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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564화 (564/569)

암흑대공전기(暗黑大公傳奇) 15화

겨우

검게 변한 문트바르의 거대한 눈이 더 커졌다.

오만한 그가 호기심을 가질 만큼 특별한 상대였으나 그것도 정도가 있지, 한낱 인간에 불과한 미물이 전신에서 찬란한 금광(金光)을 쏟아내고 있었다.

과거 누군가 그랬던 것처럼.

화아아아아아-

[……!]

너무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했던 기억이 또렷해지는 순간, 금광이 그를 덮쳤다.

파스스스스-

그의 눈이 원래의 노란색으로 돌아오며 용언마법이 풀렸다.

육신이 받은 충격 때문이었지만 정신적 충격은 더 컸다.

문트바르는 특별한 걸 훌쩍 넘어버린 경이로운 존재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바닥에 착지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정광도 멍한 눈으로 문트바르를 올려다봤다.

‘뭐 이런 괴물이 다 있어?’

비장의 한 수를 썼는데도 전신을 감싼 검푸른 비늘들만 녹았을 뿐, 쓰러지긴커녕 휘청휘청하지도 않고 꿋꿋이 서 있을 줄이야!

호승심이 더 커졌다.

“가끔이라도 나가셔서 햇볕 좀 쬐시지. 오랜만에 일광욕을 하시니 많이 타셨네요.”

[……네 말이 옳다. 확실히 오랜만이었다.]

정광이 이죽거리는데도 문트바르는 순순히 인정했다.

[몸을 마나와 합일해 통로로 쓰는 건 신족의 능력이다. 오래전 그들을 섬기는 몇몇 인간이 따라 하곤 했으나 네가 손목에 찬 아이템 같은 것으로 마나를 발산하는 흉내에 그쳤었거늘, 이런 수준이라니.]

문트바르는 항마주(降魔珠)를 주시하며 과거를 떠올리다가 무겁게 추궁했다.

[신족이라 해도 아무나 그럴 수는 없다. 인간, 너는 그들과 어떤 관계냐?]

“생면부지인 관계요. 높은 산 청정한 도관에서 수양한 도인을 자꾸 사이비 종교와 엮으려 하지 마세요.”

[……동방은 내 영역이 아니라 못 가봤는데, 수양했다는 네가 그 모양인 걸 보면 전쟁터나 마찬가지란 얘기 아니냐?]

“무량수불. 외톨이셔서 그런지 실례되는 말을 함부로 하시는 경향이 있네요.”

[너만 할까.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너를 눕히고 들으마.]

“말씀만 하지 마시고 깔끔하게 ‘죽어라’ 같은 걸 써보시죠.”

[불가하다. 생사를 다스리는 건 시간을 관장하는 것처럼 신이나 가능한 일이다.]

“용언마법, 생각보다 별것 아니네요. 정말이에요?”

[그렇게 도발해 가며 물을 필요 없다. 강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게 더 귀찮기 때문이죠.”

[……너를 상대하는 게 더 귀찮아졌다.]

문트바르의 눈이 다시 새카맣게 변했다.

[[부숴…….]]

정광은 ‘부숴라’라는 용언(龍言)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높이 도약해 운룡을 휘둘렀다.

화아아아악-

정광이 받아들이고 배출한 자연지기가 운룡의 검날에 맺혀 문트바르의 눈을 노렸다.

[……!]

문트바르는 그것을 경시하지 못했다. 아까처럼 전신이라는 면(面)에서 쏟아낸 게 아닌, 검날이라는 가느다란 선(線)에 집중시키고 검을 휘두르는 위력까지 더해진 공격 아닌가?

재빨리 앞발 하나를 들어서 막았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됐다.

콰카칵! 푸슈슉-

문트바르의 앞발이 절반쯤 잘리며 핏물을 토해냈다.

정광은 허공에서 한 번 더 도약해 핏물을 뛰어넘으며 높이 들어 올린 운룡을 수직으로 내려쳤다.

그사이 문트바르는 용언마법을 완성했다.

[[막아라.]]

후우웅-

그의 머리 위에 마나로 뭉쳐진 벽이 생겼고, 황금빛을 머금은 운룡이 그 벽에 박혔다.

콰직!

순간 멈칫한 운룡이 방벽을 세차게 가르며 내려가 문트바르의 정수리를 쪼개려 했다. 운룡에 담긴 황금빛이 용언마법을 종잇장처럼 자르고 있는 것이다.

촤아아악-

허나 시간을 번 문트바르는 정광의 자연지기에 녹아 눌어붙은 입을 크게 벌렸다.

쩌저적-

입속에서 끓어오르고 있던 화염이 노도와 같이 분출됐고 정광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화르르르륵-

“……!”

브레스가 정광을 집어삼키고 동굴 천장까지 먹어치웠다. 단단한 화강암이 순식간에 녹아 한여름날의 당과(糖菓)처럼 뚝뚝 떨어져 바닥을 불태웠다.

처음 쏟아냈던 브레스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놀라운 신위였다.

“정과아…… 으윽.”

에스텔은 절규하듯 정광의 이름을 외치다가 간신히 멈췄다.

정광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어서였다.

‘그 마왕 같은 녀석이 이렇게 허망하게 죽었을 리 없어. 어디지? 어디로 피한 거야?’

곧 알 수 있었다.

자오가 궁정 마법사 블랑샤르에게 그랬던 것처럼, 정광이 허공에서 유령처럼 나타나 에스텔의 어깨 위에 앉아 사과했다.

“미안해요. 빗자루가 너무 짧아 앉을 자리가 없네요.”

반색하는 것도 잠시, 에스텔이 소리를 빽 내질렀다.

“당장 내려가!”

“궁정 마법사님이 대신 용서해 주시죠.”

“나, 나는…….”

“시끄러워요! 정광, 농담할 때야? 너무 무거워져서 추락하려고 하잖아!”

정광은 그들이 탄 빗자루가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버티는 걸 알면서도 어깨를 으쓱했다.

“매정하시네. 바닥이 불바다가 됐는데 어딜 가라고요.”

“네가 알아서 해야지! 드래곤에게 돌아가서 양해를 구하고 앉든가!”

정광은 이미 그러고 있었다.

온몸을 황금빛으로 두른 채 유성처럼 긴 꼬리를 남기며 드래곤을 향해 날아갔다.

“아악! 가란다고 진짜 가냐!”

에스텔은 비명을 지르며 화를 냈지만, 문트바르는 마치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용언마법을 쏟아냈다.

[[멈춰. 꿰뚫어라.]]

화려한 유성이 된 정광은 멈추지 않았다. 팔방에서 가해지는 엄청난 압박을 찢어발겼다.

그러느라 속도가 늦춰진 찰나, 천장에 매달려 있던 커다란 종유석들이 무수히 쏟아져 내려 정광을 꿰뚫으려고 했다.

‘시간 끌기는!’

정광은 손에 쥔 운룡을 휘돌려 똑바른 듯하면서도 찌그러진 기이한 원을 그렸다. 태극(太極)과 역태극(逆太極)이 함께 담긴 운룡에 휩쓸린 종유석들이 다른 종유석들과 부딪쳐 공멸했다.

그리고 허공을 살짝 디뎌서 다시 도약하는데.

정광의 눈이 커졌다.

‘도마뱀보다 더하네!’

문트바르를 보니 녹았던 비늘들도, 반은 잘렸던 앞발도 그새 멀쩡해져 있었다.

게다가 용언마법도 계속됐다.

[[절멸한다.]]

‘……!’

정광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껏 해왔던 ‘뚫려라, 불어라, 멈춰’와 같은 ‘해라’가 아니라 ‘절멸한다’, 즉 ‘한다’로 바뀐 것이다.

‘그래, 용이면 이 정돈 돼야지.’

정광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환영했다.

문트바르의 검푸른 육신에서 막대한 마나가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천장에서 바위들이 떨어지고 벽면이 허물어져도 정광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연지기를 삼단전에서 끊임없이 순환해 황금빛을 쏟아냈다. 그 빛으로 마나가 폭발해 일어난 폭풍을 뚫으며 계속해서 전진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문트바르의 눈은 깊숙이 가라앉았고 정광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짙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코앞까지 가까워졌을 때, 정광과 문트바르가 동시에 움직였다.

정광의 손에 들린 운룡이 찬란한 금룡(金龍)으로 화해 문트바르의 목을 노렸다.

문트바르의 앞발 끝에 자리한 무시무시한 발톱이 검푸른 마나를 토하며 정광을 양단하려 했다.

그렇게 금룡과 청룡이 충돌하며 하늘에서 산이라도 떨어진 듯한 굉음이 터졌다.

쿠우웅!

그리고 두 빛이 함께 소멸했다.

정광의 신형이 뒤쪽으로 날아가 벽을 뚫고 사라지고 문트바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시 후,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문트바르가 천천히 일어나 무뚝뚝하게 칭찬했다.

[껍데기만 인간이군. 제법이었다.]

정광이 벽 속에서 걸어 나와 구멍 끝에 걸터앉으며 받아쳤다.

“확실히 도마뱀보다는 나으시네요. 꽤 괜찮은 수였어요.”

[그 몰골로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정광의 겉옷은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그 속에 입은 철혈무쌍용갑(鐵血無雙龍甲)이 드러나 있었다.

문트바르는 철혈무쌍용갑 가슴 부분에 박혀 있는 금속 조각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마지막 순간에 네 자그마한 심장을 터뜨리려고 했는데 그것 때문에 빗나갔다. 드워프들이 달라붙어서 만든 것이냐?]

그 조각들은 철혈장의 소장주가 무각공(無角公)의 비늘과 정광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이용해 적금강(赤金剛)이란 합금을 만들어내고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호심경의 파편.

정광은 박살이 난 호심경을 어루만지며 소장주가 퍼부을 지독한 잔소리를 떠올렸다.

“드워프에 대해 짧게 들어보긴 했죠. 그분들과 비슷한 사람이 만든 거예요.”

[인간도 제법이군.]

“계속 제법, 제법 하시는데 그 모습으로 하실 말씀이 아닐 텐데요. 발가락도 재생이 돼요?”

문트바르는 앞발을 등 뒤로 돌려 뒷짐 지며 오만하게 답했다.

[나는 드래곤이다.]

“그러셨군요.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그럼.”

경천동지할 격전이 다시 시작했다.

그 충격에 휩싸인 거대한 동굴이 끊임없이 휘청거리며 화강암들을 토해냈다.

“저런. 댁이 폭삭 무너지게 됐네요.”

[레어는 튼튼하게 지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어르신이 더 걱정인데요.”

[크게 말해라. 힘이 빠졌느냐?]

그럴 리가.

정광은 단전에 있는 내공을 끌어다 쓰는 게 아니라 동굴 속에도 넘치는 자연지기를 끌어다 쓰고 있으니 내공이 바닥 날 일은 없었다.

허나 문트바르의 사정도 비슷했다.

드래곤이란 종족에 걸맞게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쌓은 마나와 끝없는 재생력이 그를 단단히 지지했다.

이렇게 언제 끝이 날지 모를 건곤일척의 승부는 다소 싱거운 이유로 막을 내렸다.

정광이 훌쩍 물러나 기지개를 켜고 투덜거렸다.

“하아아. 너무 지겨워서 삭신이 쑤시네요. 이제 좀 쓰러지시죠.”

문트바르도 바닥에 슬쩍 앉아 받아쳤다.

[내가 할 말이다. 그만 버티고 죽어라.]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주린 배를 움켜잡았다.

“사슴 진흙 구이로 배를 든든하게 채웠었는데 다 꺼졌네. 뭐라도 좀 먹고 하죠.”

[드래곤은 굳이 먹지 않아도 된다.]

“그럼 구경하고 계시든가요. 에스텔! 그만 나오세요. 배 안 고파요? 저녁이나 먹죠.”

정광의 음성이 산사태가 나고 용암이 태우고 지나간 것 같은 동굴을 울렸다.

“안 나오고 뭐 하세요?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는 법인데 설마 어르신께서 그러실까 봐요? 아, 그러실지도 모르겠네.”

[나는 위대한 드래곤이다.]

“그러시다네요. 말 바꾸시기 전에 빨리 오세요.”

[나는 위대한 드래곤이라 했다.]

문트바르가 두 번이나 말하자 용언마법으로 끝이 어딘지도 모를 만큼 뚫렸던 구멍에서 세 사람이 탄 빗자루가 슬그머니 올라왔다.

정광은 그나마 멀쩡한 큰 바위에 앉아 그들에게 손짓했다.

“고생하셨어요. 먹는 김에 휴식도 취하죠.”

에스텔이 정광 옆에 앉아 으르렁거렸다.

“이게 다 누구 때문에 한 고생인데?”

“에스텔이 너무 약해서죠.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자오, 육포 좀 주실래요?”

“여기 있습니다, 단주. 에스텔과 마법사님도 드시오.”

에스텔과 궁정 마법사는 드래곤의 눈치를 보며 육포를 씹었다.

정광은 자오와 한담을 나누며 육포를 먹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꼭 필요할 땐 술이 없다니까. 어르신, 혹시 있으세요?”

궁정 마법사 블랑샤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 오면서 그런 걸 챙겼을 리 없잖은가?”

“어르신 말고 훨씬 더 어르신요.”

가만히 앉아 정광 무리를 관찰하던 문트바르는 그제야 자신에게 말한 걸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있다.]

“밥은 안 드셔도 술은 드시는 거예요? 주당이시네.”

[예전에 부리던 드워프들이 빚어놓은 게 있는 거다. 유희 삼아 마시곤 했지만 큰 흥미는 없다.]

“마침 잘됐네요. 제가 없애는 걸 도와드리죠.”

문트바르가 정광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나보다 약하다. 그런데도 겁이 없구나.]

“벌써 치매가 오셨나 봐요.”

[지금 당장 확인시켜 줄 수도 있다.]

정광이 손을 내저었다.

“더 하기 싫어졌어요. 어르신이 한 단어만 말씀하셔도 저는 죽어라 몸을 놀려야 하잖아요.”

[겨우 그 이유로?]

정광이 헛웃음을 흘렸다.

“겨우라뇨. 세상에 이렇게 불공평한 싸움이 어디 있다고. 켕기시면 몇 수 알려주시든가요.”

[웃기는 소리. 인간이 용언마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으냐?]

“안 될 건 또 뭐예요. 그 사이비 종교에 나오는 신족이라는 분들이 쓰는 기술도 거의 혼자 깨우쳤는데.”

[…….]

정광을 바라보는 문트바르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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