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산동 제남(3)
세상의 모든 골목은 넓어지고 좁아지며 다른 길과 만나 생을 얻거나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사로(死路)를 만든다.
당태세가 들어가는 길은 생로가 아닌 사로였다.
좁지 않은 길이었다. 골목 양쪽에 붙은 집들은 떡하니 문까지 앞에 나와 있었다. 하지만 어떤 왕래도 없었고 인기척도 없었다.
당태세가 봤을 때 우측의 집은 빈집이라 인기척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왼편의 집은 분명 사람이 있는 곳이었고 안에서 작지만 미묘한 기세도 흘렀다.
기척을 숨기는 집.
보통 이런 곳은 살수들이나 문파의 그늘진 일을 해결하던 고수들의 은거지였다. 그리고 이는 옛 명(明)대 북경에서는 거대문파들이 흔히 한두 개쯤 가지고 있는 건물이었다.
슬쩍 닫힌 문에 손바닥을 가져간 당태세의 볼에 슬쩍 경련이 일어났다.
아주 세밀한 진동, 사람의 기세, 그리고 헐떡대는 사람의 작은 소리. 불쾌한 모든 것들이 모이자 야릇하게 지난날의 추억이 살아났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악물었다.
“습성이란 변하지 않는 것이겠지.”
번을 서는 이도, 감시를 하는 눈도 없었다. 기척을 숨기는 집은 집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철저히 외부에 주지시켜야 한다.
당태세 정도되는 공력을 지닌 이들이나 세심하게 지켜볼 뿐, 이곳은 죽은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하였다.
당태세는 슬쩍 건물의 위아래를 지켜보더니 집과 집 사이의 틈을 살펴보았다. 사람 하나가 들어가기에는 좁아 보였지만 담과 대문과 다른 건물의 벽이 엄연히 별개의 공간으로 나뉜 곳이었다.
당태세는 한참동안 벽을 보더니만 이곳까지 짚고 온 괴를 들어 뒤 허리띠 사이에 밀어 넣고는 두 손을 뻗어 담 위의 튀어나온 공간을 잡았다.
두 손아귀에 잡힌다 하더라도 끝에 걸리는 것은 손가락 앞마디가 겨우 걸릴만한 요철뿐이었다.
하지만 당태세는 두 손아귀에 힘을 주고 벽돌 사이에 손가락을 걸고는 천천히 위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멀리서 본다면 등 뒤에 나무막대를 꽂고 두 손으로 벽에 붙은 채 점점 위로 올라가는 기이한 노인을 보게 될 터였다.
“세월이 흘러도 몸이 기억하는구나!”
소싯적, 이 기예는 벽호공이라 하여 많은 호사가들과 강호의 협객들이 일종의 신묘한 기예로 치부하던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 기예는 실로 간단하면서도 고된 공부의 결과였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요철 사이에 디디고 단전을 바짝 벽에 붙여 그 탄력으로 하나씩 위로 오르는 것이었으니, 보기보다 내용은 별 것이 없으려니와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몸의 중심을 제대로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러나 일단 공부가 완성된다면 손가락 걸릴 틈과 발가락 디딜 곳만 있어도 충분히 성벽정도는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게 또한 벽호공이었다.
당태세는 인상을 쓰며 담의 요철을 찾아 팔을 뻗다가 투덜거렸다.
“사지를 쓰다가 손발 세 개로 올라가려니 고되구먼.”
왼다리 하나만 제대로 디디더라도 벽은 탈 수 있는 게 벽호공이었지만 그만큼 양 손과 단전의 피로도가 심하게 쌓였다.
더군다나 담의 위에 깔려있는 기왓장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 기왓장 하나라도 떨어져 부서진다면 잠입은 바로 탄로가 날 것이었다.
그래서 당태세는 젊은 시절보다 훨씬 신중하면서도 긴 시간을 들여 담을 기어 올라가야만 하였다.
어느새 등판은 땀으로 푹 젖어버린 지 오래였다. 우연인지 천운인지 담장위의 기와들은 생각보다 튼튼하게 붙어있었다.
당태세는 슬쩍 고개를 들어 담 안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정리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작은 정원 너머로 굳게 닫힌 안채의 문이 보였다. 지극히 작은 가옥이었다.
아마도 저 안채 안에 조금 전 비명을 지른 서점주인과 충룡대의 두 사내가 들어가 있을 터였다. 더이상 비명이 새어나오지 않는 것을 감안해보면 서점주인은 아마 심한 꼴을 당한 것 같았다.
“금서(禁書)때문이라면 왜 이곳에서….”
순간, 당태세는 입을 닫았다. 누군가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당태세는 재빨리 담 위에서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우거진 풀숲 사이로 떨어져 들어갈 때 오른발이 욱신거렸지만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물론 당태세가 안으로 뛰어드는 것을 안채에서 보기라도 한 사람이 있다면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태세가 마당 안에서 은신을 하는 것과 동시에 요란하게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태세가 관목 사이에 몸을 숨기자마자 안채의 문이 벌컥 열리며 인상을 있는 대로 쓴 사내가 후다닥 튀어나와 작은 문을 열어젖혔다.
“이보시오, 왕대인! 이곳에 올 때는 조용히 하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게요!”
“아니 일단 왔다는 것은 알려야 하지 않는가?”
“문에 늘어진 줄을 흔들라고 하지 않았소! 그새 잊은겐가?”
충룡대원이 으르렁대자 왕대인이라고 불린 살집 좋은 사내는 머리를 어루만지더니 머쓱하니 헛웃음을 지어보였다.
충룡대원은 재빨리 문을 걸어 잠그더니만 왕대인이라 불린 사내를 데리고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의 문을 닫아버리자 다시 고요한 뒷골목의 정적이 이어졌다.
당태세는 슬쩍 관목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이곳 정원을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내는 조심스레 절뚝거리며 앞으로 다가가서 기감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문 옆으로 바싹 붙은 당태세의 귓속으로 작지만 명료한 목소리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아니, 이보게들. 나는 최가를 죽이라는 소리까지는 하지 않았네만….”
“어쩌겠소. 일하던 중에 머리를 잘못 맞아 그리된 것인데.”
“이리 되면 내가 낭패 아닌가?”
순간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당태세의 귀에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시오. 수결(手決)과 지장까지 받아 놓았으니. 이 증서면 이 최가가 왕대인에게 서점건물을 넘겼다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오.”
“허허, 일은 제대로 했구만 그래. 그건 그런데…… 이 친구는 어찌한단 말이야? 내가 제수씨하고 이 집 딸 얼굴도 아는 사이인데 말이네.”
“그건 걱정 마시구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다른 충룡대원이 입을 열었다.
“이 인간이 봤다고 말한 금서가 바로 [양주십일기]인데 이 책이지. 이건 황실에서도 읽는 자를 족족 처형하라고 말한 책이란 말이오. 어찌되었던 간에 이 최가는 죽을 운명인 거지. 여기서 죽으나 북경에서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더 빨리 죽은 들 뭐가 어떻소?”
“이 책은 어디서 난 건가?”
왕대인의 말에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일을 하려면 독물(毒物)도 몇 개 가지고 있어야지.”
“시신 처리는 어찌하고?”
“그런 건 걱정 마시오. 그건 우리 전문이니까. 그건 그렇고 우리 동향방(東向房)에 바칠 돈이나 봅시다.”
누군가의 품에서 짤랑대는 소리가 나더니 대화가 중단되었다.
당태세는 벽에서 귀를 떼었다.
노회한 무림의 사내는 방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진상을 알게 되자 겨드랑이에 꽂았던 괴를 들어 올리고는 품 안 작은 보자기에서 창두를 꺼내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창촉은 어른의 손바닥만 한 길이였는데 괴의 끝과 맞춰보니 정확하게 끼워졌다.
“장철오가 제대로 만들었군.”
당태세의 손이 창두와 괴 사이에 나무못을 박아 넣고는 슬쩍 괴를 어깨 위로 올려 잡았다.
사내는 휘어진 오른발을 앞으로 살짝 디디고 다시 왼발을 앞에 댄 다음 문짝에 조용히 손을 올렸다. 안에서 빗장을 올리고 있었으니 분명 나올 때는 빗장을 풀 터였다.
당태세의 눈이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오른손에 잡은 괴창을 가슴 앞으로 작살을 던지려는 자세로 옮겨 잡았다. 짤랑대는 소리가 끝나자 누군가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방문이 딸그락거리며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안채의 문이 활짝 열렸다. 사내의 그림자들이 밖으로 쏟아졌다.
순간, 당태세의 손에 들렸던 괴창이 소리 없이 날아가 맨 앞에 서 있던 사내의 목을 찍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당태세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나가며 목을 움켜쥔 왕대인의 멱살을 잡아 뒤로 팽개쳤다.
눈이 휘둥그레진 충룡대원이 재빠르게 품 안에서 단도를 뽑아드는 순간 당태세의 괴창이 충룡대원의 팔을 베어버리고 손잡이가 충룡대원의 뒷목을 낚아채어 당태세의 앞으로 끌어왔다.
충룡대원의 입이 떡하니 벌어지려는 순간 당태세의 팔꿈치가 사내의 인중을 번개처럼 강타하였다.
순식간에 앞의 두 사내가 썩은 고목처럼 앞으로 고꾸라지는 모습을 보던 충룡대원은 의자에 앉아서 돈을 세던 자세 그대로 굳은 채 당태세를 쳐다보았다.
당태세는 목발을 잡고 뚜벅 한 발을 앞으로 내밀어 안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 안에는 커다란 탁자에 묶인 채 코와 입에서 검은 피를 흘리며 숨이 끊어져 있는 서점주인 최가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당태세는 여전히 넋을 놓고 있는 충룡대원을 바라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사람 잡고 받는 돈에 취하면 끝이 안 좋지.”
그 때, 당태세에게 맞고 쓰러진 충룡대원이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움찔거렸다.
“이런… 제길….”
순간 당태세의 괴창이 충룡대원의 등을 그대로 내리찍어버렸다. 순간 헉 하는 바람 빠진 소리와 함께 충룡대원의 몸이 잠시 꿈틀대더니만 그대로 늘어져버렸다.
앉아있던 충룡대원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당태세를 노려보며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네…네놈은 누구냐! 법이 두렵지 않느냐!”
충룡대원의 허리춤에 꽂혀 있던 검은 막대기가 사내의 손에 딸려 앞으로 뻗어 나왔다.
하지만 막대기를 뽑는 시간에 이미 당태세는 훌쩍 충룡대원의 앞으로 다가와 사내의 어깨춤에 괴창 끝을 박아 넣어버린 상태였다.
고통을 못 이긴 충룡대원이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순간 괴창이 쑥 뽑혀 나오며 빙글 허공에서 한 바퀴 돌더니 손잡이가 바람소리를 내며 턱을 후려갈겼다.
“이곳에서는 조용히 하라며.”
쿠당탕 소리와 함께 사내가 머리를 탁자에 처박고 나무 막대를 놓쳐버렸다. 다른 충룡대원이 반사적으로 품 안의 단도를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창날이 다시 날아오더니 단도를 잡은 손을 그대로 찍어버리고는 다시 손잡이가 머리로 날아와 사내의 옆머리를 강타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단도를 들고 마지막 반격을 하려던 충룡대원은 그대로 거품을 문 채 뒤로 무너져 버렸고, 작은 집 안에 두 발로 서 있는 사람은 오직 절름발이 노인 하나뿐이었다.
당태세는 누워있는 사내들을 살펴보았다. 이미 왕대인이라 불린 인간은 첫 일격에 숨이 끊긴 채 문지방에 누워 있었고 첫 번째로 저항하던 충룡대원은 창에 맞은 채 죽어있었다.
마지막으로 돈을 세던 충룡대원 하나만이 그나마 숨이 붙어 있는 지경이었다.
그제야 슬쩍 주변을 둘러본 당태세는 안채의 바깥쪽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골목 안은 숨 쉬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적막했고 좁은 골목 바깥에서는 누구의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왕대인의 뒷목을 괴창의 손잡이에 끼더니만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노인의 눈이 사방을 노려보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딸각하고 빗장 걸리는 소리가 한번 난 것 외에는 어떤 소리도 밖에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