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대공전기(暗黑大公傳奇) 14화
용언
“이, 이보게! 같이 가세나!”
정광은 한참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오시게요?”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자네의 충고를 듣고 깨우쳤네! 자네가 암흑대공이든 다른 무엇이든 상관없어! 나는 진지하네!”
“네, 네. 그럼 그러세요.”
정광은 신경을 끊고 짙은 어둠이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동굴 속을 걷다가 눈을 찡그렸다.
동굴이 꺾이는 부분에서 환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불을 밝히려면 입구에서부터 전부 밝힐 것이지, 왜…… 그렇지, 그럴 수도 있지.’
방향을 꺾어 그 이유를 알게 된 정광은 흐뭇하게 웃었다.
드래곤은 매우 탐욕스러워서 레어에 수많은 보물을 쌓아놓고 있다더니 과연.
무수히 깔린 금은보화가 천장에 박힌 야명주들이 쏟아내는 빛을 반사해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악해서 석상처럼 굳어버린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정광은 보물들의 중앙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 거대한 생물을 구경하며 감탄했다.
‘정말 엄청나구나.’
동방의 용과는 생김새가 달라도 실제로 존재한다는 게 신기했고, 예상보다 더 큰 크기에도 놀랐으나 더 대단한 점이 있었다.
‘사방이 휘황찬란해서 눈이 부실 정도인데 잠이 오나? 그것도 그렇게 오래?’
그때, 드래곤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거대한 노란 눈으로 정광을 물끄러미 봤다.
정광은 당황하지 않고 예의 있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드래곤 어르신. 사람 말 할 줄 아세요?”
“…….”
“일단 프로부뉴어는 모르시고. 저는 정광이에요. 실례지만 존함이?”
“…….”
드래곤이 여전히 말이 없자 정광은 머리를 긁적였다.
“공용어도 못하시네. 이러면 도마뱀 녀석과 별반 다를 게 없는데. 에스텔, 혹시 드래곤어 알아요?”
에스텔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만 떠들라고 눈짓하는데 드래곤이 대신 대답했다.
[나는 문트바르. 드래곤어는 없다. 드래곤은 심령으로 대화한다.]
“와! 진짜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들리네요. 이런 식으로 세상 그 누구와도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다.]
“멋지네요. 자오가 드래곤이 아니라 다행이고요. 근데 이런 환경에서 잠이 오세요?”
[천장에서 빛을 내는 건 야명주가 아니다. 잠에서 깨려고 마법으로 빛나게 한 것이다.]
“지금 용언마법(龍言魔法) 말씀하시는 거죠? 빛아, 사라져라! 이렇게 한 번만 말씀해 주세요. 네?”
[…….]
문트바르라는 드래곤은 정광을 잠시 보다가 다른 소리를 했다.
[마족과 유사한 혼을 품은 인간이 있어서 호기심이 생겼다. 예정보다 일찍 깨서 뭘 하는지 지켜봤다. 그 인간은 악(惡)이 응축된 혼 말고도 재밌는 것을 가지고 있더구나.]
-우우우웅…….
역천경이 정광의 품속에서 가늘게 떨었다.
정광은 한 대 쥐어박아서 달래고 투덜거렸다.
“재밌긴요. 쓸모없…… 쓸모가 거의 없는 녀석인데요.”
[마족이나 신족이 네 말을 들었으면 황당해했을 거다.]
“신족이라는 종족도 있어요?”
[어둠이 있으면 빛도 있기 마련. 인간에겐 신화가 되어버린 일이지만 그 두 종족은 이 세상에 드나들었었다.]
“안 온 지 한참 됐다는 얘기네요. 왜죠?”
[그들 간의 다툼이 심해져서다. 그들은 결국 양측 모두 출입하지 않기로 하고 이 세계와 통하는 문들을 인간들이 신성시하는 물품들에 봉인했다. 서로를 믿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나름 도인인데 이런 사이비 종교 같은 말을 계속 들어도 되나 모르겠네요. 뭐 그렇다 치죠. 혹시 이 녀석이 그 물품들 중 하나에요?”
정광이 가슴 부분을 툭툭 치며 묻자 드래곤이 답했다.
[그것들 중에서도 최상급이다. 마계의 중심부로 곧장 통하는 문이 봉인되어 있다. 예전에는 그것을 손에 넣어 마족을 부르려는 정신 나간 인간들이 가끔 있었는데 요즘도 그렇느냐?]
정광은 천요문(天妖門)을 떠올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이십 년 전에 그 사이비 종교에 빠지신 분들이 있긴 했죠. 봉인은 어떻게 푸는 거예요?”
[알려줄 수 없다. 나를 비롯한 모든 드래곤은 방관자. 선도 악도 아니며 어느 한쪽을 편들지도 않는다.]
두려워하면서도 집중해서 듣고 있던 에스텔과 뒤늦게 따라온 프로부뉴 궁정 마법사 블랑샤르가 입을 떡 벌렸다.
‘서, 선도 악도 아니라고?’
‘그, 그런 인간. 아니, 드래곤이 역사서마다 흉포하기 그지없는 악룡(惡龍)이라고 기록돼?’
드래곤이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알아챈 듯 찬찬히 설명했다.
[인간들은 나를 악룡으로 여기는데 오해다. 사고방식의 차이다.]
‘……!’
두 사람의 입이 더 벌어졌다.
에스텔은 정광이 변명할 때마다 쓰는 ‘사고방식의 차이’라는 말을 드래곤에게 들어서였고 블랑샤르는 별것 아닌 일로 변덕을 부려 나라를 몇 개나 멸망시키는 사고방식이 어떤 것인가 상상도 안 돼서였다.
하지만 정광은 이해했다.
“힘드셨겠어요. 그 마음 알죠.”
[……네가 어떻게 아느냐?]
“저도 그런 오해를 종종 받으니까요. 아까만 해도 그래요. 지옥의 군주 암흑대공(暗黑大公)? 안면도 없는 분을 말하며 제가 그분이라고 매도하더라고요.”
[……너는 그런 소리를 들을 만하다.]
드래곤이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마족과 비슷한 혼으로 인간들을 쓸어버렸다. 언행도 여느 인간과 다르다. 내가 호기심을 느낄 만큼 특이한 존재다. 너는 어디에서 온 누구냐?]
“그건 차차 알아가시는 거로 하고요. 불부터 좀 꺼주시면 안 돼요? 용언마법, 직접 보고 싶어요.”
[……이제 막 깼다. 적당히 해라.]
“그렇게 오래 주무셨으면서 아직도 졸리세요? 힘을 완전히 회복하시려고 시간을 끄시는 건 아니죠?”
나른해 보이던 드래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드래곤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위엄에 찬 모습으로 당당히 말했다.
[강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게 더 귀찮기 때문이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더라고요.”
[……천하에 견줄 존재가 없는 고통을 아느냐? 친구도 적도 없다는 얘기다.]
“제 말이. 그게 얼마나 심심하고 외로운 일인지 세상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
드래곤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엎드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의 거체가 까마득히 올라가 멈췄다.
[네가 특이한 건 알았다만. 내 평정을 무너뜨리고 감히 시비까지 걸 정도인 줄은 몰랐다.]
“아니, 오해받는 게 싫으시다던 분이 왜 그런 오해를…….”
[네가 내 수준이라고? 너도 밖에 있던 개미들처럼 내가 과거에 행했던 일들이 전력을 다했던 것이라 믿고 쉽게 보는 것이냐? 역시 인간들은 무지하군.]
“정 못 믿으시겠으면 지금부터 확인해 보시죠. 에스텔, 궁정 마법사님. 두 분은 저 멀리 가 계세요.”
에스텔은 자신도 모르게 뛰다가 멈췄다. 다시 한번 생각해봐도 이건 정말 아니었다.
그녀는 뒤돌아 정광을 쏘아보며 으르렁거렸다.
“과한 배려는 사양할게. 나는 동료…… 는 좀 그렇고. 일행을 버리고 갈 만큼 몰염치하지 않아. 너나 자오가 한 일에는 나 역시 책임을 지는 게 맞아.”
정광이 씩 웃었다.
“전에 에스텔에게 혹한 분이 누명을 씌우려고 했던 말과 비슷한데 가슴이 따뜻해지네요. 마법사님도 힘내세요.”
“아, 아니 이보시게. 저 처자야 본인이 원하니 그렇다 치고. 나, 나는 왜…… 허억!”
블랑샤르가 억울해하며 항변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
언제 어떻게 간 것인지, 정광이 드래곤의 얼굴 높이까지 뛰어올라 내려친 검붉은 검을 드래곤이 긴 발톱으로 튕겨내고 있었다.
채애앵!
그 충격에 뒤로 날아가던 정광이 양팔을 활짝 펴고 빙글 도는가 싶더니 다시 드래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블랑샤르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사, 사람이 어떻게 새처럼…….”
“그게 뭐요? 드래곤도 있는데.”
한 소리 한 에스텔이 등에 메고 있던 봉을 잡고 한쪽 끝에 둘둘 감겨있는 천을 풀자 볏짚이 드러났다.
그녀는 그 빗자루를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재촉했다.
“빨리 타세요.”
“아, 아니 나는…….”
“내가 마녀라서 꺼리는 거예요?”
“그, 그게 아니라 높은 곳에 올라가면 무서워서…….”
“닥치고 타요! 싫으면 그냥 죽든가!”
콰아아앙-
정광이 동굴 천장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반듯이 잘려 떨어진 거대한 돌덩이를 드래곤이 앞발을 휘둘러 부숴버렸다.
그 파편들이 사방으로 날아가 벽과 바닥에 구멍을 내자 블랑샤르는 눈을 질끈 감고 빗자루에 올라탔다.
“뭐 해요? 내 허리 안 잡고.”
“미, 미안하다.”
블랑샤르가 에스텔의 허리를 안자마자 빗자루가 수직으로 날아올랐고,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 드래곤이 쳐서 날린 돌덩이들이 굉음을 내며 박혔다.
에스텔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마법사를 나무랐다.
“뭐라도 좋으니 마법 좀 써봐요. 나는 비행 마법을 펼치느라 아무것도 못 한다고요.”
“나 같은 인간이 드래곤에게 무슨 마법을…….”
“정광이야 사람 같지도 않으니까 제외하고. 자오를 보세요. 안 보여요?”
“……!”
똑똑히 보였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이상할 정도인 사내가 유령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걸 반복하며 드래곤의 하체에 신비한 물결무늬가 있는 칼을 휘두르다가 크게 외쳤다.
“단주! 아랍백(阿拉伯:아라비아)에서 슐탄을 죽이고 빼앗은 다마스커스검을 써도 생채기밖에 안 납니다!”
“슐탄님께 양도받은 칼로도요? 휘두르지 말고 도끼 쓰듯이 찍어보세요.”
자오는 정광이 허공에서 새처럼 선회하며 한 조언을 충실히 따랐다. 순간 사라지더니 허공을 열고 나와 떨어져 내리며 드래곤의 발등을 칼로 찍었다.
파각!
“됐습…… 흐읍!”
드래곤이 피가 솟는 발로 걷어찼으나 자오는 간발의 차이로 땅속으로 꺼진 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다.
정광이 한눈을 판 드래곤의 어깨를 운룡으로 길게 베며 칭찬했다.
“잘했어요!”
“단주도 훌륭하십니다!”
두 사람의 짓거리에 드래곤이 분노했다.
[싸울 때도 시끄럽군. 죽어라.]
드래곤이 입을 크게 벌리고 브레스를 토했다. 엄청난 화염이 쏟아져나와 두 사람을 덮쳤다.
허공에 떠 있던 에스텔이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정광! 자오! 응?”
드래곤의 뒤에서 정광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 검을 내질렀다.
화염에 그슬린 자오가 허공을 열고 나와 목마를 타는 것처럼 블랑샤르의 어깨 위에 앉아 사과했다.
“미안하오, 빗자루가 너무 짧아 앉을 자리가 없소.”
블랑샤르 대신 에스텔이 용서했다.
“괜찮아요. 궁정 마법사님, 뭐 해요? 아이스 마법이라도 펼쳐서 열을 식혀주셔야죠.”
“아, 알겠다.”
에스텔은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서 날며 드래곤과 싸우는 정광을 주시했다.
바텐베르크와 싸울 때 보인 마왕 같은 모습이 아니라 에브뢰 후작에게 잠깐 보여줬었던 평생을 금욕하고 세상에 헌신하는 수도사처럼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대체 어느 쪽이 진짜야?’
드래곤은 정확하게 알았다.
잠시 물러나 숨을 고르는 정광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악(惡)이 응축된 혼에 잡아먹히지 않은 건 이런 선(善)도 품고 있어서였군.]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죠. 드래곤은 다르나요?”
[마음을 말하는 것이면 똑같다만 네가 쓰는 무술을 얘기하는 것이다. 성품도 무공도 선악이 함께라, 너는 정녕 인간답다.]
“드래곤의 마법은요? 방관자라 하셨으니 이도 저도 아니겠네요.”
[직접 확인해 봐라.]
드래곤의 노란 눈이 새카맣게 변했다.
[[뚫려라.]]
콰콰콰콰-
“……!”
정광은 정말 놀랐다.
디디고 있던 땅이 지옥까지 닿을 기세로 뚫리고 있었다.
드래곤은 추락하지 않기 위해 뛰어오른 정광을 응시하며 다시 명했다.
[[불어라.]]
우우우우웅-
태풍 같은 바람이 불어와 정광을 덮쳤다.
“진짜였구나!”
정광은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을 펼쳐 바람을 피하며 감탄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멈춰.]]
단 한 마디에 정광의 신형이 마치 허공에 못 박힌 것처럼 멈췄다.
“어? 하하. 하하하.”
정광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환하게 웃었다.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천천히 다가오던 드래곤이 물었다.
[왜 웃는 것이냐?]
“재밌어서요.”
[네 죽음이?]
그럴 리가.
중원에서 익힌 정파 무공은 물론이오, 파사(波斯:페르시아)에서 얻은 암살법, 천축(天竺:인도)에서 갈취한 칼라리파야트에 아주(阿洲:아프리카)에서 거둔 저주까지 다 썼는데도 별다른 타격을 못 주다가 드래곤의 말 몇 마디에 이렇게 되지 않았는가?
“아뇨. 용언마법, 참 재밌네요. 저를 이렇게 만드는 수법이 세상에 있을 줄은 몰랐어요.”
[이제라도 알게 됐으니 억울하진 않게 됐군.]
“그러게요. 저도 보답으로 한 수 보여드리죠.”
정광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마혼과 선기(仙氣)를 동시에 개방해 중단전 옥당에서 뒤섞었다.
상단전 인당으로 주위에 떠도는 자연지기를 파악하고 그것들을 하단전 석문을 열어 받아들였다.
자연지기가 하단전에서 중단전으로, 중단전에서 상단전으로 올라간 뒤 다시 내려오는 걸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순환했다.
이렇게 자연지기와 하나가 된 정광의 전신이 황금빛으로 변했다.
손목에 차고 있던 항마주(降魔珠)가 반응하여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정광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의지만으로 품고 있던 모든 것을 발산했다.
그의 전신에서 찬란한 금광(金光)이 쏟아져 나와 드래곤을 집어삼켰다.
화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