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7화 (17/226)

17. 산동 제남(4)

“정신이 드나?”

무뚝뚝한 남자의 말투에 젊은이는 정신을 차렸다.

머리 옆 부분이 찡하는 소리와 함께 말 못할 고통이 찾아왔다. 손바닥에도 얼얼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머리에서 울리는 통증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젊은이는 눈을 꽉 감았다가 다시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익숙한 안채의 풍경이 시야에 잡혔다. 충룡대 동향방 중 몇 명만 알고 있는 비밀가옥의 안이었다.

젊은이는 그제야 자신이 구역질나는 악몽에서 깨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어젯밤에 마셨던 술이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사내는 한숨을 쉬고는 뻑뻑한 눈과 얼굴을 닦아야겠다는 생각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몸은 천근만근이 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사내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슬쩍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사내는 눈이 화들짝 커졌다.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손과 발이 탁자 위에 꽁꽁 묶여 있었고 탁자 옆에는 변발을 한 노인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앉아 조용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기보다 약골이군.”

그제야 젊은이의 머릿속에서 조금 전 무슨 일이 이곳에서 벌어졌는지 기억이 되살아났다. 사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자신이 묶여 있는 탁자는 다름 아닌 서점주인 최가를 때려죽일 때 썼던 탁자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려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거위가 꽥꽥되며 우는 듯한 소리였다.

노인이 사내를 한심하게 쳐다보더니 입에 물려놓았던 헝겊을 빼주었다.

공포에 질린 사내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울렸다.

“너…너는 누구냐! 이건 뭐하는 짓이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구나.”

노인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어느새 노인의 손에는 왕대인이 건네주고 간 돈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젊은이는 등골이 오싹했다. 지금 이 탁자의 아래에는 왕대인과 자신의 동료가 죽어 넘어진 채 뒹굴고 있을 터였다.

“이 정도 돈이면 돌아다니는데 부족함은 없겠구먼.”

“돈이냐? 돈이 목적이었느냐?”

당태세의 눈이 묶여있는 충룡대원을 쳐다보았다. 충룡대원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이미 눈썹도 반은 하얗게 된 중늙은이였지만 그 아래에서 빛나고 있는 차가운 안광은 사람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노인이 빤히 충룡대원을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널 살려 두진 않았겠지.”

“네 이놈! 우리가 누군지 알고 이런 패악을…….”

분기에 넘쳐 소리를 지르려던 사내의 입이 벌어지며 말 대신 비명이 새어나왔다. 어느 새 노인의 손가락이 갈빗대 아래로 파고들더니만 뼈를 움켜쥐고 비틀었다.

비명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사지를 뒤틀고 꺽꺽대는 소리만 입에서 새어나오는데 마치 자신이 도축장의 돼지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하는 말에만 대답해라. 알았느냐?”

“네! 네! 대인!”

“영특하군.”

노인의 손이 몸에서 빠져나갔다. 충룡대원의 눈이 자신의 몸과 노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느새 두통은 씻은 듯 없어졌다. 지금 그의 앞에 앉아있는 노인이 풍기는 기운에 비하면 두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음이 노인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앉아있었다.

“주탕산은 살아 있느냐?”

충룡대원의 입이 삽시간에 말라붙었다.

“대…대주 말씀이십니까?”

“충룡문주 주탕산. 대규호(大叫虎) 주탕산.”

사내의 고개가 앞으로 움직였다. 사내의 몸동작을 본 노인이 슬쩍 품에서 단도를 꺼내더니 옷자락에 슥슥 문지르기 시작했다.

노인의 눈동자에 검날의 빛이 반사되어 기묘한 빛을 만들어냈다.

“멀쩡하겠지? 정정하냔 말이다.”

“네, 정정하십니다! 아침저녁으로 운공을 거르지 아니하시고…….”

“견자새끼.”

사내의 입이 다물렸다. 눈동자만 커진 채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새하얗게 타오르는 노인의 눈빛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노인은 묶여있는 충룡대원을 보지도 않고 질문을 던졌다.

“너희 본채는 어디에 있느냐?”

“이곳에서 북쪽으로 두 거리 정도 가면 충룡도관이라는 큰 건물이 나옵니다.”

“도관? 충룡문이 도관이 되었어?”

“혀, 현액이 도관입니다! 저희는 충룡대라고 서로 말합니다!”

“모두 몇 명이냐?”

“도관 안에 직할로 십여 명이 있고 동서남북 향방 별로 삼십 명씩 있습니다.

“모두 백삼십…많군.”

노인이 턱을 쓰다듬더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대규호는 뭐로 생계를 유지하느냐.”

“저희가 각 향방별로 매달 거둬들이는 돈의 삼 할을 가져가십니다. 저희는 보호세와 치안대 명목으로 돈을 징수 받고 조정에서도 은사금을 내려주시면 그것으로 방회를 꾸려갑니다.”

“하오문과 다를 것이 없군.”

당태세의 말이 끝나자 충룡대원은 고개를 도리질하며 즉각 반발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는 공명정대하고 제남의 치안과 황실의 안녕을 위해 일하는….”

다시 꺼억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태세는 사내가 허리를 틀며 탁자에서 엉덩이를 펄쩍펄쩍 들 때까지 늑골을 손에 쥐고 있었다.

“영특한 줄 알았더니, 헛소리 말고 묻는 거나 답 하거라.”

“네…네! 네!”

“각 방의 방주는 누구냐.”

“도…동향방주 윤휘세!”

“또.”

“남향방주 모혁종”

“또.”

“서향방주 이세중”

“다음.”

“북향방주 고천평.”

순간, 당태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충룡사영이라 불리던 고천평 말이냐? 코 옆에 사마귀가 있는 녀석?”

“맞습니다! 그 고방주 맞습니다! 고방주를 아십니까?”

“그런 어린 놈을…….”

당태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누워있는 충룡대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충룡사영이라 불리던 나머지는 어디 있는가. 고천평, 위가도, 조수명, 장천.”

“고방주 외에…위호법은 중앙에 계십니다. 나머지는 모릅니다!”

당태세의 입술이 씰룩거리더니 송곳니가 드러났다.

“주정뱅이 위가도가 호법이라고? 말세로구나.”

충룡대원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자신을 묶어놓고 고신하는 이 늙은이는 분명 예전부터 방주를 알고 있던 이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결코 동료는 아닌 듯 보였다.

게다가 무예는 자신보다 훨씬 고강한 게 틀림없었다.

충룡대원은 눈을 껌벅이다 조심스레 늙은이에게 말을 걸었다.

“노, 노사! 대인! 아무래도 우리 방주님과 구원(舊怨)이 있으신 듯한데….”

“오냐.”

젊은이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충룡대원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지나간 지 한참이 된 원한이라면 다시 흉금을 털어놓고 값진 말과 좋은 술로 회포를 풀며 화해를 하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 충룡대 역시 이제 황실의 공무(公務)를 수행하는 단체인지라 강호의 습속에서 벗어난 지 오래입니다.”

순간 노인의 손에 들려 있던 단도가 그대로 턱 밑에 닿았다. 갈빗대를 쑤시는 게 아니라 그대로 목을 쑤시려는 것 같았다.

누워있는 젊은이를 내려다보는 노인의 눈매는 평온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길가의 잡초를 손가락으로 뜯어내듯 목을 끊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오만방자하구나.”

“대… 대인! 살려주십시오! 제가 시…실언을”

“묻는 것이나 제대로 대답하여라.”

“그리하면 제가 살 수 있습니까?”

순간 단도가 목을 깊게 눌렀다. 기도가 막힌 사내가 켁켁대며 노인을 바라보는데, 노인은 멍청한 학동을 쳐다보는 선생 같은 눈으로 묶인 사내를 보고 있었다.

“지금 네가 나와 거래할 형국이냐?”

“아닙니다!”

“지금부터 내 너에게 자세하게 모든 것을 물을 것인즉, 정확하게 말을 하여라.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겠습니다!”

그때부터 지루하면서도 세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당태세는 느리지만 정확하고 짧게 질문을 던졌고, 묶여있는 충룡대의 사내는 계속 갈빗대를 잡히면서 결국 아는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거진 반시진이 다 될 때까지 심문은 계속되었고 책상에 묶여 있는 사내는 반죽음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정리하자면 고천평이 다른 방주들을 가르쳤다. 대규호 주통산은 보통 호법 위가도와 함께 진채에 지낸다. 각방 방주들은 정해진 시간에 회합을 한다. 자주 가는 객잔과 다관은 두세 군데. 서쪽에 하나, 본채 앞에 두 곳 정도. 맞느냐?”

“그렇습니다.”

“각 방의 수입은 따로 관리되고 돈을 회계하는 자는 본채에 있단 말이지. 너희들은 따로 주머니를 차야 먹고 살 수 있는 것이고?”

“네….”

“그래서 종종 이렇게 죄 없는 자를 잡아놓고 돈을 뜯어낸다는 말이렷다.”

젊은이는 입을 다물었다. 사내의 불안한 눈동자가 노인의 얼굴과 노인이 잡고 있는 칼 사이를 오갔다.

노인 역시 더 물어볼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노인이 묶여있는 젊은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젊은 충룡대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대인. 이제……저를…그냥 놓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풀어달라고?”

“아니…그냥 이렇게 두고 가셔도…….”

노인은 젊은이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젊은이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모든 걸 말했습니다! 아는 걸 다 말했어요! 아시지 않습니까! 전 이제 충룡대에 있지도 못할 겁니다!”

“그렇겠지.”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죠! 그게 강호의 도리 아닙니까! 노사!”

“뭐?”

노인이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자 젊은이는 이제 악에 받친 듯 고개를 들어 올리고 목에 핏대를 세운 채 떠들기 시작했다.

“어찌 강호의 협사가 일구이언을 한단 말이오! 그러고도 전대의 고수라 하며 후학들에게 본이 될 수 있단 말이오! 그저 당신은 쓰레기일 뿐 아니오!”

화를 내거나 당황해야 할 노인의 얼굴에 기묘한 웃음이 올라오자 사내는 당황했다.

“강호는 망한 지 오래 아니냐.”

“뭐요?”

“내가 살던 나라도 망했고 내가 몸담았던 강호도 사라졌다.”

노인의 눈매는 흐릿한 과거를 뒤지는가 싶더니 금세 어두운 건물 안의 현실로 돌아왔다.

“남은 것은 구원이고 행할 것은 보수(報讐: 앙갚음)다. 그것으로 족하다.”

“이것 보시오! 난 당신과 아무 상관없지 않소! 그 망할 대규호인지 뭔지 하는 충룡대주에게 가서 말하란 말이오! 난 그냥 재수 없이 여기 온 거야!”

“네가 재수가 없어?”

당태세가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손에 들렸던 단도가 젊은이의 목에서 떨어져 나가더니 허공에서 빙글 돌아 끝이 젊은이의 가슴을 향했다.

순간 젊은이의 눈이 커지며 온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팔다리를 있는 대로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매듭은 옴짝달싹하지도 않았고 움직이는 것은 그저 결박된 몸뚱이 뿐이었다.

“멀쩡한 이를 죽이고 대가로 돈을 받은 네가 재수가 없다고?”

“대인! 대인 그건 잘못했습니다! 제가 눈이 돌아가서 그만 실수를 한 겁니다!”

“그래 놓고 법을 집행한다고. 청(淸)의 법은 명(明)의 법과는 다르구나.”

“대인! 대인!”

“대명률(大明律)에는 사형일 것이다만 내가 살던 나라는 없어졌으니…….”

“노사! 안 돼!”

순간, 가볍게 노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잘 벼려진 칼이 능숙한 손길을 따라 뼈와 심줄을 피해 그대로 심장을 찔렀다.

노인은 자신의 칼을 사내에게 박아 넣고는 충룡대원이 지니고 있던 단도를 대신 품 안에 넣었다.

“업보라 생각해라.”

노인은 묶여있는 젊은이의 시신에서 동을 돌리고 괴(拐)를 어깨에 괸 채 의자에 앉아 어두운 집안에서 밝은 바깥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는 중천까지 올라가지도 않은 상태였다.

묵묵히 문에 비친 햇살을 바라보던 당태세의 입이 열렸다.

“내가 실로 마도(魔道)를 걷는구나.”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뚜벅대는 소리가 울리고 문이 열렸다 닫혔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없는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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