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하남 개봉부 (12)
개봉의 새벽엔 안개가 자욱했다. 운하에서 올라온 습기가 땅과 만나 사방을 흐리게 하였다. 물안개가 자욱한 개봉의 운하를 작은 거룻배 하나가 소리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배의 앞머리에 정좌한 채 목괴를 지팡이처럼 옆에 짚고 앉은 당태세의 모습은 마치 비경(秘境)을 찾아 선계를 헤매는 신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반면, 뒤에서 삿대를 찍으며 배를 밀고 가는 문각의 표정은 주변의 풍광과 마찬가지로 흐릿하니 걱정 가득한 모습이었다.
“대, 대협. 이렇게 다시 가시는 것을 보니 확신이 있으신 게죠?”
문각의 물음에도 당태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문각은 연신 삿대질을 하면서도 점점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오줌 마려운 아이처럼 사방을 돌아보며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듯싶었다. 그때 당태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번잡하게 굴지 말아라.”
“아! 네! 네!”
문각은 앞에 앉아있는 당태세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려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한 번 갔던 길인데 왜 그리 두려워하는고?”
“저기…… 저 번에 흑풍방에 갔을 때 뭔가 거래를 하고 오신 거 아니십니까?”
“그렇다.”
“근데 지금… 저희는 빈손으로 가는데…….”
“무슨 빈손이냐.”
“네?”
“내가 두 번이나 발품을 팔고 있지 않느냐. 이 정도면 대단한 성의인 게지.”
문각은 기가 차다는 듯 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흑풍방주가 그렇게 만만한 사내가 아닙니다요. 거래는 칼 같고 사람 목숨은 파리처럼 여기는 위인인데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가시면 어쩌시려고요? 기일을 늘려 달라 약조를 바꿔 달라 그런 말은 아예 통하지도 않는 위인입니다.”
“그 놈들이나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 싶구나.”
“네?”
“네 놈은 닥치고 배나 몰아라. 말하는 일과 살아서 돌아오는 일은 나에게 맡기고.”
“네… 네! 대협!”
“그리고 조용히 하고.”
“네! 네! 알겠습니다.”
당태세는 말을 마치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문각과 당태세가 탄 거룻배는 안개 속을 지나 커다란 다리 옆의 허름한 민가들이 늘어선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번을 서고 있는 사내들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당태세의 눈에 들어왔다. 당태세의 입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
당태세와 문각은 그 흐려진 시야 가운데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장한들에 둘러싸인 채 한 사내와 독대하고 있었다.
흑풍방주는 때 이른 시각에 부지런히 찾아온 노인의 신색을 보며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만 딱히 입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고 있었다. 최소한 방파의 주인 노릇은 할 만한 진중한 처신이었다.
“말씀해보시오.”
“팔익의 거처를 알았소이다.”
“그 정도는 우리도 금세 알아챌 수 있소이다. 고작 그 이야기를 들고 오신 거요?”
“여덟 명이 어디 있는지 모두 찾아낼 수 있다고? 잘 해야 대여섯이겠지.”
흑풍방주가 당태세의 얼굴을 보며 슬쩍 턱을 들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요? 대여섯을 찾든 여덟 명을 다 찾든 뭔가 우리와 거래할 만한 것을 가져와야 다음 이야기가 통하는 것인데.”
“지금 가져오지 않았는가?”
“무슨 소리요?”
당태세가 흑풍방주를 보며 씩 웃어보였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 않은가?”
문각이 당태세의 말을 듣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사방을 돌아보았다. 흑풍방주는 이렇다 할 표정의 변화 없이 팔짱을 끼더니만 당태세를 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말장난을 치러 꼭두새벽부터 이 자리에 오셨소? 노사.”
“팔익의 두 사내는 녹영군의 뇌옥에 들어가 있네.”
“뭐요?”
흑풍방주가 허를 찔린 듯 눈을 크게 뜨고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니 당태세는 못을 박 듯 한마디를 더 던졌다.
“자기들 발로 들어가서 뇌옥 안을 제집 드나들 듯 하고 있더군. 뇌옥 안에서 구봉방의 일을 보는 모양이지.”
“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그걸 어찌 알게 되었소?”
당태세가 흑풍방주를 보며 말없이 씩 미소를 지어보이자 흑풍방주는 순간 표정을 굳히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사내는 팔짱을 풀고 다시 자세를 가다듬더니 당태세를 향해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무슨 연유인지 말씀이나 해 보십시오.”
당태세는 목청을 가다듬고 개봉부에 도착한 이후 개봉부 북문에서 석장 황충수를 만난 일과 구봉방의 사내들을 본 일, 그리고 구봉방 앞에서 황충수를 본 일과 주루에서 일을 자세하게 말하였다.
가감 없이 덤덤하게 말하는 당태세의 말은 달변이라 할 수 없었지만 노인의 목소리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어느새 흑풍방주는 당태세의 말을 들으며 저절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는데, 당태세가 마지막 뇌옥에서 황충수와 구봉방의 팔익을 만난 이야기까지 듣자 더 이상 고개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흑풍방주는 마치 돌로 쪼아 만든 사람처럼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내가 접하고 전해 듣고 수집한 이야기들이오.”
당태세가 한숨을 돌리며 흑풍방주를 쳐다보았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있겠소. 흑풍방주?”
흑풍방주는 빤히 당태세를 쳐다보다가 뒤로 손을 흔들었다. 사내의 손이 움직이기 무섭게 동자 하나가 달려와 술잔 두개와 백주 하나를 상 위에 가져왔다. 허나 흑풍방주는 술병에 손을 대지 않았다. 사내의 혀는 마른 입술을 핥고 있었다.
“대충 짐작은 할 수 있겠소만…….”
“구봉방은 개봉에서 난을 일으키려 하네.”
안개 속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은 마치 석불(石佛)이 된 듯 눈을 뜨고 입을 다문 채 당태세의 말을 듣고 있었다. 흑풍방주 역시 말없이 당태세의 입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이 개봉에서 이런 일을 획책하는 지 까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구봉방은 지금까지 개봉부 내에서 자신들의 옛 명(明)을 간직하고 그들의 유지를 지키는 집단이라고 사람들이 믿게 행동한 모양이더구먼.”
옛 명(明)이라는 말이 이렇게 쉽사리 자신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당태세였다. 가슴 한편이 알지 못한 서러움으로 짜릿하게 시려왔다. 하지만 당태세는 계속 흑풍방주에게 말을 이어갔다.
“끌려간 이는 구봉방이 누구인지 알 지 못해. 하지만 그는 분명 옳다하는 일을 위해 목숨을 내걸겠지. 그런 이가 황충수 하나뿐인지 아닌 지 알 수가 없어. 다른 이들도 조사해보면 뇌옥 안에 들어가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네.”
“아닌 게 아니라 외지에서 온 인부 중에 없어진 이가 꽤 된다는 말은 예전부터 돌고 있었소.”
흑풍방주가 당태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흑풍방주는 마음을 추스른 듯 자신과 당태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술을 따르던 흑풍방주가 생각난다는 듯 다시 입을 다시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도 생각나는 이가 몇 있긴 하오. 다들 노역이 힘들어서 도망갔다고 치부했는데 성품이 그럴 위인들이 아니었지. 오래 되지도 않았소. 한 스무 날, 보름 전부터 꽤 들려오던 이야기였으니까.”
“그들이 뇌옥 안에서 사람들을 다잡고 있겠지. 사흘 뒤에 개봉부를 습격하자는 말이라던가, 성벽을 무너뜨리자던가.”
“구봉방이 그래서 얻는 이득이 무어란 말인가?”
흑풍방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만 술잔을 입에 가져가다 당태세의 눈을 보고 다시 술잔을 입에서 떼었다.
“그들이 진심이면 어찌할 것이오. 노사?”
“응?”
“노사는 그들, 구봉방 놈들이 진짜 지사가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안단 말이오? 만에 하나 그들이 진정으로 명의 수복을 위해 일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흑풍방주의 말에 당태세는 다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사내는 웃음과 함께 짧은 한숨을 같이 사방에 뿌려내었다.
“구봉방주가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십칠 년 전에 칼을 거꾸로 잡지 않았겠지.”
흑풍방주가 눈썹을 꿈틀거리자 당태세는 짧게 말하였다.
“그는 황제를 눈앞에서 팔아먹은 위인이다.”
“황제…….”
“나는 무너지는 황도의 성벽 앞에서 그가 황제의 시위들을 반역하고 이자성에게 붙는 것을 목도한 사람이다. 그런 놈이 지금 와서 명을 다시 세운다고?”
당태세는 단숨에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켰다. 커허 하는 소리와 함께 올려 본 하늘은 일출과 함께 서서히 동녘부터 맑게 개이고 있었다.
“그런 일을 행하고자 했다면 자신부터 드러내고 참회를 했겠지. 은거한 의인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야. 그런 놈이라면 다른 방회들에게 도움을 구했겠지. 다른 방회들을 부시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고 말일세.”
흑풍방주가 당태세의 말을 듣고 술잔을 비웠다. 흑풍방주 역시 하늘을 보더니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었다. 아직 젊은 방회의 회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내 나이 다섯 살 때 성벽이 무너지고 물과 함께 이자성군이 들어왔소.”
사내는 물끄러미 앞으로 시선으로 향하였지만 사내의 눈은 기억 속을 헤매고 있었다.
“많은 것이 기억나진 않소. 난 어렸고 성이 무너졌다는 게 무언지도 모를 나이니까. 하지만 그 때 본 것들은 아직도 약간 기억에 남아서 띄엄띄엄 머릿속에 떠오르곤 합니다. 부서지는 성과 그 아래 박살 난 집들. 넘쳐흐르는 물살이 발 아래로 흐르는 기억.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말들. 고함소리. 그리고…… 내 앞에서 피를 쏟으며 돌아가신…… 어머니.”
사내는 입 속에서 혀를 돌리며 목을 넘긴 술의 맛을 음미하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기려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지금 한 방의 회주를 맡고 있소. 내가 이 흑풍방의 회주로 올라오며 한 가지 맹세한 게 있소이다. 나는 방회간의 쟁투(爭鬪)는 용납하지만 성 전체를 불구덩이로 밀어 넣는 짓은 안 할 거라 천명하였소. 그 반대도 성립하겠지. 나는 이 성이 망가지는 일은 하지 않을 거요. 보고 싶지도 않소.”
“그렇다면 이야기는 다 된 것이로군. 내게 힘을 빌려줄 것인가?”
당태세의 말에 흑풍방주가 웃었다.
“노사, 노사에게 받은 정보는 귀중한 것이오. 그렇다고 내가 내 권한을 외인에게 줄 수는 없소이다. 나는 내 싸움을 하겠다는 것이니.”
“누가 흑풍방주의 직을 원한다 하였는가? 나는 구봉방을 없애고 싶은 것이네. 그대는 개봉을 살리고 싶겠지만 나는 구봉방을 없애고 싶단 말이네.”
“좋소, 노사. 내가 뭘 해주면 좋겠소이까?”
“자네가 가진 역량 전부를 내놓게.”
흑풍방주가 멈칫하며 당태세를 바라보는 찰나, 이어지는 당태세의 말이 비수처럼 흑풍방주의 요혈을 파고들어갔다.
“흑풍방주, 모을 수 있는 흑풍방도와 협조할 수 있는 방회를 모두 불러 모아 주게. 이 기회를 놓치면 개봉부는 물로 쓸려가는 게 아니라 불에 살라지는 끔찍한 지옥도가 될 것이네.”
당태세의 눈이 번득였다.
“내가 지옥에서 자네들을 끄집어내 줄 테니까.”
흑풍방주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으며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노사의 실력을 보긴 했지만 이 정도로 광오(狂傲)할 줄은 몰랐소이다.”
“광오라니, 자네가 내 실력을 보았단 말인가. 자네 방도들을 때려눕힐 때는 일 푼의 힘도 쓰지 않은 것이거늘.”
“미친 노인이구먼.”
흑풍방주는 헛웃음을 지어보았지만 이내 표정을 바꾸고 진지하게 대꾸하였다.
“……모두 불러오면 된다는 말이오?”
“자네가 아는 팔익의 거처부터 다 내놓게, 나는 아는 게 네 마리밖에 없거든.”
당태세의 독살스런 눈빛 아래로 송곳니가 번쩍이며 드러났다.
“구봉방주 오자평의 손발부터 없애 놓겠네.”
“팔익 여덟 명은 모두 뛰어난 공부를 지녔소. 개봉부 내에서 그들과 같이 붙을 만한 이들은 몇 없을 것이오. 노사라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이오만.”
“뛰어나 봤자 몸통이 아닌 날개(翼) 아닌가.”
당태세의 소름끼치는 미소를 본 흑풍방주는 마지막에 노인이 뇌까린 말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팔익을 갈기갈기 찢어놓아 몸뚱어리를 땅에서 뒤뚱거리며 돌아다니게 만들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