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대공전기(暗黑大公傳奇) 16화
전기
문트바르는 본인이 지닌 무한한 능력만큼 자존심도 강했기에 약한 존재를 무시했으나 강한 상대는 나름 포용할 줄 아는 미덕을 갖춘 드래곤이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자격이라도 지닌 적을 만나면 무참히 짓밟고 죽임으로써 명예를 빛내줬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건 기나긴 지난 삶을 되돌아봐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미물이었다.
마족의 혼에 신족의 수법이라, 세상에 이런 인간이 또 있을까?
더구나 마족의 혼에 잡아먹히지 않는 선(善)을 품은 데다 신족의 수법을 거의 혼자 깨우쳤다니, 직접 접해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믿지 못할 존재에게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게 됐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용언마법을 가르쳐 주면 배울 수 있다고 떠드는 건 포용할 수 없었다.
[정말 자신하느냐?]
“강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죠. 그럴 필요도 없고…….”
[그게 더 귀찮기 때문이다. 허나 너는 약해.]
건방진 인간이 피식 웃고 육포를 오물오물 씹었다.
문트바르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힘주어 말했다.
[도발 따위를 한 게 아니다. 그게 사실이다.]
“네, 네. 그러시겠죠.”
[내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면 네가 감히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아직도 졸리세요?”
[나는 너 같은 미물처럼 짧게 자주 자지 않고 지닌 힘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자연히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도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
이렇게 자신의 위대함을 알려줬건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안쓰러워라. 심심해서 어떻게 사세요?”
[무어라?]
“오래 주무시는 건 상관없어도 그만큼 오래 깨어 있으신 거잖아요. 외톨이에 먹고 마시는 즐거움도 없는데 무슨 재미로 사시는지 궁금하네요. 아, 반짝이는 걸 모으시는 취미는 있구나.”
[인간의 잣대로 나를 재지 마라. 너처럼 살라는 말이냐? 저런 쓸모없는 것들과?]
쓸모없는 것들은 침묵으로 인정했으나 그나마 쓸 만한 것은 또박또박 대꾸했다.
“자오가 어때서요? 아까 어르신 하체에 생채기를 내고 발등을 찍어서 피를 뽑았던 거 잊으셨어요?”
[너 때문에 잊고 있었다. 너 다음은 저놈이다.]
“거봐요. 자기 몫은 한다니까요. 에스텔도 그렇죠. 빗자루를 얼마나 잘 타는데요.”
“파리처럼 왱왱거려서 시끄러웠다. 떠올리니 불쾌해지는군. 역시 가만두지 않으마.”
“하하. 역시 알아주시는군요. 마지막으로 궁정 마법사님은…… 식사 중인데 여기까지만 하죠.”
궁정 마법사 블랑샤르는 무시당했는데도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자오와 에스텔은 칭찬받았는데도 안색이 파리해졌다.
“다, 단주. 혹시 제가 실수한 게 있습니까?”
“아뇨.”
“정광, 미쳤어? 내 어깨 위에서 내려가라고 했던 것 때문에 복수하는 거야?”
“설마요. 그럼 두 분이 무시받는데 가만히 있어요?”
“차라리 그게 낫지!”
문트바르는 미물들이 티격태격하는 걸 보고 의문을 느꼈다.
[이상한 게 또 있군. 너는 뭐냐? 머리에 금빛 털이 난 너 말이다.]
유일한 금발인 에스텔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저, 저를 말씀하신 건가요? 하, 하프 엘프입니다.”
[그런 건 관심 없다.]
“아! 마, 마녀입니다. 마법의 조종이시여.”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너는 뭐냐고 물었다.]
“……!”
에스텔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이 물은 건 종족도 직업도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럼 뭐지?’
그녀가 드래곤의 속을 알 리 있나.
자신도 모르게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제 이름은 에스텔이고 정광과 자오의 동료입니다. 궁정 마법사님과는 오늘이 초면…….”
[너에 관해 묻는데 왜 다른 것들을 들먹이느냐?]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 그럽니다.”
문트바르가 비웃었다.
[무리를 짓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구나. 내 앞에서 감히 언성을 높이길래 의아했는데 저 녀석을 믿고 그런 것이었군.]
에스텔은 드래곤이 지목한 사람을 힐끗 보고 고개를 저었다.
“정광을 믿고 그런 게 아닙니다. 정광과 대화하다 보면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이번만큼은 문트바르도 수긍했다.
[인정한다. 버릇없고 피곤한 녀석이다.]
“저기요, 어르신?”
[육포나 다 삼키고 끼어들어라.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다. 너는 형편없이 약하고 이 녀석은 그래도 쓸 만한 편인데 동료라는 허울을 믿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냐?]
“그건…….”
[그렇다면 너는 대체 무엇이냐? 저 녀석의 아량 덕분에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을 뿐, 그것이 사라지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하루살이 아니냐?]
“……!”
에스텔은 눈을 크게 떴다가 입술을 지그시 깨문 뒤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지금의 저는 분명 그렇습니다.”
[훗날엔 다를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러고 싶습니다.”
에스텔이 슬며시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저는 엘프도 아니고 인간도 아닙니다. 어렸을 땐 양쪽에서 버림받아 원망했는데 결국엔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스승님께 구원받으면서 그랬지요. 저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남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다가 정광을 만났고 넓은 세상을 제 발로 직접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작은 몫을 하며 큰 도움을 받고 있으나 언젠가는 반드시 홀로 걸을 겁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가면서 계속 말입니다.”
문트바르가 미간을 찡그렸다.
[여전히 시시한 얘기지만 나와 닮은 점이 있군.]
“네? 어떤 부분이…….”
[나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차이가 매우 큰 것 같습니다만.”
[본질은 비슷하다. 굳이 어딘가에 속할 필요 없다. 나는 드래곤이지만 그 전에 위대한 문트바르고 너는 하프 엘프이나 진체는 보잘것없는 너다. 그거면 돼.]
“…….”
에스텔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작은 숲에서 나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정광과 자오만 해도 고마운데 그녀를 그녀 자체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더 만났고 이젠 드래곤까지 살짝 기분 나쁘긴 하나 그런 시선으로 봐주고 있었다.
결국 에스텔의 눈에 물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오물거리던 육포를 전부 삼킨 정광이 손뼉을 치며 문트바르를 칭찬했다.
“천하의 에스텔을 울리시다니, 과연 용언마법은 대단하네요.”
[……그저 말을 했을 뿐이다.]
“그럼 더 대단하신데요. 용언마법은 됐고, 어르신의 말솜씨를 가르쳐 주세요. 네?”
문트바르는 정광을 잠시 노려보다가 무시무시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네 녀석은 목숨을 걸고 도발을 해서라도 내 마법을 꼭 배우고 싶은 것이구나.]
정광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뭘 걸 의향은 없지만 말솜씨도 배울 겸 겸사겸사요.”
[마법은 쓸 줄 알고?]
“쓴다고 말씀드리긴 뭐한데. 기초 정도는 해요.”
정광은 일전에 블랑샤르에게 보여줬던 그대로 왼손바닥으로는 불을 피우고 오른손바닥으로는 얼음을 만들었다.
그런 신기를 처음 본 에스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너. 어, 어떻게 주문도 외우지 않고 두 개의 마법을 동시에?”
“에스텔 어깨너머로 배웠는데요.”
“놀리는 거냐? 나는 그런 거 할 줄 몰라!”
경악한 에스텔만큼은 아니었으나 문트바르도 놀랐다.
[보면 볼수록 인간 같지 않군. 신족의 눈으로 마나를 보고 머리만 사용해서 끝낸 것이냐?]
“네. 자질 하나는 괜찮죠?”
문트바르가 어림도 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아주 엉망은 아니다만 너는 안 된다. 왜 용언마법이라고 부를까, 내 일족만이 쓸 수 있어서 그런 것이다.]
“편협하시긴. 타고나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드릴게요.”
[못해내면?]
“어르신의 뜻대로 하시죠. 그럴듯하게 흉내라도 내면 인정해 주셔야 해요.”
문트바르의 머릿속에 눈앞의 오만하기 그지없는 인간을 찢어발기는 미래가 그려졌다.
신족과 마족의 일부분을 한 몸에 가졌다고 그의 것까지 탐하다니.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어떤 신족도 마족도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 자부했다.
[좋다. 오랜만의 유희다.]
문트바르가 승낙하자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지켜보던 블랑샤르가 손을 번쩍 들며 일어서다가 무릎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크윽. 하, 하필이면 이 중요한 순간에 지긋지긋한 관절염이…….”
[제일 쓸모없는 네놈은 또 뭐냐?]
“……!”
블랑샤르의 진물이 흐르는 눈이 별처럼 빛났다.
폭언을 들었으면 어떤가, 드래곤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는데.
우드드득-
“끄아아악!”
녹슨 관절이 부서질 기세로 일어나 공손히 대답했다.
“저, 저는 인간이고 프로부뉴 왕국의 궁정 마법…… 죄, 죄송합니다. 드래곤께서 보시기엔 먼지 한 톨만도 못한 실력일 테지만 저는 지금껏 마나를 탐구하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허나 마법은…….”
[본론만 말해라.]
“요, 용언마법을 조금이라도 배워서 널리 퍼뜨리고 싶습니다.”
문트바르가 감탄했다.
[내가 너를 잘못 봤다. 어떤 의미론 저 젊고 잘생긴 녀석보다 네가 훨씬 더 뛰어나다.]
자고로 말이란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른 법이거늘, 블랑샤르가 앞뒤를 다 자르고 본론만 말하니 드래곤의 마법을 익혀서 세상에 뿌리려는 미친 노인이 되어 있었다.
문트바르가 그런 말을 듣고 용서할 리 있나.
단숨에 죽이려고 하는 순간, 정광이 외쳤다.
“드래곤 어르신! 잠시만요!”
[이놈을 살리려고?]
“뭐 실패해도 개죽음이 아니라고 본인이 말했으니 상관없긴 한데. 이런 오늘내일하는 노인이…… 죄송합니다, 감히 누구 앞에서. 이런 파릇파릇한 새싹이 말실수 좀 했다고 죽이시는 건 좀 아니죠.”
[어쩌길 원하는 게냐?]
“가르쳐 주셔 봤자 어차피 못 배울 게 뻔한데 속이 터지실 때마다 벌을 내리는 유희로 삼으시죠. 제겐 그럴 기회가 없으실 테니 화풀이도 할 겸 해서요.”
[……재밌는 얘기군. 얼마 안 가 후회하게 될 거다.]
문트바르는 으스스한 미소를 지었고 블랑샤르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었다.
블랑샤르는 그 와중에도 할 말은 했다.
“드래곤이시어, 보잘것없는 저의 소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하지만 잠깐만 밖에 나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문트바르의 노란 두 눈에 용언마법을 쓸 때마다 나타나는 검은빛이 떠올랐다.
[도주해서 내 유희를 망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제, 제가 어찌 감히. 목숨을 걸고, 마나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아직도 밖에 있을 인간들에게 드래곤께서 저 특이한 청년과 유희를 즐기시기로 했으니 소란스럽게 굴지 말고 전부 떠나라고 말하려 합니다. 이를 어길 시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확실히 주지시킬 테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정광도 찬성했다.
“그러시죠, 어르신. 얘기에 군더더기가 없으니 오해할 사람도 없을 테고 조용한 환경에서 전념할 수 있잖아요.”
평상시의 문트바르라면 감히 자신을 귀찮게 한 이들을 일거에 쓸어버렸겠으나 지금은 더 중요한 대상이 코앞에 있었다.
[네 동족을 아끼는 건 이해가 안 가나 허락하마. 신족과 마족에 관한 것을 비롯해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입을 봉해라. 나는 방관하는 존재, 쓸데없는 혼란을 일으킬 순 없다.]
블랑샤르는 그런 드래곤이 툭하면 나라 단위로 멸망시키냐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으나 꾹 참고 예를 취했다.
“감사합니다, 드래곤이시어. 명심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무릎을 다친 블랑샤르는 에스텔이 모는 빗자루를 얻어 타고 밖으로 나갔다.
결계가 거의 사라지며 드러난 드래곤의 레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리고 매캐한 연기까지 뿜어내어 공포에 빠져있던 정벌군이 경악했다.
에스텔이 빗자루를 타고 나는 마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쯤은 중요하지 않았다.
들어간 사람은 전부 죽은 줄 알았는데 멀쩡히 살아서 나오다니! 그것도 두 명이나!
“블랑샤르 공! 에스텔! 그대들이라도 무사해서 천만다행이오! 대체 어떻게 된 것이오?”
블랑샤르는 미친 듯이 달려온 프로부뉴 국왕 발부에 6세와 정벌군에게 문트바르가 허락한 짧은 얘기를 전달했다.
그리고 결국 사람들은 똑같은 확신을 하게 됐다.
‘그 포악한 드래곤이 레어에 침입한 자와 유희를 즐기기로 했다고? 진정한 적수로 인정한 게 아니면 말이 안 돼!’
‘그래도 설마설마했거늘 정광이 정말 지옥의 군주 암흑대공(暗黑大公)이었구나! 세상이 어떻게 변하려고 이런 전조가!’
블랑샤르도 에스텔도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챘지만 어쩔 도리가 있나,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 뒤 빗자루에 올라탔다.
블랑샤르는 에스텔의 뒤에 앉아 작게 한숨을 내쉬고 정광이라는 신비한 청년이 역사에 어떻게 남을지 예상했다.
‘암흑대공이 인세에 나타났고 그 덕분에 흉포한 드래곤을 막았다는 얘기가 제대로 기록될 리 없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일이었기에 많이 각색될 게 뻔했다.
‘그래도 모든 사람의 입을 막을 순 없다. 공식적으로 기록되진 않지만 설화로 전해지게 될 거다. 시간이 더 흐르면 누군가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나 흥미로운 소설로 취급받을 것이고.’
어느덧 동굴에 들어온 블랑샤르는, 드래곤에게 드워프가 빚은 술을 먹고 시작하자고 채근하는 정광을 바라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글은 전기(傳記)가 아닌 전기(傳奇)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