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하남 개봉부 (12)
두 시진이 흘러가기 전에 흑풍방의 본전은 사방에서 몰려온 비류들로 가득 찼다.
십인십색이라는 것은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이었을 터, 분명 개봉성에 안에 있는 인물들이 분명한데도 복장과 인상이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단정하게 변발을 치고 금전서미를 곱게 따 놓은 인물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아예 관도 안 쓰고 봉두난발로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형상을 띤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한 방회를 대표하는 방주들이었고 이들의 생리를 한 마디로 표현하지만 청(淸)의 국법을 위반하여 지금 당장 저자거리에서 목을 베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위인들이었다.
당태세는 의자에 걸터앉아 자신의 앞에서 웅성대는 이들을 보며 이마를 쓰다듬었다.
“진짜 하오배 중의 하오배들이구나. 내가 이런 이들과 회합을 가질 줄은 몰랐지. 젊은 날의 당태세는 꿈도 못 꾸었을 것이고. 흐흐하.”
당태세의 혼잣말을 뒤로하고 흑풍방주는 자신의 앞에 모인 수많은 방회의 방주들을 보며 탁자위에 올라섰다. 한 손을 단도의 칼자루 위에 올리고 두 갈래로 딴 머리카락을 넘긴 채 사방을 돌아보는 흑풍방주의 모습에는 나름대로 방주의 위엄이 흐르고 있었다.
“형제들, 원로장도를 마다않고 이 어려운 시국에 와 줘서 감사하외다. 본도는 흑풍방주 백모요. 이 자리에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다름 아닌 우리 개봉부의 화급한 문제를 해결하려 함이오.”
흑풍방주는 단도직입 바로 논제를 꺼내 놓더니 사람들에게 우렁찬 목소리로 당태세가 알아내어 가져온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했다.
모여 있던 타 방회의 사내들에게는 거의 날벼락 같은 이야기였다. 기껏해야 각 방회의 지분문제에 대한 지겹고 구질구질한 회합 이야기일 줄 알았더니 전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이미 흑풍방주가 첫 소절을 꺼낼 때부터 사방이 술렁대기 시작하더니 흑풍방주가 뇌옥 안의 구봉방 팔익에 대한 이야기까지 꺼내 놓자 마치 흑풍방 안은 커다란 벌집처럼 웅웅대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뭐하자는 거야. 바쁜 사람들을 불러놓고!”
“어이! 조용히 해 봐! 지금 심각한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흑풍방주! 그게 사실이오?”
“구봉방 놈들이 뭘 어쩌려고?”
방주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난리법석 제각각인데 사람들은 흑풍방주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불쾌해 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조용히 하시오! 우리가 아이들이오?”
흑풍방주는 들끓는 방주들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보였다. 우렁찬 사내의 소리에 어느새 사람들의 혼란은 시나브로 잦아들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말하는 이야기가 흑풍방에서 나온 것이 아닌 외인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오! 그리고 그간 우리가 겪어온 바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소이다! 지금 구봉방에 의해 여기 모인 대부분의 방회는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소? 그리고 그들이 녹영군과 한 패라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고!”
흑풍방주의 눈이 번득였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 개봉부에서 작당하여 이 성읍에 변고를 가져오려 한다면 당연히 우리가 막아야 하는 것 아니겠소! 구봉방의 전횡을 막아야 하는 것이 순리 아니오?”
방주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팔짱을 끼고 혹자는 웃음을 머금은 채 흑풍방주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반응은 흑풍방주의 말에 찬동하는 모양새였다.
“그렇지.”
“때가 되긴 한 거지!”
“구봉방 놈들이 우리 개봉부를 다 먹을 판이니, 흑풍방주의 말이 정확하긴 한 것이네.”
“숭호방의 전철을 우리가 밟지 말란 법이 있는가?”
당태세는 슬쩍 본전 뒤의 어둠 속에 앉아있는 숭호방주 이방주의 눈치를 살폈다. 사람들을 피해 어둠속에 있긴 하였으나 그도 이 회합에 참석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오르내리는 것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눈치였다.
그때였다. 한 사내가 벌떡 손을 들었다. 화려한 붉은 실로 어깨와 가슴에 수를 놓은 멋들어진 의복의 사내였다.
“나는 이 회합이 마뜩치 않아. 언제부터 흑풍방이 우리를 오라 가라 했단 말인가? 더군다나 구봉방은 우리 개봉부의 식구가 된지 이미 십년이 훌쩍 넘었어. 그를 우리가 치죄하자고? 그러면서 우리가 형제 운운한단 말인가?”
“어이, 도운방주. 조용히 하게.”
도운방주라 불린 사내가 슬쩍 몸을 일으키더니 흑풍방주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백방주. 난 자네가 우리를 부른 게 영 맘에 안 들어. 자네가 이 개봉부 방회들의 총수가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게다가 구봉방이 개봉에서 난을 일으킨다고? 그런 헛소리를 믿으란 말인가?”
“뭐라?”
흑풍방의 백방주가 얼굴이 붉게 변하는데 다른 사내 하나도 옆에서 불쑥 몸을 일으켰다.
“나 역시 이번 회합에는 반대하네. 우리 미염방은 이번 회합에 반대를 분명히 하겠어.”
당태세는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미염방과 도운방이라. 미염방주가 슬쩍 주위를 보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보시오. 개봉에서 가장 큰 곽가방은 아예 이 화합에는 오지 않았잖소. 우리들만으로 대체 무엇을 한단 말이겠는가? 그저 흑풍방의 욕심 아닌가 말이야!”
낯빛을 바꿨던 흑풍방주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차피 곽가방의 곽방주는 이익이 따르는 곳으로 몸을 움직일 것이오. 그것은 여기 모인 모두가 아는 처지 아니오? 그리고 미염방과 도운방. 당신들은 구봉방의 수하나 다름없는 자들 아니던가?”
“그 말은 좀 심하구먼.”
덩치가 있는 검은 옷의 장한 하나도 불쑥 몸을 일으켰다.
“그런 식이라면 우리 흑금문도 구봉방의 하수라 칭하겠구먼. 흑풍방주. 너무 교만한 거 아닌가? 자네가 우리 셋을 적으로 돌리고 구봉방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말인가?”
흑금문까지 반대에 가세하자 일어섰던 미염방주와 도운방주는 흑풍방주를 노려보며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뭐가 어째? 수하라 하였겠다? 흑풍방주. 네가 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가?”
“취소하게. 안 그러면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네.”
흑풍방주는 일어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 방주를 들러보더니 차갑게 말하였다.
“사내는 자신이 말한 바에 책임을 지는 법. 나는 당신들이 구봉방의 수하라고 생각하오.”
“뭐?”
“이미 그대들 역시 나름대로 악명을 쌓고 있지 않은가. 개봉부 팔십 방회중 당신들 셋만큼 청에 협조하며 구봉방과 죽이 잘 맞는 이들이 누구인가?
수십 명 방주들이 모여 앉은 흑풍회의 본전에 침묵이 흘러넘쳤다.
당태세는 일어서 있는 세 명의 방주들을 지그시 노려보다 천천히 목괴를 잡고 일어났다. 노인이 본전의 앞쪽으로 다가서자 미염방주가 흑픙방주와 옆의 두 방주를 번갈아 보더니 조끼 안의 단도를 내보이며 이를 드러냈다.
“이곳에서 우리 미염방을 없애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흑풍방주. 야심이 있는 것은 진작 알았지만 이렇게 이를 드러내는군. 왜, 개봉 팔십방회의 맹주라도 되고 싶은 모양이지?”
도운방주 역시 거리낌 없이 허리춤의 단도를 내보였다.
“우리가 구봉방을 도왔다는 증거라도 있느냐. 흑풍방주. 네 놈이 우리에게 누명을 씌웠으니 응당 목숨으로 네 혓바닥의 실수를 보상해야 하겠지?”
그 때였다. 음산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본전의 뒤쪽에서 흘러나왔다.
“도운방주. 미염방주. 그리고 흑금문. 너희가 구봉방과 관계가 없단 말이냐. 개가 웃겠구나.”
그림자 속에서 비틀대며 촛불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다름 아닌 숭호방의 이방주였다. 세 사람은 일제히 뒤를 돌아보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네놈들 셋이 구봉방과 녹영군의 길라잡이가 되어 우리 숭호방의 문을 맨 처음 부순 첨병들 아니었느냐? 내가 너희 세 방회의 방도와 구봉방도. 녹영군을 구분 못할까봐?”
“저… 저 자가 왜 여기 있느냐!”
흑금문주가 다급하게 외치자 미염방주도 좌중의 방주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형제들! 파방된 방주가 무슨 자격으로 여기 들어온단 말인가! 이것은 모략이네!”
“모략이라고?
흑풍방주가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흑풍방주의 손이 번쩍 들리자 뒤에 서 있던 술시중하는 아이가 재빠르게 밖으로 몸을 날렸다. 사내는 사라지는 술시중을 보면서 자신의 아래 서 있는 세 방주를 모멸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방회간의 싸움에 관(官)이 끼어들었는데 그 찌꺼기를 얻어먹겠다고 덤벼든 당신들의 입에서 어찌 그런 말이 나오는가? 그대들은 흑도(黑道)로 살면서 자존심도 버렸는가?”
“죽어!”
순간, 미염방주가 단도를 뽑아들고 그대로 단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때였다. 단상 역할을 하고 있는 넓은 탁자 위로 절름발이 노인이 가볍게 뛰어올라오더니 짚고 있던 목발을 뻗어 미염방주의 단도를 막아서고는 그대로 성한 왼발을 미염방주의 발 사이에 밀어 넣었다. 어떤 재간이 펼쳐졌는지 눈으로 볼 수도 없었다.
순간 단도를 잡고 있던 미염방주의 몸이 그대로 목발을 축으로 공중에서 한 바퀴 빙글 맴돌더니 그대로 탁자 아래로 머리부터 처박히는데 머리가 아래로 떨어지면서 기분 나쁜 소리가 좌중에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누구 하나 소리를 내는 이는 없었다.
흑금문주와 도운방주 역시 서로 눈을 크게 뜨고 이 광경을 바라보더니 동시에 칼을 뽑아들고 본전의 출입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탁자 위에 서 있던 의족 노인은 탁자를 목괴로 찍으며 몸을 공중에 띄우더니 한 바퀴 허공에서 맴을 돈 뒤 두 사람과 출입문 사이 가뿐하게 착지하였다. 귀린갈 당태세가 주름 잡힌 눈살 위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개봉 사내들의 손에 개봉사람의 피를 묻혀서는 안 되겠지?”
그 날 흑풍방의 회의에 참석했던 개봉 팔십방회의 방주들은 생전 다시는 잊지 못할 진기한 광경을 구경하였다.
흑금문주가 단도를 팔방으로 휘두르며 노인의 안면을 조각낼 기세로 뛰어들고 뒤에 있던 도운방주가 옆으로 몸을 틀며 노인의 옆구리를 노렸다.
순간 노인은 슬쩍 몸을 벌려 도운방주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더니 들어오는 흑금문주의 공격을 가볍게 목괴로 막고 나무 사이에 흑금문주의 손을 끼우더니 그대로 빙글 돌며 흑금문주의 중심을 빼앗았다.
도운방주가 그 틈을 보고 화살처럼 손을 뻗어 노인의 옆구리로 칼을 옮겨가는 순간, 노인의 오른손에 어느새 잡혀 있던 흑금문주의 칼이 도운방주의 칼을 퉁기고는 그대로 도운방주의 옆구리에 칼날을 박아버렸다.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하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도운방주가 그대로 고개를 가랑이 사이에 파묻고 몸이 구부러지는데, 목괴 사이에서 탈골된 팔을 잡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흑금문주는 자신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변발의 노인을 올려다보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둘은 뇌옥, 둘은 도박장. 둘은 구봉방주와 함께 돌아다니지.”
“……뭐라고?”
“팔익의 나머지 두 놈은 어디 있느냐? 네놈은 알겠지?”
흑금문주는 겁이 잔뜩 질린 눈으로 당태세를 쳐다보다 눈을 껌벅이더니 고개를 재빠르게 끄덕였다.
“전당(典當)… 전당 깊숙한 곳에서 돈을 관리하오! 그곳에 두 명이 있소이다.”
당태세가 흑풍방주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흑풍방주 역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탁자위에서 지금까지 그를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개봉의 방주들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서 나 흑풍방주 백당락이 여러 개봉의 형제들에게 제안을 하나 하려 하오. 오늘 이 자리를 기반으로 우리 개봉의 팔십 방회는 연합하여 밖으로는 외세의 개입을 막고 안으로는 서로의 상조(相助)에 힘쓸 것을 제안하오! 우리 팔십 방회는 투표로 맹주를 하나 뽑되, 맹주의 임기는 일 년으로 하는 거요!”
어느새 흑풍방주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이번 맹주로 숭호방의 이방주를 추천하외다. 비록 지금 방은 없지만 이 곳에 있는 모두가 그분의 신의와 능력을 알고 있소. 이 자리에 이방주를 맹주로 추천하는 것이 어떻소이까?”
“저 세 방파의 잔당이 이곳으로 밀려들어 올지도 모르는데 그런 소리가 나오는가?”
누군가의 물음에 흑풍방주는 싱긋 웃으며 본전의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내 조금 전 시동을 보내어 우리 아이들을 세 갈래로 나눠 보내었소. 흑풍방 안에 들어온 세 방파의 사람들은 진압되었을 것이고 조만간 한군데씩 정리가 될 것이오. 물론 방주가 없다면 그만큼 빨리 정리되겠구먼.”
일사천리, 누구 하나 쉽사리 반대를 말할 수 없는 분위기. 당태세는 흑풍방주의 옆얼굴을 보면서 자신이 사람 속을 아직 십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흑풍방주는 세 방파가 자신을 노리는 걸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 일은 어쩌면 당태세를 만나기 전부터 계획에 올라와 있던 일일지도 몰랐다.
흑풍방주는 지독한 야망이 있는 이였다. 그리고 분명 지금 그는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 도박을 하고 있는 것임에 분명하였다.
“나는 사양하오. 이미 파방된 방의 방주가 무슨 힘이 있겠소. 나는 그저 구봉방에 복수를 하고 싶을 뿐이외다.”
이방주가 천천히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오히려 맹주를 뽑는다면 우리 개봉의 방회에게 닥친 위험을 알려준 흑풍방의 백방주가 되어야 하오. 이 필부의 생각은 이러하오. 여러 형제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찬성이오!”
“찬성이오!”
“그리합시다!”
누구 하나 반대를 입에 내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빠진 팔을 부여잡고 비지땀을 흘려대는 흑금문주조차 절박한 표정으로 찬성을 외치고 있었다. 당태세는 슬쩍 이방주에게 고개를 숙이는 백방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분명 저 두 사람은 오늘 처음 회동한 것이 아닐 것이었다. 당태세가 모르는 시간과 공간은 너무나도 많이 열려 있었다.
“알겠습니다, 형제들. 제가 이 자리에서 과분한 직책을 얻은 것 같습니다만…. 이 힘은 오직 우리 개봉의 방회를 위해서만 쓰겠소이다!”
흑풍방주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내는 팔을 번쩍 치켜들더니 좌중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우리 개봉흑도맹의 첫 과업은 다름 아닌 구봉방의 축출이 될 것이오! 형제들, 쟁투(爭鬪)를 준비하시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수염 아래로 입술이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사내는 미소를 들키지 않도록 고개를 숙였다. 드디어 때가 무르익은 것이다.
“이제 나도 슬슬 문인들을 만나야 할 시간이군.”
고개 숙인 당태세의 눈빛이 번득이는 것을 눈치 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