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산동 제남(6)
“거 참 희한한 사람 아닌가.”
갑작스레 혼잣말을 하는 노인을 보던 사내 하나가 노인을 보며 물었다.
“뭐가 말이오? 노사.”
노인이 손가락으로 건너편 주루를 가리켰다.
“며칠 전부터 이 곳을 오가며 만금을 기루와 객잔에 뿌리는 사내인데 그 정체를 알 수가 없소이다.”
“만금?”
윤방주가 슬쩍 눈썹을 꿈틀대며 노인과 건너편 주루를 번갈아보았다. 노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내가 저 친구와 같은 객잔에서 묵고 있는 사람이오. 왜 거 서점에서 대역죄인이 끌려가던 날 있잖소! 그 날 사람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던 우국지사가 저 친구란 말이오.”
노인의 말이 끝나자 세 사람은 모두 노인에게서 시선을 돌려 서로를 쳐다보고는 다시 주루의 사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천하의 고고한 지사 같더니 그날 이후부터는 완전히 술고래에 기녀 치맛자락만 쫓아다니는 호색한이더라 이거지! 거 참. 젊은 사내가 돈을 물 쓰듯…….”
그 말을 듣고 있던 방주 하나가 말을 걸었다.
“그러니까, 저 자가 그 서점주인이 끌려간 날부터 갑자기 돈을 쓴다 이거요?”
“아니, 꼭 그날부터 돈을 쓴다는 것은 아닌데 말이오…….”
노인은 말꼬리를 의뭉스럽게 흐리더니만 슬쩍 주점을 보며 야릇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맘에 안 든다니까. 젊은 놈이.”
우락부락한 인상의 녹의인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순간 다른 이들이 그를 말렸다.
“이보게 휘세. 지금 당장 달려갈 심산인가?”
“조사정도야 가능한 거 아닌가.”
“그렇지. 조사 정도라면야.”
그러자 옆에 있던 턱이 네모진 사내 하나도 같이 몸을 일으켰다.
“이보게 윤방주, 자네 말 대로면 꽤 무공도 있는 놈일세. 아무리 대취했어도 혼자보단 같이 가는 것이 나을 것이네.”
“괜한 수고야.”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나도 같이 가야겠구먼. 대비는 해야지.”
옥신각신하던 세 사람은 결국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루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 사람은 그들에게 말을 걸었던 노인이 먼저 계산을 끝내고 다관을 나선 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노인은 어느새 다관에서 걸어 나와 다관에서 보이지 않는 골목의 건너편으로 몸을 옮기는 중이었다.
녹의인 세 사람은 거침없이 주루로 들어가 주인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만 이미 대취하여 정신을 반쯤 잃은 아룡을 양쪽에서 거침없이 부축하고 쏜살같이 주루를 빠져나왔다.
방주 세 사람은 자기들끼리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바로 아룡을 옆에 끼고는 길의 서쪽으로 접어들어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길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길을 열어주었다.
으레 있던 일인지 충룡대가 사람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당태세는 이제 다관에서 보이지 않는 골목길을 접어들어 아룡을 잡아가는 사내들을 따라 한 골목 먼저 넘어가 그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내들의 걸음걸이는 빨랐고, 목발을 짚고 그들 앞에서 길을 지레짐작해야 하는 당태세의 걸음은 그보다 훨씬 느렸다. 자기도 모르게 당태세의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사내들은 좌고우면 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고 어디로 들어가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익숙한 골목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아룡을 잡아들여 가는 곳은 인적이 드문 골목길의 끝. 사로(死路)였다.
똑같은 행보, 똑같은 방식, 똑같은 구조의 건물.
언제부터 우발적 범행이 상습이 되었던 것일까 당태세는 가늠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서점주인은 첫 번째 희생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갖지 않으려 노력한 죄책감이었지만 이젠 일 푼의 돌덩이도 마음에 떨어지지 않았다.
노인의 괴와 왼발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며, 눈에 광망이 감돌았다.
***
“이놈 배짱 하나는 두둑하구먼. 두 사람 어깨 사이에서 잠들어버린 놈이 이놈이 처음 아닌가?”
동향방주 윤휘세를 따라 온 남향봉주 모혁종이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아룡을 내려놓았다.
“이 인사는 언제부터 술을 퍼마셨기에 냄새가 진동을 하는가? 아예 내가 먼저 취할 지경이네.”
서향방주 이세중이 히죽 웃으며 안채의 문을 닫아걸었다.
“꽤 주머니가 두둑한 놈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대담한 놈이거나.”
윤휘세는 슬쩍 곯아떨어진 사내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아룡의 손을 만져보았다. 윤휘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대로 무공을 배운 놈은 아닌 것 같은데? 무공을 쓴다 해도 잡졸 수준을 겨우 벗어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래? 그럼 별 수 있나. 술에서 깨어나서 문초해 보고 있는 돈이나 다 털어내기로 하세.”
그 순간 윤휘세가 아룡의 허리춤에서 쩔렁대는 전대를 슬쩍 만져보더니만 모혁종을 보며 히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굳이 깨울 필요 없겠어.”
“음?”
“그냥 지금 보내버리세.”
그때였다. 안채 위에 달려있던 종이 딸랑딸랑 울렸다. 누군가가 바깥 대문에 달려있는 줄을 당긴 것이 틀림없었다. 세 사람은 동시에 얼굴을 마주보더니 모두 한입으로 같은 말을 내었다.
“고교두님이신가?”
모혁종이 안채를 열고 뛰어나가 작은 마당을 건너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쾅하는 소리와 함께 모혁종이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순간 안채에서 아룡을 묶고 있던 두 사람의 목이 동시에 열린 문을 향해 돌아갔다.
나동그라진 모혁종을 뒤로 두고 아까 다관에서 만난 노인이 목발을 짚고 빠른 걸음으로 안채를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당신 누구야!”
“문이나 닫아걸어라.”
모혁종이 빽 소리를 지르자 노인은 뒤로 고개도 안 돌리고 한마디를 던진 채 안채를 향해 발을 옮겼다.
두 명의 방주가 채 손을 쓰기도 전에 안채에 들어선 노인은 채 묶이지 않은 채 탁자 위에서 곯아 떨어져 버린 아룡을 보더니만 괴이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 세상에 미친놈이구먼. 이 시국에 잠을 자고.”
“노사, 이곳에 무슨 일인가! 당신 대체 누구야!”
윤휘세의 말에 당태세가 슬쩍 고개를 들더니 씩하고 웃어보였다.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미안하이.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자네들에게 소개시켜준 것 같아서.”
“뭐라고?”
“자네들이 서점주인에게 하듯이 생사람 잡으면 안 되지 않는가.”
동향방주 윤휘세와 서향방주 이세중이 서로 눈을 마주보더니 순간 탁자의 양 옆에서 똑같은 속도로 품에서 단도를 꺼내들고 당태세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 사람의 협격하는 속도와 자세, 좁은 건물 안에서 긴 몽둥이대신 단도를 뽑아든 것부터가 일전에 당태세가 상대했던 이들과는 기량의 차이가 현격하였다.
하지만 당태세 역시 한 보 반을 뒤로 빼면서 들고 있던 목괴를 들어 들어오는 사내 둘의 공격을 막자마자 옆으로 비질을 하듯 길게 후려치며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괴창을 뻗어내어 이세중의 중심을 흩어버렸다.
이세중이 뒤로 벌러덩 넘어지는 것과 동시에 목괴 아래 붙은 창두가 번득이며 이세중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 마당에서부터 달려온 모혁종의 나무 몽둥이가 당태세의 괴창을 막아내었다.
당태세가 오른발을 뒤로 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틈을 타고 이세중이 뒤로 굴러가는 새, 윤휘세와 모혁중이 단도와 몽둥이를 들고 당태세를 급습하였다.
당태세는 다시 괴창을 휘릭 거꾸로 잡는가 싶더니 손잡이 부분으로 모혁종의 몽둥이를 걸어 당겨 윤휘세의 진로를 막아냈다. 그리고 번개처럼 다시 괴창을 한 바퀴 돌리며 창두로 모혁종의 목을 그어버렸다.
괴상한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는 모혁종의 뒤로 이세중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덤벼들자 당태세는 쓰러진 모혁종의 뒷멱살을 붙잡고 이세중에게 던지더니만 괴창을 그대로 옆으로 뻗어 돌격해 들어오는 윤휘세의 배를 보이지 않는 속도로 찌르고 빠졌다.
짧은 비명과 함께 윤휘세가 칼을 놓고 제자리에 주저앉는데, 당태세는 쓰러지는 윤휘세를 발로 걷어차고는 다시 자리를 옮겼다.
어느새 이세중을 제외한 두 명의 사방방주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질펀하게 피를 쏟아내고 있는데 두 사람 모두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았다.
짧은 단도를 쥐고 섣불리 발을 떼지 못하고 있는 이세중을 보며 당태세가 집의 어두운 그림자 사이에서 슬쩍 문이 열려 있는 햇볕 드는 양지로 빠져나왔다.
햇살을 등지고 있는 어두운 노인의 형체에서 씩하니 하얀 이가 드러나는 것이 이세중의 눈에 들어왔다.
“죽고 싶은가.”
“너, 넌 누구냐!”
“네놈의 스승이 고천평이냐?”
“우우, 우리 고교두님을 어찌 아니냐?
“그건 네 알 바 아니고…….”
당태세가 슬쩍 이세중의 뒤를 보더니 벌어진 잇새가 더 환하게 드러났다. 이세중은 지금 자신이 늙은 광인(狂人)고수와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이 누구 관할이냐? 동향방은 내가 어지럽혔으니 아닐 테고.”
당태세의 말을 듣던 이세중의 눈이 분노에 휘감겼다.
“네놈이 동향방에서 우리 문도들을 척살한 살수였구나! 네 이놈! 정녕 내 놈은 제남에서 살아나갈 수 없으리라!”
하지만 당태세는 이세중의 일갈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재차 자신의 질문을 되물었다.
“여기가 네 놈의 관할이냐? 서향방이냐?”
“빌어먹을 놈! 그래! 내가 서향방주 이세중이다!”
“고천평은 어디 있느냐? 언제 오느냐?”
“죽일 놈! 네가 그것을 알아서 무엇을 하려고?”
당태세가 다시 이세중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광인과 같은 노인의 웃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미소가 있던 자리에는 굳게 다문 입술만이 놓여 있었는데 엄숙하게 뒷짐을 지고 괴창을 떡하니 앞에 세운 노인의 모습에서는 역전의 맹장과 같은 위용이 흘러나왔다.
“아까 다관에서 들었다. 조금 늦는다고 하였지?”
“뭐? 뭐?”
“지금쯤이면 시간이 대충 맞겠구나.”
“이, 이보시오.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충룡대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서릿발 같은 매서운 말투가 이세중의 말꼬리를 자르고 작은 집 안을 뒤흔들었다.
“네놈은 죄 없이 돈을 강탈당하고 죽은 제남의 성민들을 기억하거라.”
“뭐?”
“그들이 명부에서 네게 비용을 청구할 것이니.”
순간, 당태세의 몸이 풀쩍 뛰어오르듯 이세중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어두운 수풀 사이에서 나타난 맹호가 토끼를 채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세중은 채 단도를 잡고 자세를 취할 틈도 없었다.
경악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커진 이세중의 눈이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날아드는 하얀 변발과 그 앞에서 송곳니처럼 튀어 오르는 번쩍이는 창날이었다.
당태세는 의자를 끌어내고는 천천히 의자에 주저앉았다.
두 손이 붙잡고 있는 오른 무릎과 발목은 이제 감각이 없을 지경이었다. 한 발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유리조각을 밟고 가는 듯한 통증이 허리를 타고 머리까지 징징 울려대었다. 진땀이 이마에서 뺨으로 흘러내렸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고 기나긴 한숨을 내쉬는데, 탁자위에 놓인 아룡의 코고는 소리가 한숨과 뒤섞여 묘한 음률을 만들고 있었다.
한숨을 쉬던 당태세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룡을 보더니만 피식피식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네놈의 운명은 주신(酒神)이 결정하겠구나.”
당태세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
짙은 굵은 누에 같은 눈썹 아래로 메기 같은 수염이 꿈틀대는 녹의의 장한이 다관에 홀로 앉아 있었다.
사내의 덩치는 실로 불전의 탱화에서나 볼 법한 금강역사의 현현 같았는데, 보통 장정의 두 배는 됨 직한 손으로 작은 다구에 차를 따라 마시는 장면이 엄숙하기도 하고 일견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내 앞에서 감히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만의 하나, 그에게 시비를 걸러 가던 사람이 있다 하여도 사내의 허리춤에 찬 시퍼런 광망이 도는 쇠몽둥이를 보게 된다면 전의를 상실하고 말 터였다.
그런 사내에게 한 꼬마가 조르르 달려가 작은 서찰을 전해준 것은 녹의장한이 다관에 들어온 지 반각도 지나기 전의 일이었다.
- 서향방 비밀가옥. 방주집회. 동향방 혈사 용의자 심문 중
녹의장한은 다 읽은 서찰을 한 주먹에 꼬깃꼬깃 접어버렸다. 장한은 뜨거운 찻잔을 들어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거대한 종에 다리가 달려 다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사내가 빠져나가자 그림자가 걷히고 다관 안에 다시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건너편 주루는 시끄러운 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