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제남 만연사(3)
산봉우리 아래 움푹 들어간 커다란 바위 그늘 아래 작은 암자가 놓여있었다.
지어진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화려한 난간과 지붕처마가 고즈넉한 산세와 어울려 보이지 않는 건물이었다.
암자의 문은 열려 있었고, 문에서부터 땅으로 이어지는 난간 계단 위에 한 늙은이가 볕을 쬐며 앉아 있었다.
흑백의 도포와 작은 관을 쓰고 있는 도사의 복장을 하고 있는 사내는 젊은 시절 꽤나 험한 일을 했는지 떡 벌어진 어깨와 사나워 보이는 인상을 도포와 주름 아래 감추고 있었다.
노인은 가파른 길을 뚜벅뚜벅 걸어오는 절름발이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노인이 발 앞의 계단참까지 올 때까지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말을 먼저 건넨 것도 목발을 짚은 노인이었다.
“대규호 주통산.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이긴 한데……누구신가.”
“귀린갈 당태세일세.”
슬쩍 오시(傲視)하며 계단 아래 노인을 내려다보던 도사 노인의 눈초리가 슬쩍 커지더니 표정이 바뀌었다. 그렇다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은 아니었다.
도사노인은 마치 예전에 잊고 지나간 약속을 날이 가고 해가 지난 뒤에 기억한 듯 멀리 하늘을 잠시 바라보고 다시 노인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군. 귀린갈이 맞는 것 같아. 희한하군.”
“죽은 줄 알았겠지.”
대규호 주통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처리를 했어야 했는데 아쉽게 되었구먼.”
주통산은 슬쩍 당태세가 걸어온 길을 훑어보더니 말을 걸었다.
“우리 애들은 모두 해치웠겠군. 귀린갈이라면 당연히 그랬겠지?”
“다 해치웠지.”
“망할.”
주통산은 입을 씻듯이 수염을 닦아 내리더니 한숨을 나직하게 쉬고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뭘 원하는 거야. 한 번 싸우러 온 건가? 우리 애들을 다 잡았으면 목표야 나 하나겠구먼.”
“널 잡으러 온 거지.”
“그 몸으로?”
주통산은 목발을 잡고 있는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음을 지어보였다. 주통산은 거칠 것이 없어보였고 급한 것도 없어보였다.
오랜 세월 정점에 선 채 세상을 관조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 그게 아니라면 그 동안 자신이 쌓아올린 것에 자신을 투영하는 허장성세일 수도 있었다.
“이미 충룡방은 만주족이 다 쓸어버렸다.”
당태세의 말에 주통산이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만주족이 아니라 녹영군이었지. 상관없어. 시일이 지나면 다시 잠잠해질 테니까.”
주통산은 이미 다 겪어본 일이라는 듯 덤덤하니 걱정 없다는 투로 말을 걸었다. 주통산은 손을 뻗어 자신의 옆구리에 매단 주머니를 툭툭 쳐보였다. 짤랑대는 소리가 고즈넉한 산중턱에서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만주족은 돈을 좋아하지. 정말 좋아해. 조금만 지나면 세를 회복하는 것은 일도 아니야. 녹영군이 우리 애들 몇 명 잡아가고 본보기로 몇 놈 장터에서 효수하면 꾸벅 몸을 낮추었다가 다시 돈을 들고 찾아가면 그날 이후로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야.”
주통산의 가느다란 눈매가 당태세를 향하였다. 뺨에 깊게 주름이 파인 사내는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당태세! 내가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으면서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 같은가? 북경에서 산동 제남까지 쫓겨 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네는 알겠어? 이자성의 잔당, 오삼계의 군대. 청나라 팔기들의 간섭부터 제남 토박이들까지……별 시덥잖은 것들이 다 덤벼들었어. 그때마다 난 다 해결했지. 고작 녹영군이 우리 애들 몇 명 끌고 가는 걸로 충룡문이 망한다고 생각하나? 내가 청나라 놈들에게 뿌린 돈이 얼만데?”
“북경 구대문파였던 놈이 결국 산동에서 돈 자랑하는 처지란 말이냐?”
당태세의 이죽거림에도 주통산은 기가 죽지 않았다.
“만주족에게 나를 지켜주는 게 권법이나 도법이라고 생각하느냐? 당태세, 그러니까 그 꼴로 늙는 거다. 늙으면 돈이 있어야지. 네 모습을 봐라. 어찌 살아남았는지 모르지만 네 모습은 그저 절름발이 만주족 늙은이 아니냐? 변발까지 하고서…조상에게 부끄럽지도 않으냐?”
“그러고 보니 네 놈은 머리를 안 깎았구나.”
“나는 도사거든. 도사는 머리를 깎지 않아도 된다.”
주통산은 머리를 만지면서 자신의 발아래 있는 당태세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더 이상 말을 이어가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은 상대였다.
충룡문은 대대로 충(忠) 하나만을 편액에 걸어두고 보국애민을 기치로 북경에서 문파를 키워 나간 명문정파였다.
일설에 의하면 옛 영락제 시절부터 이어져 왔다는 견실하고 유장한 기세를 지닌 집단이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문주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는 도사차림에 산사에 의탁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요략(要略)이 허리에 찬 돈주머니에 있다고 말하는 말종이었다.
당태세는 문득 이 청정 고요한 산에 자신과 이 자가 같이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지저분한 일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인생이 일순간에 덧없는 일로 보였다. 하지만 그대로 놔 둘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청이 싫으면서 귀부를 한 이유가 무엇이냐.”
“살아야지.”
“그게 네 인생의 답이냐?”
당태세의 말에 주통산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소리만 지껄일 거라면 어서 돌아가라.”
“오냐. 대신 서향방과 동향방의 돈은 내가 다 쓸어가마. 그건 알고 있었겠지?”
순간, 주통산의 입가에서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퉁방울처럼 눈이 커졌다. 평정심을 간직하던 늙은 도사의 눈썹이 위로 꿈틀거리더니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네 놈이냐! 네놈이 우리 애들을 죽이고 돈을 빼앗았느냐!”
“사람 죽이고 뺏은 도적들의 돈이다. 네가 무슨 탓을 할 것이냐? 늙어서는 돈이 필요하다며?”
주통산의 표정이 급격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수염아래 입술이 푸들푸들 떨리더니 손가락까지 떨고 있었다.
당태세는 멍하니 주통산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어이없는 웃음을 머금었다. 당태세는 마치 검결에서 이긴 듯한 기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진작 주통산이 돈에 망가진 위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지루하게 말을 이어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고금에 빛날 전통을 이어온 마지막 충룡문주는 이제 서푼 돈에 사람 목을 서슴없이 딸 위인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주통산은 제 분을 못 이기고 눈을 번득이며 당태세에 욕설을 퍼부었다.
“이 견자 같은 놈! 여기 제남까지 온 게 내 돈을 털려고 온 것이었냐! 내 돈 내놓아라! 내 돈 내 놔! 그게 어떻게 번 돈인데 너 같은 거지가 가져가느냐!”
“허, 천하의 쓰레기가 충신들을 데리고 있었다니 이 어찌 서글프지 않은가!”
당태세가 주통산을 바라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순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주통산이 뒤에 내려놓았던 석자 충룡검을 뽑아들었다.
일순간 주통산의 몸에서 숨겨놓았던 위맹한 기세가 밖으로 터져 나왔다. 아무리 영락했더라도 문주의 재목은 그대로였다.
“죽어라 당태세!”
문답무용, 주통산의 발이 난간을 박차는가 싶더니만 어느새 몸이 하늘로 도약하며 허공에서 검을 아래에서 위로 내리쳤다.
검을 도처럼 쓰는 패도적인 검식이었다. 주통산의 별호 대규호(大叫虎)가 그냥 들러붙은 별명은 아니었다. 슬쩍 목발을 뒤로 빼면서 한발 물러선 당태세의 앞으로 검이 떨어졌다.
하지만 주통산의 검은 땅에 박히는 대신 종이 한 장 들어간 차이로 땅과 떨어지더니 그대로 땅과 수평이 되어 앞으로 죽 밀려오다가 당태세의 발 앞에서 퉁겨 오르며 당태세의 목을 노렸다.
당태세의 왼팔에 잡혀 있는 위가도의 충룡검이 주통산의 검을 가볍게 튕겨 올렸다.
순간 주통산의 검이 위가도의 검을 타고 오르듯 휘감더니 검신을 퉁기고 다시 당태세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당태세의 눈이 커졌다. 재빨리 목을 젖혀 들어오는 검을 피한 뒤 오른 손의 목괴를 들어 검을 쥔 주통산의 오른팔을 쳐냈지만 이미 주통산의 오른팔은 그 자리에 없었다.
순간 몸을 돌려 위치를 바꾼 주통산의 몸이 왼쪽으로 돌며 다시 한 번 당태세의 목을 향해 검을 날렸다. 매섭고 집요하기 그지없는 검초였다.
당태세의 몸이 목괴에 의지하며 땅을 박차고 오른쪽으로 몸을 날리며 위가도의 충룡검을 들어 주통산에게 대적해 들어가자 주통산은 다시 한 번 제자의 검을 퉁기고는 당태세의 목을 향해 일검을 날렸다.
그 순간, 목을 향해 날아오던 주통산의 검이 눈 깜작할 새 궤도를 바꾸어 아래로 내려가 당태세의 하반신을 노렸다.
왼쪽 허벅지를 향해 들어오는 주통산의 검식은 기묘하면서도 신속하여 찌른다고 예고하였어도 막을 수 없는 종류의 초식이었다.
주통산의 검이 당태세의 왼 허벅지에 단단히 틀어박혔다고 생각한 순간, 주통산의 검이 슬쩍 옆으로 미끄러졌다.
“어헛?”
희한한 비명이 새어나온 것은 주통산의 입이었다.
어느새 당태세가 목괴를 거꾸로 잡고 주통산의 오른 발목을 손잡이로 잽싸게 채버린 덕에 자신의 몸이 허공에 떠 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명색이 북경 구대문파의 장문인 주통산이었다.
발이 허공에 뜬 채로 등부터 떨어지기 전 주통산은 재빨리 몸을 뒤집으며 두 발로 땅에 착지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주변을 둘러보는 주통산의 눈빛에는 당혹감만이 가득했다.
“뭐냐. 어찌 된 거야?”
“네 놈이 나이를 먹었구나.”
당태세가 이죽거리며 한 손에 목발, 한 손에 검을 쥐고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는 네 놈과 예전에 겨루었던 합(合)을 다 기억한다. 네놈의 삼첩인경(三疊刃驚)을 까먹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뭐가…….”
순간 당태세의 목괴가 머리를 향해 곡괭이처럼 날아들었다.
주통산의 검이 목괴를 막고 다시 벌떡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순간 주통산의 검이 허리를 베며 매섭게 날아왔고 그 뒤를 왼발을 디딘 당태세의 목괴가 연이어 검을 따라 들어왔다.
주통산이 이를 악물고 검으로 검을 막아내고는 몸을 굽혀 목괴의 손잡이를 등 위로 흘려보냈다. 하지만 그 뒤에 따라온 것은 당태세의 껄껄대는 웃음소리였다.
“이젠 허초와 진초도 구별 못하는 게야? 연공을 안 하는구나?”
순간 고개를 번쩍 든 주통산의 머리 위로 목괴가 떨어졌다. 주통산은 재빨리 몸을 젖히며 뒤로
피하려 하였지만 당태세의 목괴는 퍽 소리를 내며 주통산의 어깨로 떨어졌다.
신음을 내며 일어서서 검을 다시 든 주통산의 앞으로 절름발이 당태세가 히죽히죽 웃으며 겅중겅중 목발로 뛰어오며 왼손의 검을 휘둘렀다. 주통산은 소름이 끼쳤다.
지옥에서 튀어나온 다리 없는 귀신을 봐도 이보다 무섭지는 않을 것이었다.
주통산의 검이 앞으로 뻗으며 들어오는 당태세의 검을 막고 다시 한 번 손목을 돌려 당태세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지없이 당태세의 목괴에 칼이 막히며 목괴의 끝이 오히려 주통산의 허벅지를 찍었다. 당태세의 미소 짓는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부가 쳐지는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괴와 검이 당태세의 양손에서 춤을 추었다.
주통산의 옷자락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목괴의 둔중한 타격이 허벅지와 옆구리, 가슴, 치골을 무작위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배를 맞은 주통산의 입에서 신음이 기합처럼 짧게 끊어지며 흘러나왔다.
어느 새 주통산의 눈이 벌게진 채 다리가 풀린 것이 보였다. 당태세는 웃음을 거두었다.
“이게 문주의 신위라니”
순간, 왼손에 잡힌 위가도의 충룡검이 일체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 뻗어나가 주통산의 가슴팍을 찔렀다. 둔중한 감각이 당태세의 손에 전해졌다.
주통산의 입에서 울컥 선혈이 뿜어져 나오며 땅 위에 시뻘건 웅덩이를 만들어내었다. 도사차림의 노인은 자신의 손에서 칼을 놓았다.
“충룡문은 오늘로 멸문이다.”
털썩 무릎을 꿇는 충룡문주 대규호 주통산을 보는 당태세의 표정에는 모멸감이 한껏 드러나 있었다. 사내는 눈을 끔벅이는 주통산을 보며 조용히 말을 뇌까렸다.
“네 놈은 원한과 복수에 대해 한 마디도 묻지 않는구나.”
“…내 돈…내, 도….”
주통산의 말은 거기에서 끊겼다.
당태세는 한숨을 내쉬고는 모로 넘어가는 주통산을 향해 걸어갔다. 당태세의 손이 죽은 주통산의 옆구리에 붙은 전대를 난폭하게 잡아채었다.
그러자 주통산의 손가락이 잠시 바르르 떨리며 당태세를 향해 움직이다 다시 오그라들었다.
“네 놈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다 가져가마.”
당태세의 마지막 말은 짐승의 으르렁댐과 매한가지였다.
노인은 비틀거리며 목괴에 의지해 한참을 한 발로 서 있더니 다시 오른발을 절뚝이며 땅에 디뎠다.
조심스레 내리막을 내려가는 노인의 뒤로 슬쩍 바람이 감겼다. 햇살에 나뭇가지들이 움직이자 죽은 주통산의 위에 놓인 그림자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좋은 날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