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하남 개봉부(9)
당태세는 객잔에 홀로 앉아 목괴를 나무기둥인 양 두 손으로 받쳐 턱에 괴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간이 많이 남은 것도 아니었지만 쉽사리 몸을 움직일 만큼 간단한 것도 아니었다. 군(軍)을 끼고 있는 구봉방을 해치우는 것은 군의 하급 하수인이나 다름없었던 충룡방을 해치우는 것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구봉방은 성의 수축과 고용이라는 단순하고 돈이 되는 곳에 자신의 효용을 모두 집결하고 있었다. 충룡방처럼 성내를 오가며 일을 벌이는 난잡한 짓은 하지 않았다. 적은 숫자로 많은 이문(利文)을 남기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구봉방주 오자평… 여우같은 놈.”
예부터 대하기 쉽지 않은 사내였다.
보국구대문파맹을 결성하고 황제의 황성을 지키고자 맹세했을 때에도 가장 많은 요구조건을 걸고 들어와서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했던 위인이기도 하였다.
“아마 그 놈이 가장 먼저 이자성에게 붙자고 말했을 것이다.”
당태세는 투덜대면서 한참동안 흐린 하늘을 보며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말은 호기롭게 떠들고 나왔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만금이 어디 있으며 개봉의 모든 방파를 데리고 올 정도의 대의명분은 어디서 구한단 말이냐?”
결국, 남아있는 결론은 구봉방주의 측근인 팔익(八翼)들을 하나둘 잡아다가 흑풍방에 넘기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법도 혼자서 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흑풍방도들을 때려잡는 것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 때 새벽에 봤던 놈들이 팔익일 것이다.”
이미 고수의 신위를 확인한 당태세였다. 그런 이들을 꾀어내어 잡으려면 필히 바람 잡는 이 몇이 있거나 따로 결투장을 써서 끄집어 내야했다. 첫 번째는 북경에서 정도문파들을 사파나 하오문들이 꾀어 해치울 때 쓰던 방법이었고, 두 번째는 정도문파의 해결법이었다. 당태세는 일단 결투장은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때가 어느 때인데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남은 방법은 결국 사람을 이용해 사람을 꼬셔내는 간계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대체 누구를 쓴단 말인가? 당태세는 한숨을 쉬다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자 또 다른 의미의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는 써먹을 놈이지만 계륵이 따로 없어.”
당태세는 문득 그가 아룡의 성품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지금이야 돈이야 술이야 달라는 대로 당태세가 제공을 해 주고 어려운 일이 없이 세상을 주유하니 별 일 없이 순후한 미청년 같아 보이지만 원 성품이 어떤 인간인지는 당태세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힘없이 누워 있을 때 아룡의 수발을 받으면서 본 아룡의 성품은 그야말로 독랄한 소인배의 전형이었다. 자신이 손해를 보게 되면 원한을 뼛속까지 박아 넣고 때를 만나면 살인도 불사하는 성품에, 오직 권세 잡은 이와 현재 대성한 사람들을 끝없이 동경하는 비루함도 지니고 있는 놈이었다.
청나라인이 되지 못했음을 뼛속깊이 후회하며 누누이 그 말을 토로하는 녀석을 같은 민족이라 하여 신뢰할 방도가 애초에 있겠는가.
당태세는 자신이 말을 잘 고르고 골라야 저 인간이 미끼로써 일을 충실히 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저 놈을 잘 움직이는 것이 이 일을 성사할 관건이겠구나.”
어차피 죽을 때가 되면 거침없이 버릴 것이라 생각하고 산동에서부터 끌고 온 녀석이었다. 일말의 정을 주고 싶어도 줄 이유가 없는 놈이었다. 가장 훌륭하고 써먹을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는 놈이 아룡이었다.
‘좋은 물건.’
이것이 아룡에게 당태세가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 당태세는 한참동안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다가 결국 며칠 전에 있었던 주루의 다툼을 생각해낼 수밖에 없었다.
“서로에게 미안하지만 조금 교활함을 부려야겠지. 내 계책도 좀 있어야 할 것이고.”
당태세는 생각이 정리되자, 조금씩 분위기를 바꾸고 분심(憤心)을 갈무리하여 심신이 정리되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아룡이 오전의 외출을 마치고 잠시 객잔에 들렀을 때에는 어딘가 심히 불편해 보이는 안색의 당태세를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숙부님. 왜 다시 안색이 그리 안 좋으십니까? 다시 옛 추억에 대한 고민이 스멀스멀 올라오십니까? 그런 걱정을 하실 때 바쁘게 나가서 노시라니까요?”
당태세는 고개를 젓더니 바로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 문제 때문이 아니다. 괜스레 억하심정이 생겨서 내가 이렇게 짜증을 내고 있구나. 미안하다.”
“억하심정은 또 무엇입니까?”
당태세가 눈을 찡그리더니 아룡을 보며 빠르게 중얼거렸다.
“네놈 그 때 술집에서 너와 시비 붙었던 그 먹물들 기억하느냐? 무슨 구봉방인지 뭔지가 지사라는 둥 어쩌고 하던 녀석들 말이다.”
아룡이 슬쩍 눈썹을 찌푸리더니만 뭔가 어렴풋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랬던 기억이 있었습죠. 네!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제가 비분강개해서 덤비는데 숙부님이 말리셨던…, 말리셨나? 하여간 그랬습죠!”
“그래, 내가 말렸다. 괜스레 네가 타지에서 욕을 먹을까 봐 주루에 있던 사람들에게 술 사주고 비위도 맞추고 했던 것인데… 이게 다시 생각하니 너무 분한 것 아니냐!”
아룡이 당태세의 말을 듣더니 역시나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주먹을 쥐더니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숙부님, 그걸 가지고 뭘 어쩌겠습니까? 어차피 술집에서 있던 일은 술집에서 끝내야지 더 길게 늘이면 안 좋은 생각만 계속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는 늘 마시던 술도 못 마시게 되는 거죠. 그냥 털털 털고 일어나시는 것도 필요합니다요.”
당태세는 눈썹을 있는 대로 쭈그러뜨렸다. 이건 당태세가 바라는 방향과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언제부터 자기가 그렇게 관대하고 후덕한 위인이었다고 저러는 것인가?
아룡은 평소 생활과 술집에서의 언동은 별개의 것으로 치부하는 것 같았다. 당태세는 아무래도 자신이 좀 더 불을 지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은근슬쩍 밀려오는 양심의 가책은 이미 눈을 질끈 감기로 마음먹은 터였다.
“하지만 그 놈들 말이다… 나중에 네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몽둥이까지 들고 우릴 쫓아오고 그러지 않았느냐? 그게 배운 인간들이 할 짓인가 말이다.”
“네? 몽둥이요? 저에게 말입니까요?”
당태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를 두 놈이 따라와서 마구 행패를 부리던 것을 기억 못하느냐? 이 늙은 몸이 무릎을 꿇고 겨우겨우 사정하여 그놈들을 돌려보냈더니만 그 때가 되어서야 네가 안심하고 대취하여 쓰러졌지.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이 안 풀리는구나.”
아룡은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 있으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은 나고 있는 게 아닌 듯한데 분명 심사는 뒤틀린 것이었다. 당태세는 옳다구나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계속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무리 우리가 당한 일을 술자리에서 겪은 일이라 치부한다지만… 어찌 이 대청(大靑)의 하늘 아래 살면서 그런 방약무도한 소리를 듣고 있었어야 하는 것이냐? 너나 나나 우리 모두 황상의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더냐?”
당태세는 속으로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소리를 내뱉고는 스스로 겸연쩍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소리를 들은 아룡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민 듯 고개를 들고 턱을 앞으로 불쑥 내밀더니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불길이 이는 눈을 번득거렸다.
“대청의 은혜.”
“그래, 어찌 우리가 아무리 술을 먹는다 해도 그런 말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당태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분노에 찬 아룡의 일갈이 떨어졌다.
“이놈들… 아무리 취중이라지만 어찌 그런 금수 같은 소리를 한단 말인가! 네 이놈들을 그냥!”
“아니다! 무두리! 네 말마따나 이것은 취중의 문제니 우리가 눈 딱 감으면 그만이다!”
“아닙니다! 잘 말씀하신 겁니다! 어찌 이런 일을 묵과하면서 청의 충신이라 칭하겠습니까? 그런 놈들이 술이 안 들어간 멀쩡한 때에 명명백백하게 진실을 밝혀줘야 그런 가증스러운 짓을 다시는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 이봐라 아료….”
이미 당태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룡은 입었던 옷을 그대로 걸치고는 냅다 객잔의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늙은 객잔주인이 아룡과 당태세를 힐끗 쳐다보며 인상을 쓰는데 당태세 역시 목괴를 집어 들며 뛰어나가는 아룡의 뒤를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허허 저렇게 성미가 급해서야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내 저 아이의 훈육을 맡았건만 이렇게 일이 진척이 없다니…….”
객잔주인이 인상을 더욱 굳히며 슬쩍 몸을 피하는데 당태세는 객잔을 천천히 빠져나오자마자 발과 목괴에 힘을 주고 아룡이 움직인 길을 따라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내가의 고수가 전력질주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평범한 사람이 뛰어가는 속도와는 진배없는 빠르기로 절뚝발이 영감이 골목을 나는 듯 움직였다. 당태세는 금세 숨이 가빠오고 오른 다리가 저려왔다. 그리고 왼손목과 겨드랑이도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아룡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구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떤 식으로 반응하느냐에 따라 당태세의 처신이 달라지고 그가 쓸 수 있는 수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룡이 예의 북문 앞의 술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직 그 문사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 때였다. 당태세는 북문 주루가 보이는 골목 끝에서 행여나 들킬 새라 몸을 사린 채 눈을 부라리고 사방을 훑어보던 아룡이 자리에 앉아 술을 시키는 장면을 조심스레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당태세를 불러 세웠다.
“어이! 이보시오. 노인!”
당태세가 뒤를 돌아보자 녹영군의 제복을 입은 군사 하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저 말씀입니까요?”
“그렇소. 당신 말이오. 지금 바로 뒤에서 수인(囚人)들이 노역을 하는 게 안 보이오?”
당태세는 그제야 자신의 뒤에 있는 성벽 위에서 사내들이 힘겹게 돌을 지고 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룡이 객잔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불촉(不觸)에 불문(不問)이라.
당태세는 슬쩍 고개를 군사에게 숙이면서 자리를 피해 저 멀리 아룡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기 위해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당태세의 눈에 한 껑충한 키의 죄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당태세와 백보 정도 떨어진 곳에서 성벽의 귀퉁이를 잡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성문의 맨 위에 총루를 내는 작업을 거들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당태세의 눈에 들어 온 것은 그 죄수의 일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 죄수의 신색이었다.
학처럼 훤칠하니 건장한 체구의 죄인은 넓은 어깨를 앞으로 움츠린 채 오직 돌멩이만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당태세는 그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석장, 황충수?”
잠시 위 눈이 휘둥그레진 당태세의 입에서는 신음과 같은 혼잣말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