! 그런 것으로 왜 사례를 한단 말이오?”

잠시 동안 당태세와 두 사람간의 옥신각신이 이어졌지만 이내 깡마른 사내는 할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고 알았다는 시늉을 하며 투덜거렸다.

“이거야 원… 머리 눌려 절 받는 격 아닌가. 노사께서 하도 극진히 이야기하니 우리가 어쩔 수 없겠소. 내 아이 하나를 붙여줄 테니 전당에 다녀오시오. 우리 동접들이 일하는 곳이라오.”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태세의 노림수가 맞았다. 지금까지 이 지지부진한 대화를 이어온 것은 오직 하나, 이 전당(典當)에 대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당당하게 두 발로 전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이로써 마련된 것이었다.

“알겠소이다! 내 금세 다녀오리다!”

“가실 요량이시면 좀 천천히 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마른 사내가 쓴웃음을 다시 얼굴에 띠웠다.

“조카 분을 훈육할 시간이 필요하니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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