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북경 장군부
구름이 빠르게 남쪽으로 움직였다. 이미 봄이 지나 여름이 다가오는 길목에 있었지만 오늘은 바람이 북쪽의 차가운 기운을 머금고 들어와 남쪽에 뿌리는 듯하였다. 사람들은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에 옷깃을 여미고 발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모든 이들이 저절로 인상을 쓰고 얇은 자신의 옷과 변덕스런 하늘을 탓하며 걷고 있는 중에 오직 검은 말 위에 올라탄 검은 장포의 무인 한 명만이 평온한 얼굴로 그들 사이로 천천히 말을 몰고 지나가고 있었다.
사내는 빈틈없이 머리를 밀고 고래 북방의 규례에 의해 기른 금전서미의 변발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사내의 턱수염은 깨끗하게 면도되어 있었고 기둥같이 내려온 곧은 콧날 옆으로는 짧은 수염 몇 개만이 날카로운 가시처럼 옆으로 뻗어 있었다.
사내는 누에처럼 굵은 눈썹 아래로 부리부리한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사내의 날카로우면서도 커다란 눈은 좌우를 둘러보지 않으며 대로의 가운데로 고삐를 잡고 말 걸음을 평보(平步)로 맞춰 곧장 앞으로 지나가니 마치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검은 배와 같았다.
사내를 태운 말은 커다란 대문과 녹색 기와가 어우러진 대가(大家)의 앞에 멈추었다. 사내는 대문 앞에 서 있는 하얀 사자상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에서 가볍게 내려 열려 있는 문을 통해 거리낌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문 양 쪽으로 지키고 있던 갑사(甲士)가 일제히 묵례를 하며 사내의 출입을 허가하였다. 갑사들은 사내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일부러 마주치지 않는 것 같았다.
흑의 장포에 수정관모를 쓴 장한이 도착한 곳은 포석이 빈틈없이 깔린 거대한 마당에 사뿐히 내려앉은 듯 맵시 있게 처마를 드리운 고풍스런 안채였다. 병사들이 사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모두 반보씩 물러서서 길을 터주었다. 사내는 안채로 거리낌 없이 들어갔다.
안마당만큼이나 넓은 실내는 번득이는 돌을 갈고 닦은 화려한 바닥이 깔려 있는데, 그 앞에는 금박을 입힌 거대한 붉은 마루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뒤에는 산호정자에 망포금대를 두른 늙은 관인(官人)하나가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검은 장포의 사내는 탁자에서 멀리 떨어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늙은 관리에게 안부를 여쭈었다.
“선무사 천호 종리세리, 보국장군께 문안을 드립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늙은 만주인은 무릎을 꿇고 인사를 드리는 선무 천호를 바라보더니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자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급하게 불러서 미안하게 되었다. 종리천호. 하던 과업은 완수하였느냐?”
“반군은 소탕하였고 수괴는 압송하였습니다.”
노인은 빙긋 웃으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는 마치 어린 손주나 자식의 대견함을 자랑스러워하는 가주의 따듯함이 담겨 있었다. 무릎 꿇은 이와 노인의 사이는 품계(品階)를 넘어선 막역함까지 느껴졌다.
“나는 점점 늙어가고 너는 점점 전공이 올라가는구나.”
“모든 것이 장군의 홍복이옵니다.”
“그래, 내 홍복일 뿐이다. 네게는 괜한 노고일 뿐일지도 모르겠구나.”
“아니옵니다.”
사내는 짧게 대답하였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노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찻잔에 입을 가져갔다. 사내의 행동거지는 늙은 장군에게는 익숙한 일상인 듯 보였다.
“네가 스물 젊은 나이에 산해관에서 나를 만나, 한족이지만 내 깃발을 대신 들고 중원에 입성하여 칼로 공을 이룬 것이 태산을 쌓았다. 네 무공과 인품이면 가히 패륵의 지위도 모자란다 할 것이나 십칠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저 선무사 천호에 머물러 있구나.”
“저는 제 분에 맞다 생각합니다.”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것은 나의 불찰이지 너의 게으름이 아니다. 네가 한인이고 내가 만주인이라 그런 것 또한 아닐 것이다.”
“말이 과하십니다.”
늙은 장군은 물끄러미 고개 숙인 사내를 보더니 작게 혀를 찼다. 노인의 목소리는 웅얼대며 혼잣말을 하는 듯 작아졌지만 그 뜻과 발음은 정확하게 고개 숙인 사내의 귀에 닿았다.
“이번에도 너를 부르는 것이 내 과욕일진대…….”
“하명하시옵소서.”
“……내가 좋은 칼을 가졌구나.”
노인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푸근하던 노인의 눈이 한참을 깜박이며 천장을 보더니만 그제야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 자신의 주름진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어차피 패륵의 여러 집안에서는 대부분 풍설(風說)로 들은 이야기들이다. 너라고 정확한 이야기를 듣지 말란 법이 없다. 아니, 오히려 네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말을 들어야 한다.”
“듣고 잊겠습니다.”
노인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감돌았다. 노인은 찻잔을 내려놓더니 얇게 저민 육포를 하나 슬쩍 입에 넣고 씹더니만 고개를 끄덕이고 앞에 무릎 꿇은 무장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무료한 듯한 목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지금부터 십칠 년 전의 이야기다. 황제께서 오삼계의 산해관을 여시고 이자성의 반란군에게 핍박받는 명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남하하신 것이 그 때니라. 물론 너도 그때는 기억하고 있으렷다. 넌 내 명을 받아 첨병을 이끌고 이자성의 선진(先陣)을 치고 있을 때였으니.”
“산동과 북경 어림의 진들을 궤멸하였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 때 나는 네게 선봉을 맡기고 바로 북경으로 향하였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처구니없는 행군이었다. 우리가 북경에 당도했을 때 보았던 것은 무너진 북경성과 죽은 황제. 그리고 이자성이 보물을 탈탈 털어간 빈 금고뿐이었지. 북경을 점령하는 것보다 패륵의 마구간을 터는 게 더 힘든 일이었을 게다.”
노인은 그 때가 생각나는지 어이없다는 듯 빈 웃음을 터뜨리고는 다시 차를 마셨다. 슬쩍 찻잔 너머를 바라보던 노인의 눈매가 번득였다. 노장군은 어느새 혈기방장하던 예전 팔기의 무장의 기세를 보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한 가지 비밀로 부치고 있던 일이 있었느니라. 바로 이자성과 산해관 앞에서 벌였던 일전(一戰)말이다. 이미 그 때 우리는 이자성의 부하들과 서로 밀약을 나눈 상태였다. 우리가 병력을 내기 전에 이미 이자성은 뒤쪽에서 자신의 부하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지경이었지.”
“소문은 들었사옵니다.”
“너는 북경팔대문파에 들은 적이 있느냐?”
“들은 바 없사옵니다.”
노장군의 눈이 슬쩍 즐거운 빛을 띠었다.
“이자성과 우리가 산해관 앞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한 사내가 우리 막사로 들어왔다. 자신이 이자성의 군대 휘하에 들어있는 북경 팔대문파의 대표인데 북경 팔대문파는 대대로 북경을 대표하는 무림문파들이라는 거지! 그들은 북경에서 황제와 함께 이자성에게 맞서다가 중과부적으로 황성을 빼앗기고 이자성의 편에 섰다더구나. 그런데 더 이상 이자성의 횡포를 이길 수 없으니 우리 편에 서겠다는 것이었어.”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러겠지. 그 때는 기밀이었다. 이자성의 후위를 맡고 있는 여덟 갈래 군사가 모두 일거에 배신을 한다면 승리는 따 놓은 것이 아니겠느냐? 그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 자신들을 팔기(八旗)에 걸맞은 대우를 해 달라고 약조한 것이었다. 그것을 문서로 여덟 장을 만들어 우리 패륵들의 인(印)을 찍어 주면 싸움이 끝난 뒤 증표로 삼겠다고 말이야.”
“가능한 일이라고 사료되옵니다. 전쟁은 원래 그런 것 아니옵니까?”
“전쟁은 원래 그런 것이지. 그래, 네 말이 맞다.”
늙은 장군의 눈이 갑자기 흐려졌다.
“이자성의 군세를 꺾고 귀부하겠다는 그들을 다른 식으로 다룰 방도가 없었다. 그 수가 꽤 많았지. 그렇다고 그들을 주둔지에 넣고 관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선봉이 되어서 이자성을 멸하겠다 하였지. 나쁠 것이 없는 제안이었어. 단지…… 총사령관 섭정왕 도르곤 폐하의 허가를 받기 전에 우리가 임의로 결정했다는 게 문제였지.”
어느새 검은 장포의 사내는 고개를 들고 말없이 늙은 장군의 말을 듣고 있었다. 늙은 장군은 부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그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정신없었다. 바로 이자성의 군대를 부수고 북경까지 일사천리로 밀고 내려가지 않았느냐? 도르곤 폐하도 바쁘고 우리도 바빴지. 그 북경 팔대문파는 북경이 우리 청(靑)에 함락되자마자 그 서류들을 보이며 제각기 말하더군. 북경에서 터를 잡고 사람들을 위무하고 청의 백성으로 만들겠노라고.”
“그들에게…… 그것을 허락하신 겁니까?”
처음으로 흑의장포가 장군에게 물음을 던졌다. 늙은 장군은 흑의 장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만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북경에 불씨를 남겨둘 수는 없었지. 그들을 모두 뿔뿔이 전국에 흩어놓았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폐하는 모르게 말입니까?”
노인은 인상을 쓰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르곤 폐하는 이미 알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그 분은 전쟁터의 부박함과 경우 없음을 이미 알고 계셨지. 그리고 고개 한번 끄덕거림으로 그 모든 일을 마무리 지으셨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이 살아계신 이상, 언제든지 이 여덟 집단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공적으로 처벌할 수도 있다고 믿었지.”
노인의 눈은 흐릿하니 과거를 좇다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가 급작스레 돌아가시고 그분의 관후함은 덩달아 사라졌지. 남은 것은 우리의 게으름과 근심뿐이네.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믿은 늙은이들의 잘못이야.”
“소장 종리세리. 말씀의 맥락을 놓쳤습니다. 지금 저를 부르신 이유는 그 여덟 문파에 관련된 일이옵니까? 아니면 설마 예친왕 도르곤 폐하의 사후와…….”
늙은 장군은 손을 들어 종리세리의 입을 막았다. 노인의 눈빛이 어느새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종리세리는 노인의 얼굴을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늙은 보국장군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가 당황한 것도 이해한다. 이건 황실의 문제가 아니니 걱정 마라. 우리들의 문제이니.”
노장군은 다시 찻잔을 입에 가져가더니 한숨을 쉬었다.
“사흘 전, 제남 만연사라는 작은 사찰의 산등성이에서 노인 하나가 도당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그 노인은 주통산, 북경팔대문파에 속하는 충룡문의 문주이자 이자성의 뒤를 기습했던 여덟 갈래 군사의 우두머리 중 하나였다. 누군가가 한 방에 가슴을 찔러 절명시켰지.”
노인의 눈이 번득이며 찻잔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노인에게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써 주었던 사면부는 흔적도 없었지. 결코 몸에서 떼어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사면부가 없어졌어. 누가 주통산의 주머니째 떼어갔더구나.”
“네.”
“종리세리. 너는 그 범인을 찾아와야 한다.”
노인의 눈이 점점 커지며 이글대는 호랑이의 안광이 무릎 꿇은 부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 명부에는 여덟 문파의 이름과 함께 사면에 동의해준 진국공 둘과 장군부 셋의 관인(官印)이 찍혀 있다. 이것이 만의 하나 작금의 황제께 넘어간다면 우리는 돌아가신 섭정왕 도르곤 폐하를 속이고 한인들에게 권세를 안겨주고 사방에 터뜨린 역적이 될 것이다.”
“장군, 황제께서 그렇게 처벌을 하실 리 없습니다.”
“그래, 우리 목숨을 끊지는 않으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 후손들에게는 영향을 주겠지.”
노인의 이글대던 눈빛에 한 줄기 근심이 서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목숨이 아니다. 우리 가문이 강등당하며 다시는 같은 반열에 서지 못하고 우리 후손들이 지리멸렬해지는 것이지. 지금의 황제께서는 호시탐탐 패륵의 가문을 견제한다. 너도 알고 있는 일이렷다?”
“네, 장군.”
노인이 그제야 할 말을 다했다는 듯 뒤로 물러나 의자 깊숙이 몸을 던졌다. 노인은 과하게 말을 많이 했는지 눈가에 피로가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너는 제남으로 가서 누가 주통산을 해치웠는지 파악하고, 그 자에게서 사면부를 탈취하라. 물론 그 자의 목숨은 취하여 증거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그 여덟 문파의 이름이다.”
노인이 탁자 위에 있던 접은 종이를 손끝으로 밀자 종이는 그대로 비수처럼 날아가 종리세리의 앞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종리세리는 종이를 두 손으로 정중하게 받아 쥐고 다시 한 번 엄숙하게 말하였다.
“존명(尊命)”
“너는 홀로 움직이며 군사를 부리지 말아라. 내 너에게 보국장군부의 통부를 따로 줄 것이니 너를 한인이라 멸시하는 것들은 화를 입게 될 것이다.”
“존명.”
“내 오직 너에게 이 명을 내리노라. 구이도(仇夷刀) 종리세리. 맡은 임무를 완수하고 다시 홀로 돌아오너라. 그 때 내가 너에게 실력에 걸맞은 대우를 제대로 하겠으니.”
“신, 종리세리. 맡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
“가라! 내게 낭보를 들려다오!”
검은 장포의 사내는 깊이 고개를 숙이더니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내의 표정에는 일절 감정의 동요를 찾아볼 수 없었다. 검은 그림자와 같은 사내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갈 때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노인은 사내가 사라지자 자신이 육신을 가지고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듯 깊게 의자에 몸을 파묻고는 입을 벌린 채 한참동안 천장을 바라보았다.
“젊은 시절의 실수를……늙어서 바로잡기가 힘들구나.”
노인은 입을 닫고 눈을 감았다.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