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하남 개봉부(3)
세월이 흐르면 사람은 변한다. 피를 나눈 형제라도 십수 년 왕래가 없으면 한눈에 알아보기 힘든 것이 사람의 오감인 법이다. 하지만 당태세는 단박에 구봉문주 오자평을 알아보았다.
구봉문주는 세월을 빗겨나간 사람 같았다. 머리를 변발로 밀어버리고 목과 얼굴에 굵직한 주름이 잡혀있을지언정 이목구비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후금식으로 짧게 자른 콧수염은 젊은 날의 민첩하던 오자평의 모습을 늙어서도 돋보이게 해 주는 듯싶었다. 몸뚱이도 변한 것이 없어보였다.
뱃살 하나 나오지 않은 체형이나 걷는 보법과 어깨의 움직임은 그가 아직도 연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식이었다.
당태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늘은 당태세에게서 육신의 건강을 비롯한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구봉문주에게는 전에 없는 호의를 베풀어주는 것만 같았다. 예상치 못한 분노가 훅 밀려 올라왔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오른발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목괴를 잡은 왼손에 힘을 주었다.
“허, 나한테 볼 일이 있는 건가.”
그때, 황충수의 말과 함께 강렬한 기운이 당태세를 압박하듯 밀려왔다. 구봉방의 사내들이 황충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 아닌가.
순간 당태세는 자세를 바로잡고 손에 쥔 목괴를 앞으로 뻗으려다가 옆에서 머리를 긁적대는 황충수를 보고는 다시 마음을 진정시켰다. 당태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 구봉문의 사내 하나가 그들을 보며 말을 걸었다.
“어이, 황석장(石匠), 거기서 뭐 하는가?”
“식사 중이었소. 무슨 일이시오?”
“아니, 우리 방주님이 자넬 보자고 하셔서 말일세. 다른 동무들은 어디에 있는가?”
당태세는 목괴를 짚고 비틀거리며 한 발짝 물러서서 인파들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황충수를 불러내던 구봉방도가 당태세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이내 당태세의 발과 짚고 있던 목괴를 보더니 바로 시선을 황충수에게로 돌리며 구봉방주의 하명을 기다렸다. 어느 새 구봉방주 오자평은 소리 없이 황충수의 앞에 다가서 있었다. 신법 역시 젊은 시절이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어보였다.
“황충수, 방주를 뵙습니다.”
오자평의 매서운 눈초리는 세월이 지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구봉방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충수를 보더니만 황충수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다시 국솥이 있는 깃발 근처로 몸을 옮겼다.
황충수는 고개를 여전히 숙이고 있는데 그 옆에서 다가온 다른 구봉방도가 황충수의 귀에 대고 뭔가를 빠르게 속삭였다. 황충수의 입에 서려있던 미소가 사라지고 결연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짧게 끄덕이자 구봉문도 역시 고개를 까닥이고는 다시 구봉방주를 따라 몸을 옮겼다.
실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태세는 그를 둘러싼 무형의 기운에 잔뜩 싸여 있다가 해방되는 기분이었다.
“모든 이들의 기운이 실로 날카롭구나. 예전 구봉문보다 숫자는 줄었을지 몰라도 정예중의 정예다.”
당태세는 입술을 달싹이며 자신의 혼잣말을 자신만이 들을 수 있도록 중얼댔다. 닭 떼를 흩어 놓는 것보다 이리 무리 몇을 대하는 것이 더 힘든 법. 당태세는 자신의 처신을 좀 더 교묘하고 은밀하게 행하여야 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만약 구봉문주 오자평이 몇 발짝만 더 가까이 왔더라면 자신이 아무리 기운을 갈무리하더라도 닳고 닳은 무림인의 기운을 느꼈을 것이었다. 당태세는 이쯤하고 몸을 피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노사. 구봉방과 이야기가 있어서 결례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제 슬슬 일을 하러 가야하는데 노사께서는 어찌 하실 요량이십니까?”
“허허, 나도 다시 객잔으로 돌아가야지. 덕분에 만두는 잘 먹었네그려.”
황충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소소한 일에 마음을 주는 인사가 아닌 게 틀림없었다.
“그러십시오!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한번 일하는 곳을 보러 오십시오! 제가 차 한 잔 대접 못하겠습니까?”
“고마우이.”
황충수는 오래된 친척을 배웅하든 환한 표정을 지으며 당태세의 길을 배웅하다 뭔가 생각난 듯 당태세의 말을 잡더니 은근한 어조로 말하였다.
“노사, 나중에라도 노사가 개봉에서 뭔가 아니꼬운 일을 당하거나…… 만주족 놈이나 녹영군에게 해코지를 당하셨다면 저들에게 말하시구려.”
“엉?”
황충수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은 다름아닌 구봉방의 깃발이었다. 황충수의 마지막 말은 낮고 타인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했지만 당태세의 귀에는 너무나 또렷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
“저들은 지사(志士)입니다.”
***
아룡은 당태세가 옷을 차려 입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며 잠에서 깨어났다.
노인은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는지 감 잡을 수 없었다. 오늘 아침 노인은 다른 날과 달리 침울해 보였다. 평소라면 아룡이 일어났을 때 다정다감한 인사라도 보였을 터였건만 오늘 아침은 찬바람이 휘몰아칠 정도로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워보였다.
“왜 그리 울적하십니까?”
“아, 일어났느냐, 아룡?”
노인은 젊은이가 일어난 것을 보자 안색을 고치는데, 오히려 그 모습을 본 아룡이 더 마음이 안 좋았다. 사람이 경박하고 때때로는 잔인함과 철없음이 번갈아 휘몰아치는 두서없는 인간인 아룡이지만 여행길 물주인 ‘당숙부’의 심기가 편찮은 것은 자기에게도 안 좋은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아는 위인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무슨 일을 당하신 겝니까? 혹시 몸이 안 좋기라도 하십니까?”
“무슨 소리냐?”
“안색이 영 안 좋아 보이십니다. 가짜 술을 사먹고 토한 다음날 같은 표정이시네요.”
아룡의 턱없는 비유에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린 당태세는 쓴웃음을 지으며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개봉도 옛 정취를 잃었고 나도 옛 길을 잃어버린 듯싶은데 내가 길을 잃은 건지 길이 새로 뚫린 것인지 알 도리가 없구나.”
“보던 것과 알던 것이 없어지셔서 화가 나신 게로군요?”
“보던 것이 예전 같지 않고 내가 알고 있다 믿었던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은 게지.”
“말씀이 되게 어려워서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룡은 턱이 떨어지게 하품을 하고 난 뒤 입맛을 다시더니 사방을 둘러보았다. 성읍의 안개는 이제 걷히고 백설같이 하얀 성벽에 햇살이 부딪혀 사방으로 반짝였다. 하늘은 푸르고 날씨는 아침부터 무더우니 새들조차 입을 다문 고요한 정경이었다. 아룡은 당태세와 함께 하늘을 보다가 불현듯 노인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그것이 뭐 문제가 있습니까?”
“음?”
“예전에 어떻게 생각하고 사셨는지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현재 지금 숙부께서 여기! 개봉에 와 계시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요?”
“그렇지…?”
“이곳까지 온 것은 과거의 추억에 기초하여 온 것이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과거와 이어진 것이지만 이 자리에 있는 개봉은 과거의 개봉이 아니니 또한 과거와 이어진 것도 아닙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맨 처음에 여기 오신 목적대로 하시면 되지요! 지금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만약 과거사가 궁금하면 그것을 계속 찾아보시면 되고! 지금 개봉부에서 멋진 것을 찾으면 보시면 되는 것이죠! 간단하지 않습니까?”
“맨 처음 온 목적대로…….”
당태세가 아룡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다시 하늘을 물끄러미 보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염을 쓰다듬었다. 사내의 입에서 한숨 아닌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룡, 네가 실로 우문현답을 하였구나! 산사의 고승보다 나은 선지식(善知識)이 바로 너로다! 네가 내 어두운 길에 답을 이끄는구나!”
뜻하지 않은 상찬에 아룡의 얼굴이 슬쩍 붉어지더니만 이내 헛기침을 하더니만 으쓱대며 몸을 일으켰다.
“허허! 제가 누굽니까? 바로 숙부님을 모시고 천하를 주유하는 무두리 아닙니까! 이 정도는 되어야 숙부님을 보필한다 할 수 있지요! 오늘도 풍류에 젖어 세상을 잊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대장부의 삶을 살아보겠습니다!”
“그래! 오늘도 잘 놀다 오너라! 나도 이른 아침에 북쪽 성문을 바라보고 왔느니라.”
그러자 아룡이 깜짝 놀라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설마 저 죄수들이 일하는 곳을 가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왜? 그리 가면 안 되는 것이야?”
아룡이 엄숙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돌리며 고개를 같이 도리질하였다.
“절대 안 되십니다! 제가 근처 주루에서 놀다 그 근처로 가려는 걸 주루 주인이 말렸습니다. 성벽을 쌓는 죄인들은 말 그대로 중형을 노역으로 때우는 이들인데 그 죄가 흉악하고 심성이 후안무치한 자들로만 이뤄져 있다고 합니다. 성민들이 가까이 가면 녹영군이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군요! 불촉(不觸)에 불문(不問)이라! 살아있든 죽어 넘어지든 신경 쓰지 말라는 게 주루의 주인 말이었습니다.”
“호오, 그건 내 몰랐구나. 그렇다면 나는 다른 쪽으로 가 봐야겠다.”
“어디 봐 두신 곳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나도 어제 들은 바가 있었느니라.
당태세는 아룡에게는 말을 꺼내지 아니하고 속으로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정하였다. 아마도 그곳에 가면 구봉문의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당태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아룡과 당태세가 객잔의 문을 열고 나간 시각은 해가 중천에 올라갈 즈음이 다 되어서였다. 이제 두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고 자신이 갈 길을 정해놓고 나간 뒤 알아서 밤에 객잔에 들어오는 것을 불문율처럼 정해놓은 상황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일이 지속 될지는 모르지만 당태세의 수중에 돈이 남아있는 한 아룡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금월방주 장철오가 준 돈과 충룡문에서 탈취한 은자 정도면 아직 돈으로 쪼들릴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화수분처럼 나오는 돈도 아니었다. 당태세는 자신의 복수행과 여행의 균형점을 맞춰야 하였다. 하나를 걱정하면 다른 고민이 또 하나 생겼다. 당태세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설득하듯 말하였다.
“쓰레기도 쓸모가 있다더니 아룡이 그 짝이로구만.”
당태세의 이가 뿌드득 갈렸다.
“맨 처음 목적대로 하는 거다. 내 목적이 무엇이냐. 복수행 아니더냐?”
복수행.
입 밖으로 나온 말에 노인의 머리가 맑아지고 팔과 눈에 힘이 들어갔다. 복수행은 이제 시작이다. 아직도 없애야 할 놈이 하늘의 별처럼 깔려 있다. 지금부터 낙망하면 될 일도 아닌 것이다. 사내는 목괴를 짚고 뚜벅뚜벅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갔다.
“다관 주인 왈 남문과 서문에 옛 터전이 가장 많이 남았다 하였지?”
그곳으로 당태세가 가는 이유는 하나였다. 구봉방주 오자평은 고풍스러운 취향을 지닌 이였고, 문자향과 서권기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분명 개봉에 터를 잡았다면 새로 짓는 건물보다는 한적한 구택(舊宅)을 찾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당태세가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한 다경 정도를 꾸준히 걷자마자 옛 개봉의 터전처럼 보이는 오래 된 길과 가옥들이 줄지어 나오는데, 꾸불대며 뻗은 골목의 끝머리에 펄럭이는 깃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다름 아닌 새벽에 보았던 구봉방의 깃발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 참, 맘을 먹자마자 행선지가 나타나는군.”
쨍쨍 내리쬐는 더위를 무릅쓰고 목괴를 움직이는 당태세의 이마부터 뺨으로 땀줄기가 생겨났다. 턱 아래로 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순간, 당태세는 본능적으로 몸을 담 옆 그늘로 붙이며 기세를 죽였다. 아침에 느꼈던 것과 동일한 강기(剛氣)가 바로 앞 골목에서 느껴진 것이다.
“젠장.”
당태세가 기척을 죽이고 호흡을 갈무리하며 들어간 벽사이로 몸을 숨기자마자 일단의 사내들이 골목에서 빠져나와 구봉방의 건물을 향해 다가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내들의 뒷모습이 당태세의 눈에 잡혔다. 순간 당태세는 눈을 깜박이고 한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잠깐, 저거…….”
덩치 큰 사내들 사이에서도 돋보이는 훤칠한 키를 자랑하며 앞의 건물로 향하는 이는 다름 아닌 석공, 황충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