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하남 개봉부(5)
소리를 지르며 일어난 사람은 아직 청년의 티를 못 벗어난 장년의 사내인데 푸른 도포를 두르고 검은 유건을 쓴 것이 전형적인 문사의 모습이었다. 행색도 몸이 비쩍 말라 붓을 쥐고 시를 쓰는 것 외에는 제대로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허나 오히려 그 안색은 붉게 상기 된 채 수염을 바르르 떨면서 술 취한 사내와 당태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재판석의 판관인 듯 준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이 주루에 매일 오다시피하며 사람들의 흰소리를 듣는 것도 일상이다! 내 지금까지 술 취한 자의 옅은 소리라 생각하여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제 말은 바로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여 이렇게 자리에 섰다. 구봉방이 외인인 것은 맞고 저 앞에서 공사를 벌여 개봉민들 대신 이문을 취하는 것도 알지만 어찌 그 일만을 가지고 그들을 평하는가!”
“얼씨구? 지금 우리에게 시비를 거는 게냐?”
텁석부리 옆에 앉아있던 사내가 슬쩍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문사를 바라보았다.
주먹 크기나 어깨 벌어진 것으로 보나 이 사내가 일어서서 주먹으로 한번 치기라도 하면 저 유건의 사내는 곡소리도 못 내고 그대로 혼절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유건 사내는 그런 위험쯤은 감수하겠다는 듯 사내를 바로 보며 허리에 손을 얹고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
“허, 그대가 개봉 토박이라면 알 것이네. 누가 개봉성의 중건을 할 때 수공으로 죽은 수비대와 명(明)의 군인들 제사를 지내 주었는가? 그리고 산해관에서 죽은 장졸들의 집에 돈을 대 준 것은 누구인가? 청의 팔기(八旗)들이 이 성으로 들어와 성민들을 괴롭힐 때 누가 그들의 방패가 되어주며 여식들이 청나라의 노리개가 되는 것을 막아 주었던가?”
“뭐?”
“그게 다 구봉방의 구봉방주께서 한 일 아닌가? 그것뿐인가? 우리 같은 묵객(墨客)이 여전히 비분강개하여 십오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옛 나라의 향취를 잊지 못하여 울고 있을 때 우리의 시를 사고 우리에게 술 한 잔을 준 이는 오직 구봉방주 하나뿐이라! 비록 그가 지금 청인들의 명으로 성을 쌓고 있지만 그는 옛 개봉부의 성곽을 복원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어찌하여 그런 이들을 폄하하느냐?”
당태세는 인상을 쓰며 문인이 이야기하는 것을 유심히 듣고 있었다.
기분이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구봉방은 개봉부에서 옛 명(明)을 그리워하는 이들을 위해 인심을 쓰고 있다는 말 아니던가. 그와 함께 석장(石匠) 황충수가 한 말이 동시에 문인의 입에서 나온 말과 함께 겹쳐졌다.
-그들은 지사입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지사라니! 지사라니! 황성을 지키자고 천지신명에게 맹세를 해놓고 뒤에서 칼을 꽂고 이자성을 따라간 배역도당주제에 지사라니!
당태세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도 머릿속 한가운데에서는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만약 구봉방주가 실제로 그동안 저지른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고 진심으로 명의 복권을 위한 행동을 하고 있다면 그 때에는 어찌 될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당태세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술 취한 듯 늘어져 있던 텁석부리가 문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앉아 있다가 손가락질을 하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허! 돈이 있으면 무슨 허장성세인들 못하겠느냐! 구봉방이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서 사당도 짓고 과부를 도와주고 시인들의 고충을 알아주는 듯 팔기와 붙어먹고 연극을 하는 건지 네가 어찌 안다는 말이냐? 엉?”
“뭐, 연극이라고? 네가 지금 모르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거다!”
문사가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불끈 쥐자 텁석부리가 껄껄 웃으며 손가락질을 했다.
“허허! 넌 그럼 뭘 알고 있느냐? 뭘 알기에 그렇게 잘난 척 중얼대느냐?”
문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술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화급하게 문사의 옷자락을 잡으며 자리에 앉히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텁석부리를 보고 있던 문사는 도저히 심화(心火)를 억누를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팔기와 황실에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관에 끌려가기 전에 그들을 돕지 않느냐!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을 왜 무시하느냐! 저 외지에서 온 이들이 모두 성을 쌓기 위해서 온 것이라 보느냐! 저들 중에는….”
순간,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사내 하나가 벌떡 일어나 문사의 입을 손바닥으로 세게 후려치더니만 어깨를 잡고 주저앉혔다. 사내는 주변을 살펴보며 작지만 힘 있는 소리로 외쳤다.
“어허! 이 사람 왜 이리 말이 많은가! 이곳이 자네 집인가!”
순식간에 주점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텁석부리 사내도, 입을 얹어 맞은 문사는 물론이고 주변 탁자에 앉아 이 장면을 관망하던 사람들 역시 눈알을 좌우로 돌리며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당태세 역시 말을 잊은 채 이 괴이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당태세의 머릿속은 혼란의 극을 달리는 중이었다. 구봉방의 앞에서 목격한 황충수와 같아 보이는 사내의 뒷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점점 의문이 들었다.
그때였다.
“이것 봐라! 지금 네가 역적을 두둔하는 것이냐?”
순간, 앞자리에서 우레와 같은 호통소리가 나더니만 탁자 하나가 엎어졌다. 당태세의 질문을 듣고 있던 사내 둘의 고개가 동시에 뒤로 돌아갔다. 당태세도 눈을 크게 뜬 채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 훤칠한 청년 하나가 다른 탁자에 앉아있는 사내들을 제치고 저벅저벅 걸어와 문인들의 탁자 앞으로 다가가더니 멱살이라도 잡을 듯 시비를 걸고 있지 않은가.
“지금 네 놈이 우리 대청(大靑)의 안위를 위협하는 말을 한 것이렷다?”
청년은 이미 비틀대며 술에 취할 대로 취해 보였는데 그 앞에 있던 사내들은 하나같이 인상을 구기며 그 청년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순간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깨물었다.
그 사내는 다름 아닌 아룡이었다.
“아니, 내가 술 먹고 귀가 어두워졌기로 뭔가 못들을 말을 들은 것 같아 일어섰노라. 대체 이곳은 무엇이냐? 역적들의 모임이냐! 개봉부 사람들은 술 먹으면 반역모의를 하는 게냐?”
“허, 이보시오. 거 무슨 말을 그리 험하게 하시는 게요? 우리가 술에 취해 잠시 이성을 잃은 것뿐이오.”
탁자에 앉아있던 다른 문사가 점잖게 아룡을 달랬지만 아룡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아룡은 혀가 꼬이고 다리가 풀린 것으로 봐서 마실 만큼 마신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용케 쓰러지지 않고 사내들의 말꼬리를 붙잡고 있었다.
“지금 내 분명히… 황실에 우호적이지 않은 이들을 돕는다… 뭐 이렇게 이야기가 나온 것을 들었는데?”
“허, 취했으면 그냥 들어가시오. 조용히 있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판을 키우는 게요?”
“뭐? 판을 키워? 해보자는 거냐? 오냐…이 무두리님이 너희들 개봉부의 인간들 처음부터 맘에 안 들었다 이거다! 이 역적 놈들! 고얀 놈들! 우리 황제폐하의 위광에 흠집을 내는 것들! 내가 이렇게 유유자적 살아도 나도 한 때 산동에서는 날리던 사람이었다 이거야! 한번 내 실력을 볼 테냐?”
아룡은 술집 안에 있는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려고 작정한 듯싶었다. 이게 아룡의 주사라면 지금까지 주루에서 제 발로 살아서 객잔까지 기어들어온 게 용할 정도였다.
순간 발이 꼬여 휘청하던 아룡이 한 바퀴를 맴돌더니만 풀썩 뒤로 돌아 당태세가 있는 탁자 위에 손을 턱하니 짚었다. 아룡과 당태세의 눈이 마주쳤다. 아룡의 대취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 숙부님! 이거…다 보고 계셨습니까! 잘 되었습니다! 이 무두리가! 어떤 놈인지! 이 놈들에게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이런 젠장.”
당태세의 입에서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어느새 아룡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내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 뒤였다. 술을 마시러 들어왔던 성벽 일꾼들은 하나둘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루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토박이들도 그냥 술을 마시러 온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주루 안에 남아있는 이들은 모두 개봉의 하오문이나 방회의 사람들일 것이었다.
당태세는 아룡이 앞에서 비틀대고 사람들이 다가오는 황망한 와중에도 슬쩍 인파를 둘러보았다. 못해도 열두서넛은 되어 보였다.
혼자 빠져나가는 일이라면 가능할 것이고, 정 안되면 이정도 인파는 벽을 지고 다 때려눕힐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 아닌가.
아룡을 버리고 가면 조만간 객잔까지 쫓아올 것이고, 싸움질을 하게 되면 조만간 구봉방에서도 소문이 들어갈 터였다. 당태세는 인상을 쓰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룡 이 녀석이 결국 일을 복잡하게 얽어버린 탓이었다.
“이보시오들, 거기 맘 상하신 분들은 노여움을 푸시오.”
당태세는 일부로 목괴에 몸을 싣고 휘청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발이 불편한 노인이 비틀대며 아룡과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자 슬쩍 인상을 풀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이들이 보였다. 당태세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이놈이 원래 주사가 있어 사람들 사이에서 늘 말썽이 있습니다. 제 낯을 봐서라도 한번 없던 일로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다리를 저는 노인이 주루 가운데로 나와 사람들에게 사정을 하자 분위기가 수그러들었다.
“어어,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숙부! 전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없다고요!”
“네 이놈! 무슨 소리냐! 이 많은 이들이 다 네게 잘못했다는 말이냐? 한 사람이면 몰라도 이 많은 이들에게 공분을 사면 안 되느니!”
당태세의 말에 아룡은 시무룩하니 털썩 상에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는데 그 모습을 보던 사내 하나가 뒤에서 당태세를 두둔하였다.
“그래도 숙부가 조카보다는 예의가 있구먼?”
당태세는 이때가 기회다 싶었다.
“이번 한번만 기회를 주시오! 내가 이 녀석의 죄를 보상하는 뜻에서 여기 계신 대협들에게 모두 술 한 잔씩 돌리겠소이다!”
당태세가 두 손을 맞잡고 목소리를 높이자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졌다. 사람들은 술상을 두드리며 껄껄대며 웃는데 언제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었냐는 듯한 태도였다.
“참으로 대현(大賢)이시다! 이번 일은 그냥 없던 일로 넘어가세!”
“세상 살아온 관록이 있는 분이시다! 오늘은 그냥 노시게 두어라!”
“이보시오 주인장! 여기 와서 상마다 술 한 병씩 가져오게!”
당태세는 슬쩍 풀죽은 아룡의 어깨를 두들기며 웃어 보였다.
“괜찮다. 아룡! 태풍이 지나면 날이 걷힌다고, 이렇게 한번 부딪히고 다시 돈독해지면 그게 인연이 아니겠느냐? 모든 일을 하나하나 배운다고 생각하면 부끄러울 게 없다!”
아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태세의 말에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숙부님의 말씀이니 알아 모셔야지요. 그나저나 너무 돈 씀씀이가 커지시는 거 아닙니까? 이 사람들에게 다 술을 사려면….”
네가 하루에 뿌리는 돈보다 많겠느냐라는 말이 당태세의 목구멍 앞까지 나왔다가 들어갔다.
“걱정마라! 이 돈은 온전히 내가 내는 것이다. 너도 마시고 나도 마셔야지!”
당태세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도 만약 사람들이 이 자리에 하나도 없었다면 아룡의 목을 단박에 부러뜨려 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