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산동 제남(5)
당태세는 자신이 자행한 일이 못해도 이틀이나 사흘 내에 커다란 폭풍이 되어 제남부 안을 들쑤시게 될 것으로 예견하였다.
하지만 노인의 예상과는 반대로 그 일이 있은 뒤 사흘이 지났건만 제남부는 평온무사하기 그지없었다.
당태세는 생각이 많아졌다.
“양들이 사방을 들쑤셔야 사냥하기가 더 편한 법이거늘….”
당태세는 자신의 건너편 침상에서 코를 골고 자고 있는 단성룡을 슬쩍 쳐다보았다.
시간을 보아하니 아룡은 어젯밤 통금이 떨어진 뒤에 들어온 듯싶었는데 당태세가 누워있는 곳까지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것으로 보아 하루 종일 무슨 일을 하고 다녔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양은 쏘다니질 않고 개만 사방으로 돌아다니는군.”
당태세는 늘어지게 자고 있는 아룡은 내버려 두고 호화로운 객잔의 큼지막한 방에 누워서 앞으로 무슨 일을 벌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각보다 충룡대의 위세는 크지 않았다. 예전 북경에 있을 때 충룡문의 규모는 일백삼십이 아니라 근 천명에 가까운 거대문파였다. 다른 팔대문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자성의 반란군을 막기 위해 황성에 모였던 보국구대문파맹(保國九大門派盟)은 속가제자를 다 철수시킨 뒤에도 모두 합쳐 오륙천은 되는 군세였다.
그 군세만 그대로 유지되었어도 황제는 자신의 몸을 건사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아니, 노도처럼 밀려오는 청나라의 군세를 막지는 못했을지언정 처참하게 홀로 자진(自盡)을 택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어쩌면 지금도 어딘가의 번왕이 되어서 목숨은 연명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일은 어찌 되었는가, 당태세의 순천문을 제외한 나머지 문파들이 한꺼번에 배신하고 순천문을 뒤에서 공격하지 않았던가.
그날 순천문은 황성 문루 앞에서 멸문하였다. 그리고 명도 그날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날 당태세는 자식과 아내를 잃고 근 이십 년이 다 되도록 손발 하나 움직이지를 못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당태세의 침잠했던 눈빛이 다시 파랗게 타올랐다. 지금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채워야 할 계제가 아니었다.
아니, 앞으로 남아있는 생 중에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넘봐서도 안 되는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복수다.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있고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손발이 움직인다면 끝까지 남을 것은 복수뿐이었다. 이렇게 뜬구름 잡는 시간은 아깝기만 할 뿐이었다. 그 시간에 부지런히 움직여 한 명이라도 더 지옥에 끌고 가는 것이 급박했다.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신중하다는 말일 테지.”
당태세는 뭔가를 생각하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죄 없는 사람과 의뢰인이 둘 다 죽었으니.”
그때였다. 시체처럼 누운 채 코만 골아대던 아룡이 부스스 눈을 뜨더니 고개를 들었다. 아룡은 자기 배를 벅벅 긁더니만 주위를 둘러보다 당태세와 눈이 마주치자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숙부님… 일어나 계셨습니까?”
“지금 일어났느니라. 많이 마셨느냐?”
“아이구. 아닙니다. 머리가 조금 어지럽지만…허허, 사내가 이 정도로 누워있을 수야 있겠습니까?”
아룡은 당태세가 말을 걸자마자 퀭한 눈에 정기가 흐르고 호연지기가 물씬 풍기는 모습으로 불쑥 침상 위에 앉는데 실로 허풍과 위세 하나만큼은 타고 난 녀석이었다. 당태세가 그런 아룡을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네가 영웅호걸이로구나. 말술을 마다하지 않고 다음 날 멀쩡한 것을 보니 협객지풍을 타고 난 것이 틀림없다.”
“하하하! 뭐 이런 것을 가지고 그러십니까! 이 정도는 약과지요!”
“그래그래! 그건 그렇고 오늘은 조금 쉬어도 되지 않겠느냐?”
“쉬… 쉬라고요?”
당태세가 슬쩍 걱정스런 어조로 말을 걸자 아룡은 머리를 흔들더니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결연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제가 제남부에 와서 마음먹은 바가 있습니다. 이곳에 유명하다는 주루의 술은 다 한번 먹어보고! 훌륭하다는 기루는 한 번 씩 다 들려볼 작정입니다! 오늘로 제가 사흘을 묵었으니 앞으로 사흘이면 어느 정도는 성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호라, 네 기상이 마치 전쟁에 임하는 장수 같도다. 장하구나! 자고로 풍류라는 것은 그리 즐기는 것이지!”
“역시 숙부님이 저를 알아주십니다!”
그때였다. 당태세가 아룡을 보고 잠시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손바닥을 딱 치며 청년을 다시 바라보며 진중하게 말하였다.
“아직 여비도 있고 넉넉한 편이니 풍류를 즐기는 것을 뭐라 할 수야 있겠느냐! 하지만 하나 걱정되는 게 있구나.”
“그게 무엇입니까?”
아룡이 슬쩍 혀가 꼬인 말투로 다시 되묻자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원래 헌헌장부에 외모도 대가의 귀공자 같으니 기루에 가면 가진 것에 비해 더 대접을 받을 상이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때문에 너를 노리는 사특한 자들 또한 꼬일 것이 아니냐? 원래 외지인들이 도적이나 하오문의 부류 같은 놈들이 표적이 되는 것이지!”
당태세의 말에 아룡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숙부님, 저도 어지간한 공부는 한 놈입니다. 하오문 같은 비류들이 어찌 감히 저를 넘보겠습니까?”
아룡은 이미 자기가 어디 출신인지 다 잊어버린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당태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찌 네가 멀쩡할 때 그들이 너를 대하겠느냐? 원래 비루한 자들은 네가 술 취하거나 잠을 자거나 하여간 그런 방심한 틈을 타서 돈과 목숨을 노리는 것이니 그에 대한 대책은 당연히 있어야 하느니라.”
“그럼……오늘은 조금만 마실까요?”
약간 기세가 죽은 아룡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당태세가 손가락을 펴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어제 길을 걷다 듣기로는 저 위 서북쪽 거리로 조금만 올라가면 충룡대의 본진이 있다더구나. 네가 취기가 오르게 되면 충룡대가 있는 근처로 자리를 옮기면 될 것이다. 그들은 황제의 녹을 받는다 하지 않았더냐?”
“역시 오래 사신분의 말은 들으면 재수가 좋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군요! 참 좋은 생각인 듯싶습니다. 오늘 저는 충룡대 앞에서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시겠습니다! 이 무두리 역시 황실의 복락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놈이라 이겁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자꾸나! 나도 오늘은 천천히 이곳저곳 돌아다녀 볼 터이니!”
아룡은 당태세가 맘에 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수발들며 다니기로 한 노인이 혼자 풍광을 보며 즐길 테니 알아서 놀라는데 기분 나쁠 사람이 누구겠는가.
오히려 노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객잔에서 나가 어제와 같은 환락에 빠져보고 싶어 저절로 안달이 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아룡이 조반도 먹는 둥 마는 둥, 낯도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객잔 밖으로 빠져나가자 그 모습을 보던 당태세도 슬쩍 자신의 괴를 짚고 허리를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이야말로 진짜 목표로 하던 이들을 잡을 때였다.
“그 전에 먼저 가 볼 곳이 한 군데…….”
당태세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품 안에서 슬쩍 종이를 꺼내들었다. 종이를 꼼꼼히 확인하던 노인은 자신의 미간에 저절로 주름이 새겨지는 것을 알지 못했다.
***
조반을 마치고 해가 중천을 향해 가기 시작할 즈음, 당태세는 느릿하게 괴를 짚고 작은 다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기루와 주루가 줄지어 있는 번화한 제남의 대로변은 이른 시각부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희락을 찾는 자와 근심을 줄이려는 자가 아침부터 술을 찾았다. 당태세는 술을 찾는 이들 사이에서 차를 마셨다.
다관은 조용했고 들어오는 자는 적었지만 정갈하고 조용하였다.
가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다향을 흠향하며 맞은편에 보이는 객잔의 떠들썩함을 구경하는 악취미를 가진 이들인 듯 보였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 다관은 대로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목발을 짚은 노인 하나가 조용히 다관으로 들어와 구석에 앉아 차를 주문하였다.
노인은 차를 우려내는 동안 한 마디도 없었다. 노인의 시선은 다관의 바깥 커다란 주루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곳에서는 한 훤칠한 장부가 아침부터 부어라 마셔라 술과 안주를 먹으며 주루의 여인들과 웃음꽃을 피우는 중이었다.
노인은 게슴츠레 장부의 얼굴을 쳐다보더니만 비웃음인지 찬탄인지 모를 기묘한 미소를 머금고 찻잔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때였다. 다관 안으로 녹색의 그림자 세 개가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새어 들었다.
사내들이 들어오자 다관의 주인은 말없이 그들을 창가의 자리로 인도하였고, 녹의의 사내들은 일언반구 없이 자리에 앉아 차를 기다렸다. 익숙한 일상인 듯 보였다.
그들은 다른 충룡대원들과 같은 녹포에 허리끈 아래로 짧은 몽둥이를 하나씩 차고 있었지만 은색 이파리가 붙은 두건을 쓰고 허리띠에 은사가 수놓아진 것이 다른 이들의 복식과 약간 차이가 있었다.
구석에 앉아있던 노인이 슬쩍 자신의 다구를 가지고 사내들의 옆에 있는 자리로 옮겨왔다. 하지만 녹의인들은 노인의 거동에 관심을 갖지 않는 듯싶었다.
“고교두께서는 안 오시는가.”
“오늘은 늦으실 거라 하였네.”
세 사람은 대화가 거의 없었다. 모두 차가 나올 때까지 자리에 앉아 노인이 한 것처럼 길거리 너머의 주루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이들은 휴식과 치안 감시를 병행하는 듯 주루를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같이 날카롭고 차가웠다. 하지만 그 중 하나의 입에서 뜬금없이 한숨이 새어나오자 옆에 있던 이가 그를 보며 어깨를 슬쩍 두드렸다.
“이보게 윤방주. 너무 낙망하지 말게. 곧 실마리가 잡히겠지.”
“미안하군. 황망한데다 정신이 없네.”
윤방주라 부른 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입에 가져가자 다른 이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나. 누가 충룡대를 습격하고 대원을 암습해?”
“돈이 목적이었겠지. 한 푼도 없었어.”
“그렇다고 충룡대 돈을 턴단 말인가? 간도 큰놈이지. 이곳 물정 모르는 외지인이 틀림없네.”
윤방주를 다독이던 다른 방주가 으르렁대자 윤방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건물이 어디며 그 돈이 누구에게 가는지 알았다면 그런 짓은 못했겠지.”
“그나저나 미안하군. 그런 일에는 모두 합심해야 하는 건데. 자네에게만 일을 떠넘겨서….”
윤방주가 고개를 내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닐세. 다들 같이 하기로 한 일 아닌가. 한두 번도 아니고. 내가 신경 못써서 생긴 실수인 게지”
조용히 뒤에서 사내들의 말을 듣던 노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노인은 차를 마신 뒤 수염을 닦는 척 하며 사내들의 인상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근골이 뚜렷하고 팔에 힘이 붙어 있는 것이 보이는 무골들이었다.
이들이 충룡대를 지탱하는 동서남북 사대방주가 분명해보였다. 그리고 이들은 분명 같은 비밀을 공유하는 처지였다.
“한 배에서 나온 놈들이 다를 리 있는가.”
노인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세 사람이 앉아있는 곳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앉아있던 세 명의 충룡방주들이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노인의 시선이 가는 곳으로 같이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쾌남아 하나가 술을 마시며 여인들과 앙천대소를 하는 모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