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4화 (14/226)

14. 산동 제남(1)

제남은 산동을 대표하는 거대한 성시(城市)다.

그 연혁은 멀리 상고시대까지 이어가는데 그동안 이 땅을 거쳐 간 영웅호걸의 일대기만 따로 모아 책을 낸다면 몇 날 며칠을 읽어도 시간이 모자라는 고도였다.

남으로는 태산이 웅장하게 버티어 섰고, 북으로는 황하가 도도하게 흘러가는데, 성 내에는 일흔 개가 넘는 샘이 흘러나와 용수(用水)에 부족함이 없고 물산이 풍부하니 가히 사람이 사는 대처라는 명성에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비록 나라가 망하고 다른 나라의 깃발이 들어섰다 하더라도 제남이 가지고 있는 명성은 줄어들지 않는 바, 청나라의 팔기 역시 이 성의 귀중함을 알아 일찍부터 산동의 거점으로 제남을 선택한 바였다.

그리고 지금 당태세를 실은 수레는 제남성부 안으로 흔들대며 들어가고 있었다.

앞에서는 훤칠한 사내가 당나귀의 고삐를 잡고 수레 뒤에는 부유해 보이는 노인이 앉아있으니 그 모습은 이미 치부에 성공한 뒤 도학(道學)에 빠져 있는 부가옹(富家翁)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길을 오가던 사람들이 모두 한 번씩 단성룡과 당태세의 모습을 힐끗대며 바라보았다. 심지어는 말을 타고 주변을 순찰하던 주방팔기의 만주군 군관도 슬쩍 눈길을 주고 지나갈 정도였다.

당태세는 눈은 가늘게 뜨고 햇살이 비추는 제남성의 문루를 쳐다보았다.

십여 년, 아니 십오 년 넘는 시간이 흘렀어도 성루와 문짝은 예전에 그가 젊은 시절 본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단지 이곳 여적 세월이 만들어놓은 실금과 풍우가 긁어놓은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사람만이 세월의 침노를 받는 것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 저녁에 본 헌헌장부 같던 성루가 세월을 접고 접어 오늘 아침 뜬 눈에는 자신의 손과 같이 주름지고 알 수 없는 상처가 가득한 얼굴과 같으니 어찌 상념에 잠기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떠십니까, 노사! 이것이 제남성부입니다. 성문은 높고 군사는 날래니 가히 이 태평성대 시절 산동의 으뜸이라 할 수 있지요!”

뜬금없이 나귀를 몰고 가던 아룡, 단성룡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보아하니 자신에게 들으라 한 말이 분명하였으니 당태세는 아룡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흠! 역시 제남은 제남이로다. 못 본지 이리 오래 되었는데도 높은 성벽은 변한 것이 없구나.”

“노사께서는 이 곳을 들러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전 소싯적에 한 번 와 보았지. 지금 속사정이 어떤지는 내 모르지 않겠느냐?”

단성룡은 노인의 말에 히죽 웃음을 지었다.

“우리 당숙부께서는 한참 꿀 같은 잠을 주무셨으니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지금은 그나마 볼만 합니다만 이 산동 땅은 한 차례 난리통을 겪고 한족 놈들이 우왕좌왕 여름철 파리 떼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뭉치곤 했었지요. 지옥도가 따로 없었습니다요. 아주 볼만 했지요.”

당태세는 혼자 떠들고 있는 단성룡의 뒤통수를 뚫어지라 노려보다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꾸하였다.

“어이구 저런, 태평성대라고 하던데 사실이 아니냐?”

“아… 아니! 그렇지! 태평성대 맞습니다! 황제는 영민하시고! 팔기의 기상은 하늘에 뻗치며! 군신은 화목하고 세상은 평화로우니 우리 미천한 한족들도 복락을 누리옵니다!”

“그렇구나. 세상이 더 좋아진 게지?”

“그럼요! 천하를 다스리는 팔기의 권능이 이 땅에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우리 한족들이 바지런하게 움직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룡 네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구나.”

그 때, 나귀를 잡고 가던 아룡, 단성룡이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낯색을 바로하고는 진지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당숙부, 저와 같이 여행을 하기로 하셨으면 하나는 지켜주셔야겠습니다.”

“음? 뭘 말이냐?”

“제 한족 성이 단씨고 이름이 성룡임은 맞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된 한족의 이름 아닙니까? 바야흐로 청룡이 사해를 지배하는 세상에 돌아왔으니 제 이름 역시 편협한 한족의 이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맞는 이름을 가져야지요.”

“뭐라고?”

단성룡은 마치 어린 학생을 훈도하는 선생 같은 표정이 되어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아직 당숙부께서 다시 세상을 보신 지 얼마 안 되어 모르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청조(淸朝)의 사람들이니 마땅히 이름도 청조에 어울려야 합니다.”

당태세가 말없이 눈만 깜박이자 단성룡은 자신의 엄지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켰다.

“무두리라 부르십시오. 이제부터 제 이름은 성룡이 아니라 무두리입니다.”

“무…무두리?”

“우리 고결한 만주어(滿洲語)로 용(龍)이라는 뜻이지요. 얼마나 저와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까?”

“요…용이라 이거냐? 무두리?”

아룡은 대답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당나귀의 고삐를 잡고 다시 성 안으로 수레를 몰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아룡의 뒤통수를 보며 짚고 있는 단창을 질러 그대로 머리를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성루에 들어오긴 했으니 이제 갈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로 갈까요? 일단 객잔이라도 들러볼까요?”

아룡의 한가로운 목소리가 다시 앞에서 들렸다. 당태세는 살심을 꾹 누르고 품 안의 종이를 한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강호에 다시 나온 이상 귀린갈 당태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였다.

끝까지 때와 표적을 기다려 자신의 뜻을 실행하기 위한 인고의 시간만이 남아있는 것이었다. 당태세는 숨을 들이키고는 들뜬 목소리로 아룡에게 말을 걸었다.

“오냐, 무두리. 좋은 객잔을 찾아보자. 일단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여행의 근본 아니겠느냐?”

“역시, 당숙부께서는 풍류를 아시는군요! 이 무두리와 같이 여행을 가자고 하실 때부터 안목을 알아 뵈었습니다! 가시지요!”

“그냥 네가 보고 좋아 보이는 곳으로 가자꾸나!”

“존명!”

신이 난 아룡이 당나귀를 힘차게 끌고 가는데, 덜컹거리는 수레 안에서 당태세는 품 안의 서신을 슬쩍 꺼내어보았다. 금월방주가 자신의 말을 꼼꼼하게 기록하여 준 서신이었다. 당태세의 눈이 번쩍였다.

-산동 제남 충룡문. 문파의 규모는 예전보다 늘어났으며 황성을 오삼계에게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팔기(八旗)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으니……

당태세는 서신을 다시 품 안에 넣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산동 제남의 충룡문. 그 충(忠)자는 대체 어디를 향한 충이었단 말인가.”

당태세가 중얼대는 순간, 아룡은 수레를 끌고 제남의 번화한 대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가히 왕후장상이 묵을 만 한 객잔 아니겠습니까?”

아룡이 잡아놓은 객잔은 그 겉모습이 휘황하고 으리으리하게 단청을 새겨놓은 이층짜리 집이었는데 그 규모가 큼직한 것이 각처를 오가는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다.

슬쩍 당태세가 객잔을 살펴보니 방과 탁자들이 고급스럽고 가구에도 정성을 들인 것이 꽤나 돈을 많이 쓴 것임에 분명해 보였다.

게다가 슬쩍 아룡이 주인과 가격을 흥정하는 것을 들어보니 숙박과 식대 또한 엄청나게 비쌌다. 지난 십 년간 물가가 올랐을 것임을 알고 있었어도 어지간한 대상부고가 아니면 묵지 못하는 객잔 같았다.

하지만 아룡은 이 정도는 거뜬하다는 듯 객잔주인에게 당태세를 가리키며 뻐기듯 고개를 들고 말하였다.

“저 분을 잘 보시게! 세상천하 다니지 않는 곳이 없고 천하의 환락을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이 없는 어른일세! 이 곳에서 제일 고급진 음식과 방으로 접대를 올려야만 망신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공자! 제가 가진 역량을 다 해서 뫼시겠습니다요!”

당태세는 쓰다 달다 말없이 아룡이 하는 짓을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오히려 당태세가 말이 없으니 몸이 달은 것은 당태세가 아닌 객잔주인이었다. 그는 조르르 달려와 당태세 앞에서 연신 손을 비비며 고개를 조아렸다.

“복색과 용모를 보아하니 천하를 한 손에 쥐고 움직이시는 영걸(英傑)이심을 알겠습니다. 이 곳 제남에는 방문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젊은 시절에는 호기롭게 돌아다니느라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지는 몰랐소이다!”

뚱한 표정의 당태세에게서 칭찬이 쏟아지자 객잔주인은 오히려 입이 헤벌쭉 벌어져서 자기 가게 자랑을 시작했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제가 제 입으로 말하자니 자기자랑 같습니다만 제남에 저희 평천루 같은 집이 없습지요. 산동 각지의 진미(珍味)와 명주(名酒)가 다 들어오는데다 시중드는 가기들도 기루의 아이들보다 훨씬 아름답고 우아하지요. 게다가 바로 앞에 저렇게 성곽까지 있으니 도적의 걱정도 없지 않겠습니까?”

객잔주인이 슬쩍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자 객잔 처마 너머로 높이 쌓아올린 검은 성벽이 당태세의 눈에 들어왔다.

분면 제남성부에 들어왔는데 저 내성(內城)은 또 무엇인가 싶어 한참을 쳐다보니 객잔주인이 당태세의 표정을 보고 히죽 웃으며 말하였다.

“네, 보시는 것처럼 황제의 지부대인이 저 곳에 계십니다! 바로 황제의 명이 나오는 곳 옆에 우리 객잔이 있다 이 말이지요!

당태세과 아룡이 거의 동시에 검은 성곽을 다시 쳐다보았다.

당태세가 슬쩍 눈살을 찌푸리고 성곽의 깃발을 바라보는 반면, 아룡은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며 마치 금으로 쌓아올린 성벽이라도 쳐다보듯 입맛까지 다시는 중이었다.

“물론 팔기가 직접 나와서 저희 객잔을 감시한다든가 그러지는 않습니다! 팔기들은 장사에는 관심이 없거든요! 대신 이 곳은 녹영군들과 함께 치안을 담당하는 충룡대가 같이 들러서 수시로 점검을 하니 도적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충룡대?”

당태세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려 말하자 객잔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턱으로 객잔 끝에 앉아 있는 몇 사람을 가리켰다.

당태세가 가만히 보니 모두 금전서미 변발에 녹색 짧은 첩리를 두르고 허리에 두꺼운 띠를 둘렀는데 복식이 엄정한 것을 보니 꽤 군기가 잘 잡힌 방회처럼 보였다.

그 허리춤에는 칼 대신 단단해 보이는 목봉이 끼워져 있었는데 그 길이가 예전 유엽도 정도 되어 보였다.

“저들은 한인 아니오?”

아룡이 중얼대자 객잔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인인데……꽤 오래 된 방회입니다. 이미 제남에서는 유명한 곳이죠. 팔기와 총독들이 내성을 쌓기 전부터 제남부의 치안을 맡아 봤습니다. 제가 이곳에 터를 잡기 전부터 있었으니…….”

“산동 토박이들인 모양이오?”

당태세의 말에 객잔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원래 충룡대의 대주는 이곳 사람이 아니라 황도 북경에서 이름 높은 무인이었다고 하더군요. 그곳에서 황제를 일심으로 섬겨서 특별히 산동 제남으로 보내 이곳의 치안을 관할하라 명받았다 들었습니다.”

“역시 충심이 있으면 한인들도 출세를 할수 있는 법이구먼.”

아룡이 감탄한 듯 팔짱을 끼고 중얼대자 객잔주인도 아룡에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렇지요. 황제의 명으로 일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충룡대가 녹영군 같은 군사들은 아닙니다만 엄정하고 절도가 있기로 유명합니다. 함부로 백성들에게 해코지를 하지도 않지요. 다들 품성도 괜찮아요.”

“확실히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이들은 다르네!”

아룡이 연신 감탄을 하며 주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데, 정작 당태세는 고개를 떨구고 마치 조는 것처럼 앉아 있었다. 땅을 노려보는 사내의 눈초리는 깜박이지도 않은 채 깔린 포석을 쪼갤 기세로 홉뜬 채였다.

“충룡문은 예부터 연환검(連環劍)으로 이름을 날렸으니…….”

당태세의 중얼댐은 다른 두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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