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산동 제남(2)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무두리 단성룡은 자신이 극락에서 뜨는 해를 맞이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구석진 창고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게 엊그제까지의 일과였거늘, 오늘은 비단금침에 안락한 침상에 잠을 깰 수 있었다.
그 뿐인가?
잠에서 깨자마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침을 받은 데다 바로 앞의 호화로운 객잔의 고요한 정원을 보게 되니 실로 이것이 장부가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조반을 마치자마자 자신이 모시고 다니는 노인, 당숙부가 갑자기 자신을 부르더니만 웃으며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네 나이가 올해 열여덟? 열아홉 정도 되었느냐?”
“네, 얼추 그 정도 되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당숙부는 껄껄 웃더니만 품에서 쩔렁대는 은자를 꺼내었다.
“그 정도면 이미 장부로다. 네가 코딱지만한 포구에 매여 살며 방회의 일에 매진하느라 그동안 얼마나 고되게 살았느냐? 사내라면 당연히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소리를 듣고 낮이 밤이 되도록 즐기고 몸이 피곤할 때 하늘을 보며 ‘내 오늘 하루를 후회하지 않고 잘 보냈느니라!’하는 호연지기가 필요한 법이다!”
“숙부님!”
“사내가 가서 놀 때는 놀아야지! 자, 어디 기루를 가든 투전판을 가든! 좋은 음식과 훌륭한 경치를 보던 네 마음대로 하면서 쉬거라! 내 걱정은 말고!”
무슨 소리인가 하면서 심드렁하게 듣고 있던 무두리 단성룡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급기야 당태세가 은자를 손에 쥐어주는 순간에 이르자 송아지처럼 커다랗게 된 눈망울에 이슬이 고이더니만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단성룡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던 당태세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우는 게야? 밖에 나가기가 싫은 게야? 이런 대처에 왔으면 나가 놀기라도 해야지!”
“그게 아닙니다! 이것은 제가 당숙부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격하며 저절로 흐르는 눈물입니다! 어찌 남자대장부로 태어나서 이런 때 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단성룡은 꺼이꺼이 울면서도 자신의 손에 놓인 은자를 허리춤의 전대에 끼워 넣고 다시 넙죽 절을 하였다.
“이 무두리! 당숙부의 명을 받아 제남 성내의 풍류를 모두 답습하고 오겠습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명을 받았는데 어찌 제가 소홀하게 임무를 대하겠습니까?”
당태세는 입술이 일그러지는 것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오직 분발하며 노는 것에 집중하도록 하여라! 밤을 새고 내일 낮에 들어오건, 모레 들어오건 신경 쓰지 말아라! 사내가 어찌 그런 일에 연연하느냐!”
당태세의 말이 떨어지자 단성룡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꽉 쥔 채로 온몸을 덜덜 떨며 통곡하듯 목 놓아 외쳤다.
“존명! 존명! 충심으로 받들겠습니다!”
“그리 좋으냐?”
“그리 좋은 게 아니라….저를 이렇게 이해해주시는 분은 오직 당숙부가 처음… 아니, 금월방주님 이후 두 번째십니다!”
“오냐,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이니 어서 나가거라. 해가 짧도다.”
“존명!”
대답을 외치기 무섭게 단성룡은 언제 울었냐는 듯 소매로 얼굴을 닦더니만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채 거의 뛰다시피 하며 객잔 밖으로 몸을 날렸다.
참으로 맑은 물처럼 투명한 사내였다.
당태세는 단성룡의 자취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몸을 침상에서 일으킨 뒤 괴(拐)를 손으로 잡고 천천히 객잔 밖으로 빠져나갔다. 다행스럽게도 객잔주인은 아침의 일과가 분주하여 당태세가 움직이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당태세는 포석을 따라 발을 내디디며 조금씩 걸음을 빨리 내었다. 한참을 걷고 있던 당태세가 입에 미소를 짓고는 뿌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점점 나아지는군.”
당태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객잔 앞의 길을 따라 천천히 도성 안을 걷기 시작했다.
정해진 방향 없이 흘러가듯 움직이며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해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여기저기 물색하는 중이었다. 지금 당태세가 찾는 것은 크게 두 곳이었다.
몸을 급히 피해야 할 때 기척을 감출 수 있는 곳이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충룡대라 불리는 집단이 어디에 본진이 있고 그들의 내력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야 하려나?”
당태세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슬쩍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단성룡이 어디선가 쾌재를 부르고 있을 성시의 대처나 환락가는 가급적이면 가지 않는 것이 나을 성 싶었다. 청나라 팔기나 녹영군과 마주치는 것은 몰라도 단성룡과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것은 그리 좋은 생각이 못 되었다.
“생각 없는 놈이 무슨 말을 내뱉을 지 알 수 없을 뿐더러…….”
그제야 당태세는 자신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게 버릇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혼자 움직이지 못하는 육신을 부여잡고 며칠 동안 운공을 하면서 보낸 시간이 영겁과 같이 느껴졌을 때 생긴 버릇인 듯 보였다.
그게 아니면 십칠팔 년 간 혼백이 쓸모없는 육신을 떠나지 못하면서 남긴 흔적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는 자신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은 모양새가 그리 안 좋은 버릇 같지는 않았다. 당태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혼잣말을 던졌다.
“그럼 충룡대는 어디에 위치할까?”
당태세는 스스로에게 던진 말을 한참동안 곱씹더니 이윽고 스스로 답을 내었다.
“충룡문주는 화려함을 좋아하던 위인이었지?”
스스로 던진 말에 공감하던 당태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별 수 있나. 아룡 그 녀석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해야지.”
맘을 다잡은 노인은 괴를 잡고 제남에서 가장 붐비는 남중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 산동이 곡창이고 북경의 앞을 막는 수문장과 같은 형세의 지역인바 천하의 물산이 거치지 않는 곳이 없고, 북경을 통하는 운하까지 관통하니 사통팔달(四通八達)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내지인과 외인의 구분이 불요할 정도로 사람이 많으니 나라가 변하고 인물이 변했다 하더라도 땅은 변하지 아니한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당태세는 남중로를 돌아보며 녹색 제복을 입은 이들이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가는지를 확인하는데 오감의 기운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이목을 속이려 하느냐? 이미 수차례 발고가 들어왔느니라!”
기운찬 사내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리는 범위에 있던 이들은 분명 동시에 같은 곳을 바라봤을 터였다. 당태세 역시 무심코 고함소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녹색도포를 입은 사내 둘이 자그마한 상인 한 사람을 앞에 놔두고 눈을 부라리며 어르는 중이었다. 그토록 당태세가 찾아 헤매던 충룡대의 사람들이었다.
“내놓아라! 네 녀석이 금서(禁書)를 취급한다는 소리를 이미 듣고 왔느니라.”
“아니오! 나으리! 그것은 분명 모함이외다! 나를 아시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그런…….”
상인의 말은 그곳에서 끊겼다. 우두커니 서서 변명을 늘어놓던 자세 그대로 멱살을 잡히고 가게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순간, 당태세의 눈에 한 충룡대의 사내가 자신의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 것을 확인하였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두 사람이 상인을 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서는 갑자기 비명과 함께 뭔가를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물건들이 엎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살을 찌푸리고 한 발 뒤로 물러서는데 곧이어 축 늘어진 가게 주인이 두 사람의 손에 양팔을 잡힌 채로 비틀대며 밖으로 끌려나왔다. 충룡대 한 사내의 손에는 싯누런 책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것이 네가 은밀히 보관하던 책 아니냐. 누구냐? 이 책을 만들고 이곳에서 회람하라 이른 이가?”
“나는……아니오. 나는…모르는…일입니다.”
축 늘어진 사내가 고개를 겨우 들어서 충룡대원을 올려다보나 싶더니만 이내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잡힌 상인은 바로 혼절한 듯 보였는데 안에서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꽤나 호된 수를 당한 것이 분명했다.
정작 그를 부축하던 충룡대원들은 이를 부드득 갈더니 주변을 보며 외치듯 중얼거렸다.
“이 자가 역심(逆心)을 단단히 먹었구나!”
“보시오! 이 자가 이곳에서 무엇을 팔았는지를! 이 책은 황실에서 내놓지 말라고 말한 위서(僞書)요! 누구 이것을 본 자가 있는가!”
당태세가 눈을 들어 사내들의 뒤에 있는 가게 상호를 바라보았다. 서점이었다. 위서니 금서니 하는 것은 분명 나라에서 정한 바였을 터였다.
충룡대원이 고함을 지르며 사람들을 돌아보자 지금까지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이 모두 거리 뒤로 물러서더니만 일제히 고개를 돌려 상인을 외면하였다.
그 때 한 사내가 삿대질을 하며 고개를 떨군 상인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찌 책을 파는 자가 국법에 어긋나는 서적을 판단 말인가! 그런 심보를 가지고 어떻게 사람들에게 읽어보라며 아무 책이나 권한단 말이냐! 인두겁을 쓰고 저런 짓을 하는 자는 극형에 처해야 하오!”
많이 듣던 말투와 목소리였다. 당태세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슬쩍 그림자 뒤로 숨어 아룡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룡의 목소리는 분명 분노에 가득 차 있었는데, 그 목소리의 떨림은 결코 가식이 아니었다. 아룡이 목 놓아 외치자 충룡대원 하나가 아룡의 말에 동의하듯 우렁찬 목소리로 말하였다.
“우리 제남부의 뜻이 바로 백성들의 뜻과 합치한다! 이 자는 충룡대로 끌고 가 합당한 치죄가 있을 것이다! 모두들 불온한 자가 주변에 보인다면 지체 없이 발고하라! 지부대인의 합당한 포상이 있을 것이다!”
“존명!”
어딘가 들뜬 아룡의 대답과 함께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다시 이어졌다. 사방으로 사람들이 흩어지며 다시 웅성임이 시작되자 조금 전의 소란은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당태세가 고개를 잠시 돌려보자 서점 앞의 풍경은 이전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가 있었고 큰 소리로 열변을 토하던 아룡과 충룡대원들의 모습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순간, 당태세의 눈에 저 멀리 큰 길 옆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는 녹색 도포 자락과 그곳까지 따라가 충룡대원을 힐끗대는 아룡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태세는 입맛을 다시고는 중얼거렸다.
“치세에는 간신(奸臣)이겠고 난세에는 역신(逆臣)이 될 놈이로구나.”
하릴없이 골목을 힐끗대던 아룡이 발걸음을 돌려 다시 대로를 타고 건너편의 술도가 쪽으로 몸을 돌리자 당태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허리를 펴고 괴를 잡고는 골목 근처로 움직였다.
절뚝거리며 지팡이를 잡고 가는 노인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그리 신기한 광경은 아니니 사람들은 오히려 당태세가 가는 길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태세는 충룡대원들이 사라진 골목 앞에서 슬쩍 허리를 굽히고 자연스럽게 골목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자취를 감추었다.
당태세가 들어간 골목은 볕 하나 제대로 들지 않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작은 길이었는데 그 골목 사이로 난 수많은 골목의 갈래들이 마치 시커먼 나무의 가지처럼 놓여 있었다.
“이거 참.”
당태세가 골목의 가운데에서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골목의 한 곳에서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구성진 비명이 다시 들려왔다. 충룡대에게 호되게 당한 상인의 목소리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
당태세의 눈이 어둠 속에서 슬쩍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