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22화 (22/226)

22. 제남 만연사(1)

다음 날 아침, 당태세는 새벽 일찍 객잔을 나섰다.

객잔에 돌아와서도 술 한 병을 다 비운 아룡은 이미 곯아떨어져 있었고, 그간 쌓인 주독(酒毒)도 만만치 않았는지 새벽녘에는 코를 고는 게 아니라 숫제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내 오늘은 영험한 산에 가서 우리 여정의 안녕을 기원할 것이니 너는 푹 자고 일어나거라.”

“……죄송합니다. 잘 다녀…… 오십쇼….”

아예 이불 밖으로 얼굴도 내놓지 않고 웅얼대는 아룡을 뒤로 하고 당태세는 길을 나섰다. 새벽의 공기는 무겁게 깔려 답답하면서도 서늘한데, 부지런히 가게를 열려고 새벽장을 보고 있는 상인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드물지 않게 보였다.

당태세는 그들 가운데를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노인이 걸어가는 곳은 제남부의 남쪽이었다. 제남부 멀리 남쪽에는 거대한 태산(泰山)이 가로막혀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완만한 구릉을 타고 작은 산이 몇 개 흘러나와 자리 잡고 있었으니 경치 좋은 산마다 사찰이나 도관 하나씩은 다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을 모두 확인한다는 것은 시간이나 몸이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태세는 자신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정보를 모두 동원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당태세는 객잔주인과 나누었던 말을 되씹으며 천천히 남문을 향해 걸어갔다.

***

“이보시오 주인장, 내가 잠시 불사(佛寺)에 참배를 하고 싶은데 말이오.”

객잔주인은 당태세가 말을 걸자 반색하며 말했다. 안 그래도 며칠 같이 얼굴을 보는 새 정이 꽤나 든 모양이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제남에서 가장 영험한 사찰하면 역시 천불사지요. 풍광도 수려하고 부처님도 영험하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역사도 오래된 곳입니다. 자그마치 수나라….”

당태세는 고개를 저으며 객잔 주인의 말을 막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이 근처에 남산이라 부르는 산이 있습니까?”

“남산? 남산이라 하면 저 남문 근처의 야트막한 산을 보통 말하긴 하는데…경치는 괜찮아도 커다란 절은 별로 없습니다. 다들 고만고만한 절 몇 개가 있을 뿐이지요.”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사찰. 분명 고천평이 한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럼 그 근처로 한번 다녀와야겠구먼. 나는 몸이 불편해서 사람이 많은 곳은 질색이라 말이오.”

“그러십시오. 남산도 거닐만하고 좋긴 하지요.”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다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객잔주인에게 주의를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혹시나 아룡 저 녀석이 일어나 내 행방을 묻는다면 그냥 여기저기 구경하러 갔다고 둘러대시구려. 괜히 진지하게 공양하는데 저 놈이 나타나면 치성만 망치기 십상이란 말이야.”

객잔주인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동안 객잔주인도 아룡의 하는 짓을 봐 온 터라 더 이상 첨언을 하지도 않았다. 당태세도 씩 웃으며 문을 나섰다.

***

파란 하늘에 하얀 태양이 훌쩍 모습을 드러내었다. 며칠 째 비가 오지 않았지만 바람은 선선하고 거닐기 딱 좋은 날이었다.

객잔주인이 말한 남산이라 불리는 야트막한 언덕이 당태세의 눈앞에 드러났다.

산 높이는 충분히 목발을 짚고도 올라갈 만한 곳이었지만 울창한 숲이 산의 형세를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뻗쳐 있으니 절로 신묘한 기운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였다.

당태세는 주변을 돌아보며 길을 걷던 도중 길가의 작은 만두가게에 들어갔다. 규모에 비해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꽤 솜씨가 있는 집 같았다.

“만두 하나와 국 하나 같이 주시오.”

속없는 만두와 국을 받아들고 천천히 밋밋한 맛의 만두를 씹어 먹던 당태세는 주름이 깊게 파인 깡마른 식당주인을 보며 슬쩍 턱으로 남산을 가리켰다.

“저 곳에 치성을 드리러 갈까 하는데 영험한 절이 있소이까?”

만주가게 주인은 반색을 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노사가 불심이 좋으십니다. 제남에서 남산만큼 영험한 산은 없지요. 솔직히 저 곳에 있는 산이 천불사보다 영험하다고 하더이다. 저 곳에 사자사나 미륵사 같은 곳이 신불(神佛)의 명호를 입었다고 말들 하지요!”

그동안 손님들이 제대로 말을 걸어준 적이 없어 심심했는지 가게주인은 한 번 말을 거니 청산유수였다. 당태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국사발을 입에 가져간 뒤 다시 물었다.

“거기 도사님도 들어가는 절이 있다고 하던데?”

“아, 나이 지긋한 도사님도 절에 가더라고, 그건 어찌 들으셨소? 저 산 중턱에서 서쪽으로 뻗은 길을 타면 만연사라고 있어요. 굉장히 조용한 곳인데…그곳은 사람들이 잘 안 갑니다. 보시를 좀 많이 해야 제대로 기도를 한다는 소리도 있고.”

“아, 비싸구먼.”

“그렇지요.”

“그럼 미륵사나 들러야겠네.”

“잘 생각하신 겁니다.”

당태세는 더 말을 걸지 않았다. 노인은 남은 만두와 국을 입에 넣고 한꺼번에 우물우물 삼켰다. 입을 연신 놀리면서도 당태세의 눈동자는 벽을 뚫어버릴 듯이 한 곳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

“만연사라.”

당태세는 목발을 짚고 산길을 올랐다.

아무래도 비탈길은 평지와는 달리 힘이 들어갔고 오른 다리가 느끼는 통증은 조금씩 강도가 세어졌다.

아직까지는 시원한 짜릿함이 다리를 건드리는 것 같았지만 조만간 오른 다리는 디디는 것이 버거워지고 무거워지며 고통스러운 짐이 될 것이었다.

당태세는 입을 다물었다. 발을 더 느리게 디뎠다. 오늘은 힘의 안배를 잘 해야 하였다.

사내의 짐작이 맞다면 충룡문주 대규호 주통산은 이 곳에 몸을 숨기고 은신해 있었다. 제자를 몇 명 데려왔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위가도는 데리고 있을 터였다.

충룡문의 후기지수였던 충룡사영, 그 중에서도 위가도는 성마르고 편벽된 성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실력만큼은 괜찮은 위인이었다.

“그래봤자 사영(四英)이지. 꽃부리가 고목에게 당할손가.”

당태세는 혼잣말을 내뱉었다가 걸음을 멈추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 다시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하였다. 이번에는 한숨이 말과 함께 섞여 나왔다.

“아니지. 이젠 꽃부리로 불릴 나이가 아니지 않은가. 난 고목이 아니라 썩은 뿌리에 가깝고.”

당태세는 움직이며 자신의 오른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목괴를 만져보았다. 자단으로 만든 나무막대가 잃어버린 오른발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충룡사영과는 자웅을 겨룰 수 있다 쳐도 그 위, 자신과 동렬인 충룡문주와 어찌 될지는 미지수였다.

충룡문주 대규호 주통산은 어쨌거나 석자 황룡검을 자신의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검호였고, 그 실력이 그를 북경 구대문파의 하나로 올라오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당태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실로 오늘 하루는 지금까지 겪은 제남의 모든 날들을 합한 것보다 힘들 터였다.

“허허, 충룡대주라니, 예전에 이곳을 몇 번 방문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소승이 알지 못하오. 불법만 광대무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종적도 마찬가지인데 어디서 어떻게 왔다 가는지 조그만 선방의 중이 무엇을 알겠소이까.”

만연사의 상좌는 애초에 승적에 적을 둔 사람인지 아니면 닳고 닳은 산동 상인인지 모를 법한 위인이었다. 용모도 투실하니 비대한 몸에 가느다란 눈초리 사이로 번득이는 안광이 용맹정진 불도에 매진하기보다는 초지일관 치부에 집착할 만한 사람으로 보였다.

당태세는 조용히 허리춤에서 은자 조각을 슬쩍 손바닥 위에 보이게 올려놓고는 허리를 숙여 합장하면서 상좌승의 발치 아래에 놓았다.

그러자 뚱한 표정을 짓던 상좌의 발이 움직여 은자를 살포시 밟더니만 허헛 크게 기침을 한 번 하고 고개를 돌려 근엄한 표정으로 능선이 이어지는 산마루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 산이 오늘따라 눈에 잘 띄는 것이 신통하구먼. 분명 덕을 많이 쌓은 이가 머무는 곳이 틀림없도다. 머무는 사람의 향기가 이곳까지 퍼지는 듯하구나.”

“충룡대주 주통산을 말하시는 것입니까?”

“허허, 관세음보살.”

당태세는 말없이 다시 한 번 합장을 하고 상좌승을 뒤로한 채 길을 나섰다.

상좌는 절름발이 노인이 나뭇가지에 가려져 종적을 감출 때까지 뒷짐을 진 채 서 있다가 다리가 아픈 듯 몸을 구부려 발가락을 어루만졌다.

다시 고개를 든 상좌승의 표정은 만족함이 한껏 서려있었다.

당태세는 상좌가 일러준 방향으로 목발을 짚고 올라갔다.

가파른 산길을 목발에 의지해 나가는 것은 생각 외로 어려웠다. 창두를 목괴 끝에 끼우지 않은 것이 다행한 일이었다. 만약 창을 목발에 끼웠다면 발을 디디는 게 더 어려웠을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놈들이 남아 있는지 알 수가 없군.”

아마 본관의 모든 인원이 작은 사찰로 들어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개중에서도 실력 좋은 몇 명 추려 들어왔을 것이고, 그들은 요소에 배치되어 들어오는 자를 감시하고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당태세가 작은 소로 초입에 도달하자 근처 나무 둥치 두 곳에서 사내 둘이 나타났다. 한 눈에 보더라도 지금까지 만났던 충룡방의 졸개들과는 다른 기도를 띄는 이들이었다.

“노사, 어디를 가시오.”

“이 곳으로 가면 작은 암자가 하나 있는데 내 그곳에서 치성을 드릴 게 있소이다.”

두 녹의인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손을 내저었다.

“지금 그곳은 폐쇄되었소이다. 가시면 안 되오.”

당태세는 이 앞에 주통산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상좌승은 정직한 사람이었다. 돈 앞에서는 진실을 말할 줄 아는 위인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러지 말고 보내주시오. 내 딸이 아프단 말이오. 한 다경만 빌고 나오리다. 안되겠소?”

“노사. 폐쇄되었다는 말 못 들었소?”

“제발 부탁이오. 내가 오죽하면….”

그때, 당태세가 쥐고 있던 목발이 슬쩍 돌에 밀리며 몸이 기우뚱 옆으로 쏠렸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녹의인 하나가 화급하게 움직여 당태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때 조금 떨어진 오르막에서 두 명의 녹의인이 더 내려오는 게 눈에 띄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이 노인은 뭐고?”

“암자에 치성을 드리러 가야 한답니다. 딸이 아프다고….”

녹의인 둘이 목발을 짚은 채 구석에 서 있는 당태세를 보더니 쯧쯧 혀를 차면서도 엄한 목소리로 자신의 동료들을 채근했다.

“아무리 그래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을 못 받았나? 더 이상은 안 된다.”

“노사, 돌아가시오. 이 이상은 아니 되오.”

“아니 이런 법이 어디 있소? 장정 네 명이 이 병든 노인 하나를 못 들어가게 막다니!”

녹의인 하나가 고개를 저으며 더는 안 된다는 듯 당태세의 어깨를 잡고 뒤로 몸을 돌리는 순간, 당태세의 왼발이 축을 돌며 자신의 어깨를 잡은 녹의인의 옆구리를 왼쪽 팔꿈치로 강하게 내질렀다.

순간 자세가 무너지는 녹의인을 어깨로 들이받으며 당태세가 뒤로 돌며 목괴를 겨드랑이에서 빼내었다.

당태세의 손에 들린 목괴가 호선을 그리며 다른 녹의인의 목을 강타하였고 그 기세를 타고 맞은편에 멍하니 서 있던 녹의인의 가슴팍을 손잡이로 아래에서 위로 올려 찍었다.

부드득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가슴을 움켜쥔 녹의인을 밀치고 당태세의 몸이 남아있는 녹의인에게 달려들었다.

당태세의 손아귀 안에서 목괴가 현란하게 움직이며 맹금(猛禽)이 먹이를 낚아채듯 서 있는 사내의 태양혈과, 백회, 염천을 순식간에 격타하였다. 순식간에 세 명이 그대로 비명도 못 지르고 뒤로 넘어갔다.

오직 하나 옆구리를 팔꿈치로 맞은 녹의인만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사내가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당태세의 쇳덩이 같은 손가락이 녹의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위에 몇 놈이나 있느냐!”

“누…누구….”

당태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녹의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고 숨이 막히는지 컥컥대는 소리와 함께 입에서 흙이 튀어나왔다.

“몇 놈이야!”

“방주님과 호법님! 그리고 두 명이 더 있습니다! 제발!”

그 순간, 당태세의 손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녹의인의 숨소리가 멎었다. 당태세는 다시 목발을 짚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사내의 이글대는 눈초리는 오르막 위쪽에 못 박혀 있었다.

“드디어 찾았구나.”

노인의 혼잣말은 낮고 조용했다. 하지만 당태세의 심장은 목소리와 달리 세차게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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