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하남 개봉부(6)
당태세의 말에 주루는 어느새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탈바꿈해 있었다.
주변에 있는 방회의 인물들 역시 웃으며 술잔을 하나씩 기울이고 당태세의 건강을 위해 축배까지 들어주었다. 당태세는 히죽 웃으면서 제 자리로 돌아와 술잔을 기울였다.
지금까지 이런 당태세의 모습을 보고 있던 술 취한 사내와 그 텁석부리 동료가 당태세를 보며 찬사를 보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일순간에 분쟁을 끝내시고 화목을 이루었으니, 가히 옛 고사에 나오는 영웅담의 한 구석을 보는 듯합니다!”
“허허, 그 무슨 과찬이시오. 그저 오래 산 보람이겠지.”
“아닙니다. 노사께선 그야말로 세치 혀로 사람을 쥐락펴락 하시니 어찌 영웅이 아니겠습니까?”
“허허, 내가 영웅이라니! 이 송나라 시절부터 명성이 자자한 개봉부에 어찌 내가 영웅대접을 받겠소이까? 진정한 호걸은 이곳에 있겠지요!”
당태세는 슬쩍 주루 밖에 펼쳐진 깃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였다.
“내 두 분의 말을 들어보니 저런 소인배의 깃발 말고 진정한 영웅호걸이 이 개봉부의 깊숙한 곳에 있는 듯 하외다. 그런 분들에게 제가 받는 상찬을 돌려야 하지 않겠소이까?”
당태세의 말을 들은 술 취한 사내가 물끄러미 당태세와 깃발을 번갈아 보더니만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말씀 잘 하셨습니다. 개봉부의 영웅을 논하려면 곽가회의 곽회주나 숭호방의 이방주, 그리고 흑풍방의 백방주 정도를 논해야 하겠지요.”
“그 세 사람이 개봉부를 대표하는 분들이시오?”
당태세의 말에 취한 사내의 텁석부리 동무가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곽가회의 곽회주는 씀씀이가 호탕하고, 숭호방의 이방주와 흑풍방주는 일신의 무예가 상당하지요. 적어도 이 셋은 구봉방 같은 놈들과 같이 비교하시면 안 됩니다.”
당태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그가 듣고 싶어 하던 말들이 사내들의 입을 통해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슬쩍 당태세는 취기가 오르는 척 고개를 까닥이며 혀가 꼬이는 듯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거 참 아쉽도다. 내 그런 분들을 한 번만 만날 수 있다면 만금도 아깝지 않을 것인데…내 일생에 그런 호걸을 한 번 만나는 게 소원인데 말이오….”
“노사, 실로 그런 분을 뵙고 싶으십니까?”
“아, 만날 수만 있다면 만금이 아깝겠소?”
술 취한 사내와 그 친구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텁석부리 사내가 당태세를 보며 소리를 죽여 말하였다.
“노사께서 생각만 있으시면 굳이 뵙는 것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단지 저희도 그냥 뵙게 해 드릴 수는 없고 약간의 여비만 챙겨 주신다면야…….”
당태세가 취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일 내가 묵고 있는 객잔으로 오시오! 내일 아침 일찍 여비를 마련해서 같이 가 봅시다! 여행이란 게 무엇인가? 좋은 것을 보고 훌륭한 이를 만나 내 지경을 넓히는 것이 목적 아닌가!”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대인!”
두 사내가 당태세를 보며 두 손을 맞잡자 당태세도 껄껄 웃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쾌재를 부른 것은 두 사내가 아니라 당태세였다. 실로 막다른 골목에서 샛길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당태세가 어찌어찌 반은 정신이 나가고 반은 술에 먹힌 채 걸어가는 아룡과 함께 객잔을 향한 것은 그로부터도 한 시진은 지난 뒤의 일이었다.
아룡은 용케도 넘어지지 않고 자신이 짐을 푼 객잔을 향해 갈지자를 그리며 찾아가는 중이었는데 대취하였어도 집을 찾는 재주 하나는 용해 보였다. 그를 보며 또각또각 목괴를 짚고 가는 당태세의 머릿속은 아무리 술을 마셨어도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구봉방을 찾으려면 지역의 방회 말고는 답이 없을 것인데…….”
그때였다. 당태세는 고개를 불쑥 내밀고 사방을 보다가 아룡이 가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어두운 골목으로 아룡이 몸을 넣는 순간 그 옆에서 두 명의 사내가 그림자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당태세의 눈에 들어왔다.
두 사내의 손에는 이미 번쩍이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일의 선후를 따질 새가 없었다. 당태세의 오른발이 앞으로 미끄러지며 목괴가 한 사내의 발을 걸고, 또 한 사내의 몸뚱이는 그대로 오른손으로 밀어젖히며 아룡을 구해냈다.
다행스럽게도 살수(殺手)들은 당태세의 몸짓 하나에 그대로 뒤로 넘어져 버렸고, 아룡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그대로 비틀비틀 객잔을 향해 걸어갔다. 당태세는 자세를 바로잡고는 뒤로 돌아 쓰러진 사내들을 보며 조용히 말하였다.
“술자리에서 있던 일을 마음에 담지 마시오. 그대들은 붓을 잡는 이들이지 칼을 잡는 이들이 아닐 텐데.”
“……노사는 저희가 누구인지 아셨습니까?”
쓰러진 채 칼을 떨군 이들은 다름 아닌 아룡이 시비를 걸었던 문사들이었다. 당태세는 그들을 바라보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이심전심이요. 돌아가 주시오.”
두 문사는 주저앉은 채로 잠시 움직이지 않다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슬쩍 칼을 줍고는 두 손을 모은 채 당태세에세 고개를 숙였다.
“잠시의 격분으로 인생을 망칠 뻔 하였습니다. 노사. 참으로 감사드리옵니다.”
“두 분 모두 현명하시오.”
당태세 역시 점잖은 태도로 두 손을 맞잡고 그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두 문사는 홀가분한 모습으로 당태세가 걸어온 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두 사람이 반대편의 어둠속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당태세는 한숨을 허공에 내쉬었다.
“어렵구만.”
노인은 술을 마셔도 취한 것 같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아룡과 함께 늦게까지 잠을 청하던 당태세 앞에 객잔주인이 문을 두드리며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아침 일찍부터 노사를 찾는 사내 둘이 밖에 있습니다. 헌데…….”
인상을 찌푸리던 늙은 객잔주인은 당태세의 눈치를 보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둘은 제가 알기로 그리 품성이 좋은 이들이 아닙니다. 대인, 어제 혹시 무슨 욕보신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저 제가 어제 길에서 만난 이들인데 뭘 물어볼 게 있어서 오늘 만나자 한 것이지요. 별 일 없었습니다.”
객잔주인의 표정이 진중하니 심각해졌다.
“대인, 조심하십시오. 같은 해 아래 걷는다고 모두 밝은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아닙니다. 군자는 스스로 몸을 사리는 법입니다. 괜스레 위험한 곳에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객잔주인의 말은 손님에게 하는 것이라기에는 진심이 담겨 절절하기 그지없었다. 당태세도 고개를 끄덕이고 무겁게 말을 받았다.
“주인장의 말을 내 새겨듣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만나자 말을 뱉었는데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약속을 파하면 그 또한 사람이 할 일은 아니지요.”
당태세가 목괴를 짚고 천천히 자리를 옮기자 객잔주인은 할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더니 허탈한 표정으로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늙은 객잔주인은 코를 골고 있는 아룡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공자가 일어나면 어디로 갔는지 여쭤볼까요?”
“아닙니다. 저 녀석이 깨기 전에는 돌아오겠지요.”
당태세가 객잔 문을 나설 때까지 객잔주인은 난간을 잡고 말없이 절름발이 노인이 나가는 모양새를 보고 있었다.
***
당태세를 만난 두 사람은 어제와는 달리 신수가 멀쩡해 보였다. 늘 술에 취해 있던 사내는 깔끔하게 콧수염과 턱수염을 가다듬었고, 그 옆의 텁석부리 동료는 자라난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면도하고 변발을 정리까지 해 두었다.
두 사람은 당태세가 나오자 반색하여 앞장서서 개봉부의 남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당태세가 엊그제 다닌 길이 남서와 북향이었던 반면, 이 두 사람은 당태세를 이끌고 남동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이곳은 물길이 발달한 곳이었다.
원래 개봉은 남쪽의 소항과 맞먹는 수향(水鄕)이라. 사방에 운하가 뚫려 있어 조운의 위치가 원활하여 그것으로 도시의 산물이 이동하였다. 산업의 발달에는 무척 요긴하였지만 수공(水攻)과 홍수에는 취약하기 그지없었으니 대대로 개봉부가 침략을 당해 성이 함락될 시에는 물로 인해 성벽이 무너지는 게 상례였다.
지금 당태세는 그런 운하 중 하나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이리 오시오.”
앞장 선 텁석부리 사내가 당태세를 인도하여 간 곳은 커다란 다리와 성벽 아래의 공간이었는데, 그곳에는 작은 거룻배 하나가 놓여 있었다. 주변이 적막하고 사람의 눈길이 닿는 곳은 오직 당태세 일행이 걸어 들어온 계단 외에는 없었으니 완벽하게 시야가 가려지는 곳이기도 하였다.
“허어, 개봉에 이런 곳도 있었구먼.”
당태세가 감탄을 하고 있는 사이, 두 사내가 천천히 당태세의 앞뒤를 감싸고돌았다. 당태세는 슬쩍 그들을 보더니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게요? 영웅호걸을 뵈러간다 하지 않았소이까?”
“영웅호걸 같은 소리 하네. 늙은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가?”
“네?”
“당장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내놓아라. 챙겨온 돈이 있으렷다?”
텁석부리 사내가 말하자 당태세가 그를 보며 당황하여 말했다.
“그건 그… 회주인지 방주인지를 만나게 해줘야 줄 거 아니오?”
콧수염 사내가 껄껄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 늙은아! 그분들이 너를 만나주겠다 더냐? 천금을 가져가도 못 만날 분이니, 네 놈은 이 운하 아래의 하신(河神)이나 만나 뵙거라!”
말을 마친 콧수염 사내의 손이 품안에서 단도를 뽑아내었다. 당태세가 사내의 칼을 보고 사내의 얼굴을 보더니 눈을 질끈 감고 하늘을 향해 탄식을 내뱉었다.
“오호라. 통재로다! 말세로구나!”
“허허허, 이 늙은이! 이제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지?”
“왜 이리 멍청한 것들이 세상을 떠도는가?”
“뭐?”
순간 당태세의 몸이 슬쩍 앞으로 기우는가 싶더니만 우수(右手)가 보이지도 않게 앞으로 채찍처럼 뻗어 나가며 콧수염의 아랫배를 장(掌)으로 쳐버렸다. 짝하는 소리가 다리 아래에서 날카롭게 맴도는 것과 동시에 콧수염 사내가 무릎을 풀썩 꿇었다.
당태세의 뒤에 서 있던 텁석부리 사내가 눈이 둥그레진 채 당태세와 쓰러진 동료를 보고 있는데 당태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텁석부리를 돌아보았다.
“곽가회의 곽회주. 숭호방의 이방주, 흑풍방의 백방주.”
“뭐… 뭐?”
“아느냐 모르느냐?”
“이… 이 늙은이가 무슨 말을…….”
“모르면 너도 네 친구를 따라 하신(河神)에게 갈 것이다.”
순간, 무릎을 꿇고 배를 움켜쥐고 있던 콧수염 사내의 입과 코에서 피가 와락 솟구쳐 올랐다. 텁석부리 사내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피를 끝없이 토하던 콧수염 사내는 몸을 민달팽이처럼 구부리는가 싶더니만 그대로 머리를 떨구고는 운하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첨벙하는 물소리가 짧게 들렸다.
“아는지 모르는지 답하라 하였어.”
“다… 당신… 누구….”
“모르느냐?”
당태세가 목괴를 짚고 앞으로 다가오려는 찰나, 텁석부리 사내가 무릎을 꿇더니만 두 손을 번쩍 위로 치켜 올렸다.
“압니다! 알아요! 아니까 제발 죽이지 마십시오! 노사! 대인! 대형! 대협!”
빤히 사내를 쳐다보던 당태세의 눈은 어둠 속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어디 있는지 안다면 어서 나를 그리 안내해라.”
“당태세의 입술 사이로 이가 번득였다.
“나는 성격이 느긋하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