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하남 개봉부(4)
높은 대문이 있는 것도 아니요 휘황한 장식이 앞에 붙은 것도 아닌 평범한 주택의 정문이 당태세의 앞에 놓여 있었다. 그나마 문 위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구봉방’이라는 현액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그냥 지나칠 법한 곳이었다.
당태세의 눈썹이 위로 꿈틀대더니 다시 예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울리지 않는구먼.”
구봉문주 오자평이라면 화려한 장식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고풍스러운 대문을 만들었을 것이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리는데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사치스러운 것은 피하였지만 자신의 위상이 어느 정도에 달하고 어디에 가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내였다. 그런 사내가 개봉에 만들어놓은 제이(第二)의 방파를 저렇게 조촐하게 알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목발을 짚은 노인은 입술을 쭈뼛대더니만 곧 목발을 짚고 뚜벅뚜벅 소리를 내며 천천히 구봉방의 대문을 지나쳐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잡념이 가득한 고집스런 노인 같은 표정으로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사내는 목괴를 땅에 찍는 소리에 맞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벽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몸을 돌려 뚜벅뚜벅 길을 걸어갔다. 골목 안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을 만나도 고개를 숙이고 계속 앞만 보고 걸어가는 노인네는 오래된 주택가 어디엔가 틀어박혀 남은 생을 주름진 눈썹 새로 불평하며 살 법한 위인처럼 보였다.
그렇게 당태세는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위에서 내리쬐는 햇볕과는 관계없이 사내의 발걸음은 일정하게 움직였고 또각대는 소리 역시 동일하게 골목에 작게 울려 퍼졌다. 아무런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것 같은 노인의 고집스런 발걸음이 어느 순간 딱하니 멈추었다.
노인은 고개를 쳐들었다. 노인이 고개를 쳐든 그 곳은 맨 처음 출발했던 구봉방의 대문이었다. 작은 구봉방의 현액을 바라보던 당태세의 이가 드러나더니 송곳니를 드러냈다.
“구백칠십 보. 오자평 이 놈이 개봉에 왕성을 하나 가지고 있구나.”
천보의 거리. 그 안에는 고대광실 같은 저택과 정원이 있을 것이고 구봉문의 이름에 어울리는 연무장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모든 이들의 정점에 위치한 구봉문주가 있을 터였다.
하나 단지 열 몇 명의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건물일 리가 없었다. 황충수의 말에 따르면 지금 있는 구봉방의 인원은 채 스물이 되지 않는다 하였다. 분명 저 안에는 그 열 배는 되는 인원이 있을 터였다. 당태세는 턱을 쓰다듬고는 몸을 그늘 아래로 옮겼다. 햇살 아래 서 있기에는 너무나도 뜨거운 오후였다.
“그리고 조금 전 황충수도 이 안으로 들어갔단 말이렷다.”
연관 없어 보이는 사실들의 나열에 노인의 머리는 징징 울렸다. 뜨거운 더위 때문에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였다.
당태세는 머리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움푹 들어간 담벼락 사이에 몸을 기대고 햇살과 사람의 시선을 피하였다. 행색으로만 보자면 영락없이 갈 곳을 잃고 집에서 쫓겨난 불쌍한 늙은이 꼴이었지만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발품을 부지런히 팔고 얻은 것은 구봉방이 꽤나 큰 본거지를 가지고 있다는 정도로구먼.”
난국을 타개할만한 뾰족한 수가 없었다. 충룡대처럼 따로 방도들이 돌아다니며 순찰하거나 사람들을 갈취하는 모습이라도 보인다면 각개격파라도 할 테지만 구봉방도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들이닥쳐?”
그렇다면 남은 일은 고택으로 직접 침입해서 하나씩 없애는 일뿐이었는데 그러기엔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적에 대한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호혈(虎穴)에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혈기방장하던 젊은 시절도 아니고 두발 강건하던 순천문주의 세월도 지난 지 오래였다. 당태세는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오른발도 슬슬 저려왔다.
“오늘은 그만 끝내고 아룡에게나 가야 하려나?”
당태세가 허탈한 표정이 되어 자조하는 순간, 북쪽에서부터 일단의 사내들이 저벅저벅 남촌의 골목길 안으로 접어드는 소리가 들렸다. 피혁화의 질서정연한 소리. 군(軍)의 소리였다.
당태세는 한발 더 물러서며 몸을 벽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의 옆으로 지나가고 있는 이들은 분명 녹영군이었다. 개봉부의 녹영군이 이 한적한 곳으로 대오를 맞춰 들어오고 있었다.
“설마?”
당태세는 슬쩍 고개를 내밀고 녹영군이 지나가는 곳을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구봉방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그 안으로 녹영군의 대오가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군호도 없이 문을 열어준 이는 슬쩍 목례를 나누고 있었다. 껄끄러운 상대이거나 처음 들어가는 이라면 저런 식의 출입은 삼갈 것이 분명했다.
“공사장의 석공을 데리고 들어가더니 이번에는 녹영군까지 들어간다?”
구봉방의 문은 다시 굳게 닫힌 채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동안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당태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금은 더 알아볼 일이 없겠구나.”
여전히 해는 뜨거웠고, 새로 지어진 성벽은 뜨겁게 달궈져 사방에서 열기가 올라왔다. 당태세는 골목에 주저앉아 있다가 슬슬 몸을 일으켰다. 하루아침 나절에 뿌리 뽑을 수 있는 무리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노인은 비틀대며 목괴를 손에 쥐었다. 오래되어 여기저기 석재가 깨진 골목은 고즈넉한 맛이 있었다. 노인은 다시 땡볕 아래로 나왔다.
자신의 그림자가 노인의 눈에 들어왔다.
긴 목발을 짚고 서 있는 검은 그림자가 노인의 발 아래 붙어서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하얀 돌 벽과 골목의 포석위에 놓인 자신의 그림자를 뚫어지라 보던 당태세의 입에서 쉰 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하루에 할 일이 아니라면 이틀에 하면 되는 거다. 이틀이 안 되면 이레, 이레가 안 되면 보름, 보름도 모자라면 될 때까지 머무르는 거다.”
노인의 쳐지고 힘없던 눈에 다시 불길이 올라왔다. 당태세의 입에서 부드득 거리는 소리가 울리며 날카롭게 벼려진 눈이 구봉방의 대문을 노려보았다.
“구봉문주, 네 놈이 금성탕지(金城湯池)안에 있다 한들 뚫고 들어가 네 목을 취할 것이다. 오늘은 네가 쉬는 날이 아니라 나를 만나지 않은 날. 네가 죽지 않은 날일뿐이다. 그 날을 기다려라. 난 십칠 년을 기다렸다!”
노인의 눈이 광망으로 이글거렸다. 그림자가 노인을 보며 외쳤다.
“죽기 전에 만나주마! 만나서 보내주마!”
노인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입장이 정리되자 당태세는 무겁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불현듯 당태세는 목이 칼칼해졌다. 긴장이 풀리자 갈증이 밀려왔다.
“나도 오늘은 차 말고 술이 필요하겠구먼.”
당태세는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
남촌을 빠져나와 당태세가 들어간 곳은 북문 근처, 새벽녘에 일꾼들에게 구봉방이 밥을 나눠주던 근처의 주루였다.
별다른 것을 기대하고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곳의 일을 구봉방이 관여하고 있으니 혹여 구봉방도라도 하나 있으면 천우신조의 기회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요행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목괴를 짚은 당태세가 부지런히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주루에 도착한 시각은 이제 해가 슬슬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이제는 슬슬 체력에도 자신감이 생긴다 싶었던 당태세였지만 개봉부 같은 큰 성읍을 위아래로 돌아다니자 슬슬 피곤함이 밀려오는 중이었다.
“백주(白酒) 한잔하고 돼지고기 볶음을 주게나.”
점소이는 군말 없이 당태세의 주문을 받고 주방으로 달려가는데, 당태세가 주루를 살펴보니 이곳도 성 쌓는 일을 하는 외지인이 반이고 나머지가 토박이들인 듯 빈자리가 드물 지경이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이른 시각이었는데도 술을 찾는 이들은 많았으니, 대부분은 노역에 지친 일꾼들이었고 나머지는 하릴없이 자리에 죽치고 있는 토박이들 같았다. 토박이들은 대부분 술집에 찾아오는 일꾼들을 좋아하지 않는 듯싶었다.
당태세는 술잔을 기울이며 일꾼들을 노려보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개중 몇몇은 착실해 보이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빌미만 생기면 시비 거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상으로 보였다.
“하긴 이 시간에 술을 먹는 여유가 누구나 있는 것은 아니지.”
당태세는 자신의 혼잣말을 스스로 생각하다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헛웃음을 머금고 술을 넘겼다.
하남의 백주는 술이 세지 않고 청량한 맛이 일품인지라 자기도 모르게 술을 넘기고 커어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순간 그의 옆에서 술을 마시던 사내 하나가 당태세를 노려보더니 말을 걸었다.
“거 참 술 맛있게 자시는구먼. 처음 뵈는 존안이신데 말입니다.”
말을 걸어온 이는 이미 눈 밑이 벌건 것이 불콰하게 한 잔 마신 듯 보였다. 당태세는 술자리에서 의미 없는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는 않았던지라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며 술을 따를 뿐이었다. 그러자 그 사내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어떠십니까? 개봉의 술맛이? 다른 곳보다 낫지요?”
“훌륭하구먼. 이런 술을 명주(名酒)라 하는 것이겠지요.”
“하! 처음 보는 외인도 개봉의 술은 알아주는데, 개봉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구먼! 인걸보다 술이 먼저 칭송을 받다니!”
옆에 앉은 이가 사내를 달래는 척 했지만 그저 요식적인 행동이었다. 전형적인 시비걸기의 시작이었지만 당태세는 굳이 흥을 깨고 싶지 않은지라 장단을 맞추기로 마음먹었다. 당태세는 노인다운 푸근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사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인걸을 알아주지 않는다니! 그 무슨 소리요?”
“세상에 널린 것이 나라님들의 공사고 할 일은 넘쳐나고 돈은 푸짐하게 도는데! 이 개봉 토박이들은 할 일이 없다 이겁니다!”
“외지인을 불러다가 일을 시키고, 돈과 공은 다른 사람이 가로채는 세상이니….”
옆에서 말없이 사람을 말리는 척하던 이도 한 마디를 거들었다. 복장이나 인상을 보아하니 평범하게 세월을 지내는 이들 같지는 않았다. 잘하면 작은 방의 방도일 것이고 안 되면 하오문의 비류들 같았다.
당태세는 말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팔을 뻗어 주루 넘어 넓은 공터에 세워진 깃발을 가리켰다.
“내가 아침에 보니 저 곳에 세워진 깃발아래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나누는 것 같던데…저건 뭐요?”
“허, 저건 우리하곤 관련없수. 되어 먹지 못한 놈들이니까.”
불콰해진 사내가 투덜대자 옆에서 그를 말리던 텁석부리 사내도 인상을 굳히며 말을 받았다.
“어디 개봉에 방회가 구봉방 하나뿐이라던가? 그저 청나라 놈들하고 붙어먹으려고 안달을 하니 저런 짓을 하는 거지. 우리 방회는 저런 소인배 같은 짓은 안 한다오.”
다른 방회.
갑자기 당태세의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자신의 앞에 앉은 이들에게 진득하니 은근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저기 저 있는 깃발의 방회가 소인배들이란 말이오?”
“아무렴! 원래 구봉방은 우리 개봉 사람들도 아니라오! 외지에서 굴러먹다 온 놈들이라지?”
“저런!”
“말이 없어서 그렇지 여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저 구봉방 안 좋게 본단 말이오. 자기들끼리만 몰려다니고 관(官)을 끼고 돌아다니는 게 마치 팔기(八旗)들 하는 짓이나 다름없는 것이….”
사내들은 취중에도 팔기라는 말을 내뱉으며 목소리를 죽였다.
당태세는 사내들의 말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턱을 쓰다듬었다. 당태세는 아직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개봉부의 다른 방회들은 과연 어떤 식으로 구봉방을 생각하고 있는지 말이다.
“이보시오들, 저 구봉방이라는 이들이 그럼 외지에서 처음 들어와서 이곳 사람들하고 그리 모질게 행동한다면 왜 성민들이 가만히 있는 거요?”
“그거야 그놈들이 가지고 있는 게…….”
그때였다. 당태세와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람들 옆의 탁자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불쑥 일어나더니만 당태세와 이야기하고 있는 술 취한 텁석부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그분들은 지사들이다!”
지사(志士).
순간 당태세의 눈이 번쩍 커지며 소리 지른 이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