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금월방(7)
“말씀하신 물건들입니다.”
당태세는 침상에 앉아 오랜만에 흐뭇한 표정으로 장철오가 가져온 물건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침상 위에는 기다란 가죽 끈과 단단해 보이는 나무막대, 그리고 길게 뻗은 나무토막이 하나 놓여 있었다.
“제대로 준비했겠지?”
장철오는 정작 가져오라는 주문을 받고도 당태세가 그것으로 뭘 하려는 지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명하신 것은 다 가져왔습니다만…저 괴(拐)는 그렇다 치고 이 가죽 끈은 무엇을 하실 요량이십니까?”
어젯밤 부로 파문 아닌 파문을 받고난 뒤 장철오는 땅바닥이 아닌 의자에 앉아있었지만 여전히 당태세를 바라보는 표정에는 경외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당태세는 대답대신 가죽끈과 팔뚝 길이만한 나무토막을 같이 가져와서 그것을 묶기 시작했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장철오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당태세는 나무토막의 양 끝부분을 단도로 솜씨 좋게 파 내려가더니 그곳에 가죽 끈을 끼우고는 발목부분에 칭칭 가죽 끈을 감은 뒤, 그것을 열십자로 교차해서 무릎 위쪽에서 가죽끈을 묶었다.
그 사이에 끼워진 나무토막은 양끝이 단단하게 당겨지며 당태세의 안쪽 무릎에 짝하니 달라붙으니 나무에 의지하여 뒤틀린 오른발로 서기 위한 장치였다.
당태세가 슬쩍 몸을 일으켜 보더니만 일자로 뻣뻣해졌지만 발뒤꿈치를 디딜 수 있게 된 오른발을 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칼이 안 들어갈 정도로 단단한 나무로다. 가죽 끈도 튼튼해 뵈는 것이 좋은 물건이구나.”
“자단(紫丹)입니다. 이렇게 쓰실 줄 알았다면 조금 더 구해 올 것을….”
“아니, 이 정도가 딱 좋다.”
당태세는 이렇게 말하고는 뚜벅뚜벅 절룩거리지만 종전보다 훨씬 안정된 보폭으로 침상을 향하였다.
침상 위에는 사내의 허리보다 껑충하게 올라있는 나무막대가 있었는데 끝은 땅과 수평으로 뻗어 겨드랑이에 낄 수 있고 길쭉하게 아래로 뻗은 나무막대에 손잡이가 옆으로 하나 툭 튀어나와 있는 형상이었다.
마치 아래 하(下)자에서 윗머리 왼쪽을 잘라내어 버린 듯한 형상이었다.
“그 괴(拐)도 자단으로 만든 것이니 단단하기가 강철과 같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습니까?”
“아래쪽에 창두를 끼울 수 없느냐?”
“한인이 창을 소지하는 것은 불법이옵니다.”
당태세가 장철오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장철오는 슬쩍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단검의 끝을 괴의 끝에 맞춰 낄 수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건 시일이 좀 걸려서…….”
“그래. 그런 건 공이 드는 일이겠지.”
당태세는 말 대신 자신이 오른쪽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괴에 몸을 실어보았다.
가죽끈으로 묶은 다리는 예전보다 굳건하게 사내의 체중을 버틸 수 있었고, 목발처럼 짚고 있는 괴 역시 이전의 부담을 훨씬 줄여주었다.
상부방 삼인조와의 결투 전 궁여지책으로 짚었던 목파에서 영감을 얻은 당태세는 특별하게 이것을 장철오에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당태세는 두 발을 디디고 괴를 오른손에 잡은 채 손잡이를 잡고 괴를 붕붕 돌려보았다.
작은 손잡이를 잡고 겨드랑이 사이에서 괴를 돌리고 앞으로 뻗은 뒤 뒤로 몸을 움직이며 괴를 아래로 뻗어 오금을 걸고 다시 뽑아 명치와 인중을 찔렀다.
가상의 적을 무찌르고 다시 대적하는 적을 해치우는 투로(鬪路)였는데, 절름발이 노인이 순식간에 날개를 얻은 학처럼 좁은 방 안을 사방팔방 움직이며 상중하의 찌르기를 날리는 모습을 본 장철오는 입을 쩍하니 벌린 채였다.
잠시 후 비틀거리며 다시 자세를 마무리한 당태세가 땀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고홍파의 초식은 이미 머릿속에 완벽하게 정리했다 생각했거늘, 몸으로 옮기는 것은 아직 부족하구나.”
당태세는 자신의 오른발을 내려다보았다. 발꿈치를 땅에 붙이고 서 있을 수 있었지만 그 덕에 무릎을 뻣뻣하게 세울 수밖에 없었다.
나무토막이나 다름없는 오른발로 허보를 밟으며 돌아갈 수 없으니, 결국 모든 보법의 묘리는 왼발에서 시작되어 끝나야만 하였다. 보법의 허점을 창법의 정묘함으로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으니 앞으로도 많은 수련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말없이 이 모습을 바라보던 금월방주 장철오가 입을 열었다.
“문주님. 이게 대체 무슨 창법입니까?”
“산서 고홍파(孤鴻派)의 괴창(拐槍)법이다. 낙안창법(落雁槍法)이라고 내가 어릴 적엔 산서에서 꽤 이름 날리던 창법이었지. 산서지방에서 고홍파와 교류하며 그 수법을 얻은 적이 있었는데…….”
당태세가 씩하니 서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걸 지금에서 써 먹을 줄은 몰랐구나.”
금월방주 장철오가 경이로운 눈으로 당태세를 쳐다보았다. 비록 지금은 한 다리가 망가진 볼품없는 백발노인이지만 한 때는 북경 사방에 무명을 쩌렁쩌렁 울리던 순천문주 귀린갈이 아니던가. 그 신위와 공부를 세월이 차마 다 앗아가지 못한 것이었다.
장철오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던 당태세는 슬쩍 괴를 목발로 짚으며 고개를 들고 장철오를 바라보았다.
“금월방주는 들으시게.”
“네, 문주님!”
“내 너를 파문하여 인연을 없애고 독행(獨行)으로 내 남은 인연을 청산하겠다 말하였지만 아직 걸리는 게 하나 있구나.”
“말씀하옵소서.”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순천문의 절기 하나는 너에게 남기고 가야 할 것 같다. 네가 네 일신의 무용 중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이 무엇이냐?”
“소반보(小班步)와 심원태도(心圓太刀)입니다.”
“심원태도는 대도의 수법 아니냐…….”
당태세가 허옇게 센 수염을 쓰다듬더니 탄식하며 말하였다.
“네가 청의 시대가 된 뒤로 대도를 쓰지 못하니 지금 소반보로 펼칠 수 있는 무공이 마땅하지 않은 게로구나. 그리하여 상부방의 졸자들이 단병(短兵)으로 기습하자 열세에 몰린 것이 틀림없으렷다.”
당태세가 입술에 미소를 띠자 장철오는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문주님, 그것이 아니오라 창졸간의 기습…….”
그 순간 당태세의 손가락이 위로 쳐들리자 장철오의 입이 반사적으로 닫혔다. 당태세의 눈동자는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차마 입을 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 너에게 순천문의 비망권(飛蟒拳) 지념(指念)을 넘길 것인즉…….”
“네?”
순간, 금월방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천문의 비전 권법 비망권은 순천문에 입문하는 이들이 기본으로 배우는 백타(百打)지만 입문한 지 십 년이 넘고 문파의 차기 문주로 낙점된 자에게는 비망권의 정수를 모았다는 실기(實技), 지념(指念)을 전수받게 되는 것이다.
비망권 지념을 전수받는다는 것은 곧 다름 아닌 차기 문주나 마찬가지라는 소리였다. 금월방주 장철오의 입이 덜덜 떨렸다.
“너는 파문과 별도로 내 공부를 이어가라. 그것이 내가 네 수고에 보응하는 첫 번째 보답이다.”
“문주님! 제가 어찌 감히!”
“입 닥치고 지금부터 정확하게 따라 해라! 단 한 번의 견식이다!”
당태세가 괴를 땅바닥에 내던지고는 기수식 전후열세(前後裂勢)를 갖추었다. 장철오도 화급히 의자를 내던지고 당태세의 옆에서 기수식을 취하였다.
당태세의 짧은 기합과 함께 장철오의 몸동작이 늙은이의 활개짓과 손짓을 따라가며 발을 내딛는데, 한 걸음 한 주먹이 나갈 때 마다 흉터투성이 중년인의 얼굴에 경이로움과 감동의 빛이 넘쳐흘렀다.
당태세의 지념은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투로를 돌았는데 마지막 투로를 끝마칠 때가 되자 두 사람은 땀에 흠뻑 절어있었다.
장철오는 자기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털썩 찧으며 주저앉았는데 그 모습을 보던 당태세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장철오를 닦달하였다.
“몸이 무겁구나, 소혈작. 내가 지금 보여준 지념을 아침에 오순, 저녁에 오순을 반복하여라. 그리하면 세월이 더 가기 전 네가 비망권의 진의를 터득하게 될 것이다.”
“아, 예…예!…알겠습니다!”
숨을 헐떡이는 장철오를 보던 당태세는 되었다는 듯 소매로 이마를 문지르더니 다시 자신의 괴를 집어 들고 허리춤에 상부방에게서 빼앗은 단도를 밀어 넣었다.
연신 가쁜 숨을 쉬던 장철오가 멍하니 당태세의 하는 모습을 보다가 눈이 동그래지며 손을 들었다.
당태세는 뒤로 돌아보지 않고 장철오를 향해 말했다.
“십 칠년 세월의 빚을 어찌 이런 하잘 것 없는 투로 하나로 갚는단 말이냐? 내 너의 안쪽을 단련시킬 방법을 찾아내어 전해준 것뿐이니 이제는 바깥의 일을 정리해 주어야겠구나.”
“바깥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상부방이 어디 있느냐?”
“네?”
잠시 멈칫거리며 당태세를 바라보던 장철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무릎을 꿇고 당태세를 올려다보았다. 금월방주 장철오의 목소리가 빨라지고 높아졌다.
“사부님! 문주님!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그건 문주님이 나서실 일이 아닙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제 일이고 제 방회의 문제인데 어찌하여 사부님이 그 문제에 나서십니까! 제가 해결할 수….”
“아륙이 죽은 뒤로 네 세력이 밀리고 있지 않느냐?”
장철오의 표정은 놀라움을 넘어서 두려움이 가득했다. 흥건하게 땀에 젖은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자기도 모르게 제멋대로 더듬대며 이지러졌다.
“무…문주님? 그걸 대체 어디서….”
“그리고 난 널 파문했다. 내가 멋대로 나가서 내 맘대로 상부방을 박살내겠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난 금월방이 아니다.”
“무… 무무….”
“……하나 남은 옛 제자가 제대로 살 수 있도록 터전도 못 잡아주는 게 무슨 북경 구대문파의 문주란 말이더냐.”
장철오의 떨림이 멈추었다.
무릎 꿇은 건장한 중년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초로의 사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서 있는 회색머리의 사내도 변발을 튼 채 앉아있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주름과 흉터가 거두어간 젊은이의 얼굴이 조금씩 살아나 십칠 년 전의 활력 넘치고 패기 넘치던 소혈작 장철오의 모습으로 겹쳐졌다.
창문으로 바닷바람이 들어와 사내들의 땀을 식혀주었다.
“상부방주는 포구 동쪽에 있는 녹청 기와가 올라간 커다란 하역장을 자신의 방회 본청으로 삼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장철오의 두 눈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태세의 고개가 짧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괴창이 뚜벅뚜벅 소리를 내며 장철오의 옆을 지나갔다. 당태세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녀올 때까지 너는 팔대문파의 거처와 그들의 일을 글로 적어 놓으라.”
“존명(存命)”
“내 상부방을 치고 네 앞으로 다시 올 테니 빈틈이 없어야 될 것이다.”
“존명(存命).”
“육신이 오지 않는다면 혼백이 기필코 찾아올 것이니 그리 알고 준비하라.”
“존명(存命)!”
장철오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무릎에 두 손을 얹은 채로 하늘을 보며 외칠 때, 그의 뒤에서 문 닫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또각대는 괴창소리가 조용히 멀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