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35화 (35/226)

35. 하남 개봉부(8)

당태세의 몸이 슬쩍 구부려지는 것과 동시에 박도를 들고 있던 사내 둘도 같이 몸을 움직였다. 커다란 박도는 긴 호선을 그리며 양쪽에서 당태세를 노리고 떨어졌다.

흑풍방도들은 손속이 가차 없었다.

단도도 아닌 박도를 휘두른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이겠다는 신념이 가득 차 있는 자들이었고 노인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만 봐도 남녀노소 불문하고 인정사정 보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바꿔 말하면 방회에 대한 충심이 절대적인 것으로 봐도 무방하였다.

당태세는 슬쩍 목괴를 들어 우측에서 들어오는 박도를 막으며 몸을 돌려 젊은이의 어깨를 움켜쥐고 왼쪽으로 내던졌다. 오른다리에 찌릿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젊은이의 중심이 무너지며 뒤로 물러서며 비틀대는 사이 당태세의 몸이 앞으로 한발 더 나가며 목괴를 잡지 않은 오른쪽 팔꿈치를 굽혀 그대로 젊은 도수의 갈빗대를 올려쳤다.

와직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졌다. 칼을 채 거두지 못한 왼쪽의 도수는 눈이 왕방울만 해지더니 이내 이를 드러내고 박도를 팔랑개비처럼 휘두르며 당태세를 토막 낼 기세로 달려들었다.

당태세는 순간 눈살을 찌푸리더니 들어오는 박도의 끝을 가볍게 목괴의 손잡이로 퉁겨 올리고 사내의 품 안으로 안기듯 달려들었다. 젊은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대로 초식을 운용해도 못 이길 놈이.”

당태세의 손이 젊은이의 가슴팍에서 보이지도 않게 움직이자 가죽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땡그랑 소리와 함께 박도가 손에서 떨어지고 젊은이가 하얗게 탈색된 채 그대로 모로 쓰러졌다.

“어디서 분을 못 이기고 칼을 제멋대로 휘둘러?”

이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한 문각은 다리가 풀렸는지 삿대를 가랑이 사이에 끼고 거룻배에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당태세가 그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넋 나간 표정이 되어 비실비실 배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앞장서라.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너도 저 꼴이 날 테니.”

“네… 대인.”

두 사람은 다리 위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 허름한 민가들이 잔뜩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작은 대문들이 하나씩 붙어있는 가옥들은 하나같이 빗장이라도 안에서 걸어놓은 듯 열릴 낌새가 보이지 않았고, 파란색 단청이 옅게 칠해져 있는 집의 문만 슬쩍 안쪽으로 열려 있는 것을 보아하니 저 곳이 흑풍방의 입구인 모양이었다.

당태세가 문각에게 눈을 부라리자 문각은 입술을 혀로 핥더니만 살짝 열린 문을 밀고 안으로 한발을 집어넣었다. 그때였다.

“너는 누구냐?”

문 뒤에서 새하얀 칼날이 나오며 문각의 목에 얹혔다. 문각은 마치 해를 보는 장닭 모양으로 고개가 뻣뻣이 들린 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컥컥대는데 문 뒤에서 그에게 칼을 겨누었던 흑풍방도가 문각을 유심히 보더니만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누구야. 문각 아닌가? 빌어먹을 하오문 부스러기가 여긴 왜 왔느냐?”

“아… 소군. 소군이구나! 이 칼 좀 치워다우. 내가 손님을 모셔왔다!”

“손님? 네가 무슨 손님을 끌고 와?”

“제발… 이 칼 좀 치우게. 내가 흑풍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허, 네가 우리 동류냐 친구냐? 어디서 함부로 말을 놔?”

뒤에서 물끄러미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당태세는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목괴를 받치고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던 소군이라는 흑풍방도가 당태세의 모습을 보며 눈을 찌푸리고는 문각을 내팽개치고 당태세 앞을 막았다.

“어이, 절름발이 영감. 댁이 문각이 말한 그 손님인가?”

“예를 갖춰라. 꼬마야. 흑풍방주를 뵈러 왔다.”

흑풍방도 소문이 히죽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원, 구봉방 놈들이 개봉 물을 완전히 버려놨구나. 개나 소나 거지나 아무나 흑풍방 문을 두드리려고 작정을 했어?”

소문이 쓱 하니 칼을 당태세 목 앞으로 뻗는 순간 당태세의 목괴가 땅에 퉁기더니만 휘릭 소문의 칼 든 팔을 휘감아 어깻죽지 뒤로 죽 넘겨 버렸다. 소문의 팔이 마치 빨래 장대에 널린 빨래처럼 휙 위로 들리면서 허수아비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소문이 고개를 훽 돌리며 당태세를 노려보자 당태세는 혀를 차며 젊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무공이라고는 내 쓸모없는 종자(從者)놈처럼 형편없는데….”

당태세의 비어있던 오른손이 휙 올라가더니 소문의 턱을 아래에서 위로 강타했다. 소문은 손 하나 쓸 틈도 없이 그대로 고개가 뒤로 젖혀지더니만 눈이 뒤로 넘어가며 그 자리에 구겨진 빨래처럼 고꾸라지고 말았다.

“…객기 하나는 상승장군(常勝將軍)이로구먼.”

“대인! 여기서 흑풍방도를 죽이시면 안 됩니다! 이 안에는 흑풍방도로 가득하다고요!”

“안 죽었어. 빨리 길이나 안내해라.”

이제 문각은 그저 당태세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문각이 허위허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며 손을 휘휘 내 젓고 뒤를 가리키며 연신 뭐라뭐라 다급하게 이야기하니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나와 당태세의 옆으로 돌아갔다.

몰려나온 흑풍방도들은 하나같이 변발을 하지 아니하고 손에 큼지막한 칼을 들었으니, 이들은 청(淸)의 법도를 아예 무시하고 살아가는 족속이었다.

청의 변발령은 그 집행이 엄혹하여, 머리를 밀지 않으면 머리를 잘라가는 혹령(酷令)이거늘, 이들은 누구 하나 머리를 밀고 있지 않았다. 그만큼 이들은 변발을 한 회색머리를 나부끼며 걸어가는 당태세에게 증오 가득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새 당태세는 사람들에게 빙 둘러싸인 채 작은 원을 만들어가며 앞으로 전진 하는 중이었다. 작은 대문과 정원을 지나고 크고 작은 전각들을 스쳐 지나가기를 몇 차례.

앞에서 그를 둘러싸던 흑풍방도들이 옆으로 우르르 빠져나가자 당태세의 앞에는 향이 피어오르는 관성대제의 상이 놓여 있었고, 그 옆 놓인 작은 나무 의자 위에 치렁치렁 흑발을 양 갈래로 땋아 넘긴 짙은 턱수염의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노사께서 나를 보자고 하셨소?”

사내의 눈은 깊었고 힘이 가득해 보였다. 태도 또한 경계를 갖추고도 정중함이 있었으니 가히 한 무리의 수장이 될법해 보였다. 첫 인상이 그럴듯하다 여긴 당태세는 두 손을 모아 읍을 하고 정중하게 말을 나누었다.

“이 몸은 산동의 당가로, 구원(舊怨)을 잊지 못해 흑풍방의 힘을 빌리고자 이 자리에 온 것이외다.”

“구원이라… 우리 흑풍방은 그런 일에 따로 힘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오.”

“나만의 원한은 아닐 것이오. 구봉방이 개봉에 자리를 잡은 지 이미 십년은 훌쩍 지났을 것이니.”

사내의 눈초리가 당태세를 빤히 훑어보더니 천천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노사의 구원이 구봉방이라 이거요?”

“정확히는 구봉방주 오자평이오. 그놈의 목을 받고 싶소이다만.”

당태세의 말에 사내는 코웃음을 치며 앞에 놓인 술병을 만지작거렸다. 주변에 모여 있는 흑풍방도들은 일절 말이 없었으니, 이 조직의 계율은 군진보다 공고해보였다. 흑풍방주가 어떤 식으로 흑풍방을 장악하고 관리하는 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내가 구봉방에 안 좋은 감정이 있긴 하오. 아니, 개봉의 토박이 방회는 모두 그놈들에게 원한이 있지. 하지만 노사께서 굳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 모르겠소.”

“다른 곳들도 이미 들려봤소.”

당태세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돼지새끼 같은 곽회주는 아예 돈 외에는 모르는 잡놈이었고, 숭호방은 이미 당해서 파방 됐더군. 이방주는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지경이었소. 남은 곳은 오직 이곳 하나 아니겠소?”

“돼지새끼 곽회주라. 그 말은 맘에 드는군.”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음인지 분노인지 모를 표정을 짓더니 술병을 열고 술을 따랐다. 사내는 술잔에 가득 찬 백주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숭호방이 보름 전에 당한 이야기는 나도 알고 있소이다. 팔익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한꺼번에 들이쳐 숭호방주를 그렇게 만들었다지. 그 다음 차례는 우리 흑풍방이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소.”

“그런데 왜 가만히 있는 거요?”

당태세의 말을 듣던 흑풍방주는 눈썹 사이에 내 천(川)자 주름을 그리더니만 주먹을 불끈 쥐고는 이를 악물었다. 당태세를 올려다보는 사내의 눈매는 마치 갈 곳을 잃은 들짐승과 같았다.

“우리가 들이칠 명분이 없단 말이오. 우리가 개봉을 대표하는 정파도 아니고 개봉 팔십방회 중의 하나일 뿐이오. 숭호방은 구봉방이 예전부터 하고 있는 전당(典當) 지분을 요구하다 그런 일이 생긴 거요. 그건 그 둘의 일이니 내가 어떻게 복수를 해준다 어쩐다 말할 게재가 아니지. 게다가…….”

흑풍방주는 술잔을 입에 털어 넣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꽤나 독한 독주 같았다.

“숭호방이 파방된 이유는 아시오?”

“음?”

“녹영군이 한밤중에 들이닥쳤소! 숭호방 이방주가 쓰러져 경황이 없는 새에 녹영군이 숭호방의 방도들을 싹 쓸어갔지. 태반은 죽거나 성터로 끌려갔을 거외다. 구봉방은 녹영군과 선이 닿아있단 말이외다.”

당태세는 구봉방의 작은 대문과 그 안으로 대오를 맞춰 들어가던 녹영군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세력 확장에 군(軍)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 확실해보였다.

결국, 주루의 문사들은 겉가죽만 봤을 뿐 속의 골수까지 보는 눈은 없었던 게 틀림없었다. 당태세가 눈살을 찌푸리자 흑풍방주도 당태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 방도가 없소이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개봉에서 쓸려나갈 판이거든. 게다가 우리들을 보시오. 우린 청(淸)이라면 이를 갈고 있소. 그런 우리를 녹영군이 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소?”

당태세는 물끄러미 흑풍방주의 땋아 내린 머리를 바라보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흑풍방주의 앞에 의자를 끌고 가 앉았다.

흑풍방주의 뒤에 서 있던 방도들이 웅성대며 한발 앞으로 나오려는 찰나, 흑풍방주의 손이 위로 들렸다. 순간 들끓던 좌중이 모두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그렇다고 이대로 앉아서 당할손가?”

당태세의 말에 흑풍방주가 씩 웃음을 지어보였다.

“죽기 전에는 싸우겠지. 하지만 그 때가 지금은 아니라는 거요. 어디서 왔는지 모를 노인 하나 때문에 방회가 거사를 치를 수 있겠소?”

“어찌하면 그 때를 앞당길 수 있겠소?”

당태세의 눈이 차가운 빛을 발하였다. 그를 본 흑풍방주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역시나 사나운 눈매를 거두지 않고 당태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노사께서 억만금을 가지고 있어 우리를 사족처럼 부릴 수 있으시거나, 구봉방의 팔익 모가지를 몇 개 가져오시거나! 그도 아니면 개봉의 전 방회가 공감할 수 있을 대의명분을 만들어 오거나! 이 셋 중 하나를 충족시켜준다면 우리도 굳이 발을 빼지 않겠소이다.”

“셋 중 하나라 이거요?”

“그렇소이다.”

흑풍방주의 눈을 노려보던 당태세의 고개가 크게 끄덕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뭘 더 고민하랴!”

노인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이더니 탁자 위의 술병을 낚아채고 흑풍방주가 마셨던 술잔 가득 술을 따랐다. 당태세의 입이 열렸다.

“내 그대를 전장으로 부르겠소.”

당태세는 따른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흑풍방주가 눈을 끔벅이더니만 당태세를 바라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같이 몸을 일으켰다.

“흑풍방도는 모두 물렀거라! 노대협이 자리를 떠나신다!”

흑풍방주의 일성(一聲)과 함께 모여 있던 흑풍방도들이 일시에 양 옆으로 갈라지며 당태세에게 길을 터주었다. 목괴를 짚고 뚜벅뚜벅 앞으로 나가는 당태세를 팔짱을 끼고 바라보던 흑풍방주의 얼굴도 처음과 달리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낯빛이었다.

노인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흑풍방주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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