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산동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 불타가 말하셨듯 언제나 한곳에 머무를 수는 없는 것이 사람의 인생 아니던가.
여행도 인생의 한 과정이나 마찬가지이니 단성룡 역시 언제까지 제남에 머무를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슬슬 다른 곳을 옮겨 갈 준비를 해야겠구나. 내가 서른, 아니 마흔만 되었어도 좀 더 누워서 제남의 풍취를 즐기겠지만 이젠 늙어 시간이 없도다.”
늙은 당태세의 한탄이 흘러나오자 옆에 앉아있던 단성룡은 늙은 숙부가 느끼는 것이 자기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실로 마음이 통하는 자는 갈 길도 같은 것인가.
단성룡은 뭔가 가슴 속에서 찡하니 울리는 것을 느끼며 당숙부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아쉽지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젠 갈만한 주루나 기루도 별로 없고…돈도 제남에서 다 쓸 생각도 없고 말입니다.”
“네 놈 생각이 나와 일치하는구나. 역시 풍류남아는 통하는 곳이 있도다.”
이 노인은 하나하나 말 하는 것이 버릴 것이 없었다. 어찌 이리 사내의 마음을 정확하게 안단 말인가? 실로 당숙부는 젊은 시절에 뭐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풍류대장부였음이 분명하였다.
“달리 이를 말이옵니까! 당장 떠나시지요!”
“오냐! 그러자꾸나! 객잔에 비용을 계산하고 오거라!”
이야기를 멀리서 듣고 있던 객잔 주인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못내 아쉬운 듯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파리처럼 비벼대었다.
젊은 친구의 주사가 좀 고약하긴 했어도 노인은 죽은 듯 조용히 객잔 안에 있던지 나가서 절과 풍광을 구경하기만 할 뿐이었다.
젊은 친구도 인물이 훤하니 깨어 있을 때에는 꽤나 살가웠고 관원들과 황제를 병적으로 좋아하는 것 빼고는 그리 흠 잡을 곳도 없었다. 좋은 손님은 예나 지금이나 받기 힘든 곳이 객잔 아니던가.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대가!”
“신세는 제가 졌습니다! 어찌 이런 훌륭한 분들을 다시 모실꼬? 그래,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단성룡은 객잔주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우리 숙부님의 뜻이 더 늙기 전에 하나라도 더 명승고적을 보고자 하시니 조금 더 여행길이 지속될 듯싶습니다. 뭐, 저도 이래저래 같이 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싶고 말이죠!”
“허허! 이거 참! 나는 상상도 못 할 일이구먼! 부럽소! 부러워!”
객잔 주인이 감탄을 연달아 발하더니만 슬쩍 뒤에 앉아있는 당태세가 듣지 못하도록 슬쩍 단성룡의 손을 잡더니 기둥 옆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보시게. 기왕지사 좋은 곳 멋진 곳을 볼 것이면 소항을 가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옛말에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이라! 소주와 항주에 가 봐야 땅과 하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하였소! 그 곳으로 모시고 가시오! 얼마나 좋겠는가?”
단성룡이 객잔주인의 말을 듣고 무릎을 탁쳤다. 생각지도 못했지만 자신의 바람에 딱 맞는 말이었다.
조금만 내려가서 배를 잡아타고 운하로 내려가면 바로 소주까지 직행 아니겠는가? 어차피 돈도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것도 아닌데 지금 아니면 언제 소항의 불야성을 즐겨보겠는가?
“소항! 아, 제가 그 생각을 못 했습니다! 탁견이십니다!”
단성룡의 감탄에 객잔주인은 슬쩍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하시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것으로 하시고, 오늘 저녁은 조촐하게 한 잔 하십시다. 나도 이리 좋은 손님들을 떠나보내는 게 아쉽구먼!”
그 순간, 객잔 안으로 한 사내가 들어왔다. 객잔주인이 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반색하였다. 단성룡이 손님이 누군가 싶어 살펴보니 며칠 전에 봤던 녹영군의 군관이던 이씨 성 가진 천총이었다.
“아이고! 이천총 오늘은 또 어떤 일이시오? 또 무슨 사달이 터지신 겐가?”
이천총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행(幸)인지 불행(不幸)인지 잘 모르겠는데 하여간 제남 시내에 좀 더 주둔할 것 같으이.”
“좋으신 일 아닙니까요? 서로 더 볼 수도 있고 말입니다요!”
객잔주인의 말에 이천총은 고개를 저으며 쓴 웃음을 짜증나는 표정으로 바꾸었다.
“남산 중턱에서 충룡방주랑 나머지 잔당들이 죽은 채로 발견되었네. 아주 호되게 싸운 모양이야. 대충 나오는 모양새로는 서로 싸우다 찔러 죽인 것 같은데 그 덕에 아주 녹양군만 진 빠지게 생겼네. 충원도 없는 상태인데 우리더러 성내 경비를 다 담당하라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지.”
“아, 그래요?”
객잔 주인은 이천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슬쩍 눈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이천총은 객잔주인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다시 입술을 깨물더니 혼잣말로 욕을 해대었다.
“충룡방주 개 같은 놈, 그러게 사람들 돈 좀 그만 받아 처먹을 것이지. 저승 갈 때 돈을 싸들고 갈 것도 아니면서 말이야! 그렇게 살고도 죽을 때 땡전 한 푼 없었다니. 허!”
“거 참, 욕심이 지나쳤던 위인이구먼! 사람들을 그리 닦달하더니!”
단성룡이 옆에서 이천총의 말이 맞장구를 치는데 객잔주인의 표정은 조금씩 심각해지더니 급기야 이마에 주름까지 잡혀 있었다.
객잔주인은 슬며시 고개를 돌려 뒤에 앉아있는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당태세가 무슨 일이냐는 듯 객잔주인을 쳐다보다 객잔주인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휙하니 돌려버렸다.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겐가? 거참!”
객잔주인은 씩 하니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이천총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이마에서 한 줄기 땀이 흘러내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왠지 제자리에서 이천총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답답해졌다. 그렇다고 다시 뒤로 돌아서 객잔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갑자기 뒤에 앉아있는 노인의 얼굴을 돌아보는 것이 무서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
“그 동안 감사하였소! 다시 들를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공자! 잘 가시구려!”
다음날 아침, 당태세와 단성룡은 객잔을 나섰다. 단성룡과 인사를 나눈 객잔주인은 뭐가 그리 급한 지 당태세를 만나 작별인사를 하기도 전에 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침 일찍이라 바쁜 일이 산적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단성룡은 그동안 살이 오른 나귀와 수리를 마친 수레를 끌고 당태세가 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이른 아침 잠시 어딘가를 다녀오겠다고 나선 뒤 곧 돌아오겠다 약속하고는 아직 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내 화려한 제남의 생활도 이젠 끝이로구나.”
단성룡은 화려하게 뻗은 제남의 대로를 보면서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화려한 처마와 사람의 눈을 홀리는 수많은 객잔과 주루, 기루를 돌아다니며 실로 천하의 복은 다 누렸다 자부하고 싶었지만 끝내 어딘가 허전한 기분이 남아 있었다.
단성룡은 그것이 무엇일까 눈을 게슴츠레 뜨고 고민하다 결국 손바닥을 짝하니 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천하일색(天下一色)을 만나 연분을 쌓았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기연이 없었구나.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수많은 명기들을 주루에서 보았지만 내 맘에 드는 이가 하나 없었지. 이 커다란 제남에서도 나와 맞는 경국지색은 없었으니… 보다 큰 대처로 가야 할 것인가? 소항에는 나라는 사내를 감당할 재색겸비가 없었다는 말 외에는….”
그 순간, 사내의 시선이 골목 한 곳에 멈추어 있었다.
그곳에는 목발을 짚은 당태세가 서 있었고, 그 옆에 중년의 가냘픈 여인이 하나 서서 당태세의 손을 잡고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일가친척이 아니라면 정인(情人)이나 할 법한 행동이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단성룡은 이내 경악한 표정에서 감탄하는 얼굴로 바뀌더니만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역시 내가 당숙부보다 한 수 아래로다! 내가 기루에서 수많은 여인들에게 돈을 쓰고 있을 때, 숙부께서는 지고지순 한 여인에게 일심을 바치신 게 아닌가? 사내가 먼 길을 떠날 때 저런 석별의 정 하나 갖지 못하면 어찌 대장부라 하겠는가! 참으로 배울 것이 많구나!”
한편, 당태세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어깨를 연신 두드리며 여인을 위로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인의 눈물은 당태세가 위로한다 하여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당태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그대의 남편과는 일면식도 없었소이다. 하지만 그런 목불인견(目不忍見)을 보고 어찌 그냥 지나가리오. 내 일전에 그대에게 넘긴 돈이 그 왕가라는 놈이 서점을 먹는 대가로 지불했던 돈 전액이외다. 그것으로 남은 일가를 추리시구려.”
“대인! 대인의 은혜가 하늘과 같습니다! 제 남편은 복이 없어 불의한 도적에게 목숨을 내 주었고, 저는 하늘의 도움으로 신장(神將)같은 대인을 만나 살 길을 찾았어요!”
여인은 고개를 떨구고 울음을 그칠 줄 모르니, 바로 이 여인이 충룡방도에게 맞아죽은 서점주인 최가의 아낙이었다.
며칠 전 왕가의 영수증과 돈을 당태세에게 돌려받고 모든 사건의 전말을 들은 뒤 마지막으로 당태세에게 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
“이곳 제남에서는 눈치가 보여 못 살지도 모르오. 작고 조용한 동리로 간다면 그 돈으로 고생은 하지 않고 여생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외다.”
여인은 두 손을 꽉 움켜쥐고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태세는 이제 되었다는 듯 여인에게서 멀어지며 목발을 짚고 객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인의 젖은 눈이 멀어지는 노인의 등을 좇았다.
“대협, 존성대명을 알 수 있겠습니까? 평생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절름발이라오.”
노인의 몸이 비틀비틀 멀어지는 것을 보던 여인은 두 손을 합장하며 고개를 숙이고 또 숙였다.
노인의 몸이 수레 안으로 들어가고 수레가 움직여 멀어질 때까지 여인은 합장을 멈추지 않았다.
“어떠십니까, 숙부님. 제남에 아직 미련이 있으십니까?”
덜컹거리는 수레 안으로 아룡이 던진 물음에 당태세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자고나면 갈 길이 다른 인연 아니더냐. 무슨 의미를 두느냐.”
“역시 숙부님이십니다! 그릇이 달라! 나는 멀었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요.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가실 겁니까? 기왕지사 좋은 것을 보러 나왔으니 이대로 제녕까지 내려가 배를 타고 소주로 가심이 어떻습니까?”
씩 웃으며 뒤를 돌아보는 아룡을 보며 당태세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무두리.”
“네?”
“난 늙은 사람이니까. 개봉을 보고 싶구나.”
“개, 개봉이요? 개봉에 뭐가 있다고…….”
“일단 송나라 시절부터 이어진 고도(古都)아니냐. 내 그곳을 예전부터 보고 싶었느니라.”
갑자기 당태세의 말이 강경해지자 당황한 것은 단성룡이었다. 단성룡이 연신 혀로 입술을 핥으며 당태세를 쳐다보자 당태세가 슬쩍 눈을 들어 단성룡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무두리, 네가 날 버리고 혼자 소주로 가겠다는 게냐? 이 늙은이 바람을 들어준다고 여기까지 와 놓고 다른 맘을 먹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숙부님이 하늘 끝까지 가라면 갈 것이고! 땅 끝까지 가자 하셔도 흔쾌히 모시는 사람입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당태세가 단성룡의 말을 듣더니 실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어찌 너를 의심하리! 가자꾸나! 개봉에 가도 어찌 구경 못할 게 있겠느냐! 개봉도 좋은 것이 많을 것이야! 너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가자!”
“예, 알겠습니다!”
단성룡이 당나귀 고삐를 바로 잡고 다시 길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태세는 물끄러미 단성룡을 지켜보더니 슬쩍 품 안에서 서찰을 꺼내 보았다. 서신에 적힌 글을 바라보던 당태세의 입에서 덤덤하니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하남 개봉의 구봉문.”
사내의 품속으로 다시 서찰이 들어갔고 수레는 덜컹이며 서쪽을 향해 움직였다. 수레의 흙먼지가 햇살 사이로 노란 빛을 뿌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많은 행객 사이에 섞인 두 사람의 자취는 이제 제남의 성벽에서도 확인하지 못할 곳으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각, 제남에서 출발한 사신 하나가 개봉과 소주도 아닌 북경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준마를 타고 쉬지 않고 달리는 병사의 품 안에는 오직 하나, [보국장군 (輔國將軍) 서림각라부(西林覺羅府) 전(前) 상서(上書)]라는 이름이 붙여진 서찰 하나만이 들려 있었다.
팔기(八旗)의 사신은 뒤돌아 보지 않고 오직 북경의 장군부를 향해 돌진하듯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