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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557화 (557/569)

암흑대공전기(暗黑大公傳奇) 8화

충고

“짐이 친아우처럼 아끼는 프로부뉴 국왕 발부에 6세의 간곡한 청들을 적절히 허하겠노라,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하오.”

마뉘엘이 길드 지부에 들러서 들은 소식을 전하자 침상에 누워 뒹굴뒹굴하고 있던 정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친아우처럼 아낀다고요? 황제 폐하께서 진짜 친아우에게는 얼마나 잘해주시는지 궁금하네요. 몇 분이나 계세요?”

“한 명도 없소. 과거엔 많았었는데 황제가 모두 죽였소.”

“아. 그런 식으로 아끼시는 유형이구나. 그래도 본인이 낳은 자제분들에게까지 그러시진 않았죠?”

“그런 편이오. 아직 황자도 황녀도 많소.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나이대도 다양하오.”

정광이 감탄했다.

“힘도 좋으시네. 아니면 워낙 탐욕스러워서 자식 욕심도 많으신 건가. 황태자 전하의 기반은 어때요?”

“황제는 권력을 나누는 성품이 아닌 데다 황태자의 나이가 벌써 칠십이 넘어 그다음 대를 고민해야 할 판이오.”

정광이 탄식했다.

“저런. 잘 좀 정리하고 적당히 살다 가셨으면 좀 좋아. 이제 와 갑자기 승하하시면 제국은 어떡해요. 사분오열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이고, 어느 정도는 갈라질 텐데요.”

마뉘엘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가 이내 꺼져 버렸다.

“그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황제의 생에 대한 집착이 워낙 강해 언제가 될지 모르겠소. 나보다 더 오래 살까 봐 걱정이오.”

“폐하께선 손에 쥔 권력을 조금이라도 놓는 순간 삶이 끝날 거라 여기시나 봐요. 그래서 후사까지 외면하시는 거고요.”

정광은 침상에서 일어나 마뉘엘의 어깨를 툭툭 쳤다.

“힘내세요. 곧 좋은 날이 올 거예요.”

옆에서 뾰족한 귀를 쫑긋거리며 듣고 있던 에스텔이 바짝 긴장했다.

“그 좋은 날, 네가 오게 하려는 건 아니지?”

정광이 억울하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다.

“제가 무슨 살성도 아니고. 저를 건드리기라도 했으면 몰라, 뭐 하러 그런 짓을 해요?”

“……어째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다.”

“아직 프로부뉴어가 익숙하지 않아서요.”

에스텔이 한숨을 내쉬면서 탄식했다.

“후우우. 웃기지도 않네. 차라리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소식을 듣자마자 이것저것 캐묻고 좋은 날이 어쩌고 하는데 누가 믿어.”

“그럼 이건 어때요? 폐하께서 하셨다는 말씀 중 마지막 부분요. 발부에 6세의 간곡한 청들을 적절히 허하겠노라, 웃기죠? 허할 것이면 전부 허해야지, 적절히 허하는 건 또 뭔지.”

에스텔도, 마뉘엘도 하나도 안 웃겼다.

‘적절히’의 기준이 무엇인지 아는 건 황제 본인뿐, 그가 프로부뉴 국왕의 청을 얼마나 들어주려는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정광이 화제를 돌렸다.

“자오, 이 여관에서 제일 자신 있어 하는 요리가 뭐래요?”

“전부 잘한다고 했는데 투숙객들이 하는 말들을 들어 보니 스튜 종류가 제일 낫답니다.”

“속도 풀 겸 잘됐네요. 다들 가시죠. 아, 어서요.”

그들은 식사하며 술을 마시고, 잠을 자고 일어나 길을 떠났다.

가다가 경관이 좋은 곳이 나오면 찬찬히 둘러보고 비가 내리면 그칠 때까지 여관에서 머무는 여유로운 여정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렀고 어느 화창한 날 그들은 목적지 근처에 이르렀다.

밝은 햇살이 비추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칙칙하게 느껴지는 곳, 침묵의 산이었다.

정광은 저 멀리 보이는 큰 산을 말 위에서 주시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누가 지은 이름인지 잘 어울리네요. 먼저 오신 분들이 많은데 슬슬 가보죠.”

정광의 말대로였다.

한동안 더 가니 단단한 갑옷과 날카로운 창칼로 무장한 프로부뉴군이 길을 막고 있었다.

그래도 에브뢰 후작이 붙여준 기사들 덕분에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통과했는데, 가면 갈수록 병사들이 많아졌고 수많은 천막들이 세워져 있는 숙영지가 나타났다.

“리샤흐 경, 우리가 머물 곳은 어디죠?”

정광의 물음에 이제껏 함께 온 후작의 기사가 답했다.

“알아보고 올 테니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네. 되도록 좋은 천막으로 부탁드려요.”

정광은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는 프로부뉴군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산만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중얼거렸다.

“고요하네. 산새도 풀벌레도 용을 깨우기 싫은 건가.”

에스텔이 몸을 살짝 떨었다.

“네가 그런 말 하니까 소름 끼친다. 유령도 있을 것 같아.”

“뭐 그런 걸 가지고. 제일 무서운 건 사람이죠.”

“그래, 그 사람 중에서 더 무서운 건 너고.”

“농담이 심하시네요. 어떻게 그런 과찬을.”

정광은 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미소 지었다.

“에스텔의 스승님이 펼치셨다던 공간 왜곡 마법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한 마력이 느껴지네요. 아주 흥미로워요.”

에스텔이 정색했다.

“네가 제국군이 오기 전에 드래곤을 잡으려고 하지 않는 건 다행인데, 이제 어쩔 셈이야?”

정광은 빙글빙글 웃었다.

“제국군이 결계 마법에 구멍을 내서 편하게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죠.”

“그리고 방패막이로 떠밀려 들어가 첫 번째로 드래곤에게 죽겠다는 건 아닐 거고. 운 좋게 살아남는다고 해도 휜펠 제국 녀석들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무슨 꿍꿍이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상대는 드래곤이야. 뱀이나 도마뱀이 아니라고.”

“그러고 보니 도마뱀 녀석은 잘 있으려나.”

“뭐?”

정광이 피식 웃기만 하자 자오가 설명했다.

“단주의 기준에서나 도마뱀이지, 무각공(無角公)은 엄청나게 큰 영물이오.”

“그런 녀석이 공(公)은 무슨. 정말 출세했죠.”

“허허. 무각사룡이 그 호칭을 워낙 좋아하니 그렇게 불러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쌓은 정이 있는데 단주의 말을 들었으면 무척 서운해했을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스텔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잠깐만요, 자오. 무갓…… 발음이 안 되는 건 건너뛰고. 마지막에 뤼용이라고 했죠? 동방에서 드래곤을 뜻하는 단어인 뤼용이요. 이미 만나 봤어요? 후작 앞에선 전설 속에나 있는 존재인 것처럼 말하더니, 상대해 본 경험이 있어서 정광이 저렇게 자신만만한 거예요?”

놀란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평소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마뉘엘도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에스텔과 같은 이유가 아닌, 정광 일행이 머물 곳을 알아보러 갔던 후작의 기사와 함께 오고 있는 중년 기사 때문이었다.

“아르뛰르가 왜 여기에…… 설마?”

우아하면서도 실용적인 갑옷을 입은 중년 기사는 마뉘엘에게 눈인사하고 정광 앞에 우뚝 섰다.

“푸후니라 하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소. 안내해 드릴 테니 갑시다.”

“네. 부탁드려요.”

정광은 중년 기사를 따라가다가 마뉘엘을 힐긋 본 뒤 기사에게 물었다.

“아르뛰르 푸후니 경. 마뉘엘과 친분이 있으신가 봐요.”

“그렇소.”

“어떤 사이세요?”

“동기요.”

중년 기사 푸후니가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종자였던 시절부터 제일 친한.”

마뉘엘의 눈에 물기가 어리고 정광은 흐뭇해했다.

“좋네요. 우정이 깊은 만큼 아주 좋은 천막을 배정해 주셨겠어요. 빨리 가죠.”

“……그 전에 들를 데가 있소.”

푸후니는 정광 일행을 숙영지 중심으로 데려갔다.

그와 똑같은 갑옷으로 전신을 감싼 기사들이 물샐틈도 없이 지키고 있는 거대한 천막이 나타났다.

“이곳이오. 그대들을 기다리는 분이 계시니 들어가시오.”

“네, 이따 봐요.”

정광은 곧바로 들어갔고 자오도 당연히 따라갔다. 에스텔은 꺼림칙한지 잠시 망설이다가 그 뒤를 따랐고, 마뉘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을 몇 번이나 바꾸다가 천막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뉘엘은 기억 속에 새겨져 있는 작디작은 소년이 훌쩍 성장하여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고풍스러운 갑옷을 입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장년의 사내가 의자에서 일어나 희미하게 웃었다.

“마르땅 경, 오랜만일세.”

“……!”

마뉘엘 마르땅은 쓰러지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 마르땅,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어서 오게나. 많이 수척해졌군.”

“소신을 기억하시나이까?”

“과인이 어렸을 때였다 해도 직접 서훈한 기사를 어떻게 잊겠나. 음지에서 고생하게 해 미안하네. 그리고 고맙네.”

마뉘엘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양지를 떠나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암약하며 느껴왔던 고통과 서운함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전하, 어찌하여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전하께서 오실 만한 곳이 아닙니다.”

“과인의 나라에서 과인이 못 갈 곳이 어디 있다고 그러는가? 중차대한 일을 논해야 하니 그만 일어나시게.”

장년인은 마뉘엘을 손수 일으켜 주고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천하제일미남이라더니 과연. 정광, 이렇게 와줘서 고맙네. 프로부뉴는 그대를 환영하네.”

정광이 감탄했다.

“제 이름을 제대로 말씀하시려고 발음 연습을 열심히 하셨나 봐요. 아주 훌륭하신데요.”

“하하. 과찬일세. 그래도 노력한 보람이 있군.”

다음은 자오 차례였다.

“정광도 그렇지만 그대도 보자마자 알았네. 자오, 프로부뉴를 대표해 그대의 용기와 헌신에 경의를 표하네.”

“감사합니다, 전하. 불민한 소인을 이렇게 따뜻하게…….”

“허어. 그대같이 뛰어난 전사가 스스로 불민하다고 말하면 되겠는가? 가슴을 펴게나.”

국왕은 절묘하게 말을 끊고 에스텔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의 눈에는 놀라운 미녀를 탐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아닌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대에겐 인사보다 이것부터 해야겠지.”

“네?”

어리둥절해하는 에스텔에게 국왕이 사과했다.

“마르땅 경에게 크게 실망했다 들었네. 경은 과인의 명을 이행했을 뿐이니 그만 용서해 주고 과인을 탓하게나. 미안하네.”

에스텔은 당황했다.

그녀 같은 평민에게, 더구나 하프 엘프이자 마녀에게 사과하는 국왕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을까?

“아, 아니, 잠깐만요. 이러실 것까진 없는데…….”

“솔직히 말하지. 과인은 성군이 아닐세. 원래대로라면 아국을 위한 일이었으니 이렇게까진 안 했겠지만 그대는 그런 일을 당하고도 아국을 돕기 위해 오지 않았는가?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할 만큼 얼굴이 두껍지는 않아 사과한 것일세.”

에스텔은 국왕을 빤히 보다가 손가락으로 뺨을 긁었다.

“뭐 그러시다면야. 오늘부로 잊을게요.”

“고맙네.”

“아직 오늘 안 끝났는데요.”

“하하하. 그렇군. 과인이 잠시 착각했어. 하하하.”

국왕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정광이 손을 번쩍 들었다.

“다 웃으셨으면 뭐 좀 여쭤봐도 돼요?”

“그러시게.”

“전하를 친아우처럼 아끼신다는 그분요. 전하의 청을 적절히 들어주겠다고 하셨다던데 그 ‘적절히’의 기준이 뭔지 혹시 아세요?”

국왕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과인도 그게 걱정일세. 황제의 체면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들어줄 것이라 짐작할 뿐, 확실히 알 방도가 없네.”

“찜찜하네요.”

“그래도 그게 어딘가.”

“그럼 이제 마뉘엘이 했던 말을 이어서 할게요. 제국군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판국에 친정을 하실 줄은 몰랐네요. 용감하신 건가, 호기심이 많으신 건가 헷갈려요.”

정광의 담담하지만 뼈 있는 말에 국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국은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신세, 국운이 걸린 일일세. 과인이 이렇게 직접 오면 이 정벌을 지휘할 제국군 총사령관도 조금이나마 신경이 쓰이지 않겠는가. 아국의 정병들이 한 명이라도 더 살 수 있다면 과인은 이보다 더한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네.”

“그건 일이 잘 풀렸을 때나 기대할 일이고요. 드래곤을 죽이지 못하면 전하도 승하하실 텐데요.”

“그럼 더욱더 잘 온 것이고. 나라를 지키지도 못한 왕이 살아서 뭐 하나?”

천막 안에 있던 친위기사들과 마뉘엘이 기겁하여 난리를 쳤으나 정광은 만족했다.

“웃음소리도 성정도 시원시원하시네요. 장수하실 것 같아요.”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네. 지긋지긋한 두통이 없어지고 흰머리가 더 늘어나지만 않으면 만족하는데…… 그게 될 리가 없지.”

“소박하시긴. 부탁 하나만 드려도 돼요?”

“물론이지. 과인이 그대에게 뭘 못 해주겠나? 여러 개여도 괜찮으니 말해보게.”

“사실 부탁이 아니라 충고 쪽에 가까워요.”

“더 궁금해지는군. 무엇인가?”

정광이 국왕에게 다가가자 친위기사단장이 막아섰으나 국왕의 손짓 한 번에 바로 물러났다.

정광은 국왕의 귓가에 입을 대고 짧게 속삭인 후 씩 웃었다.

국왕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인이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네. 그럴걸요.”

“……겨우 그거라고?”

“네. 그렇게 해주시는 걸로 알게요.”

국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시게. 이해는 안 가나 그렇게 하지.”

정광이 손가락을 하나 폈다.

“하나만 더요. 전하께선 시원시원하시니 인색하기 그지없는 에브뢰 후작님과는 다르시죠? 제대로 먹고 제대로 된 곳에서 쉬고 싶어요.”

* * *

대륙 제일의 기사이자 마검 블루우트 프라센다 데이몬의 주인이며 드래곤 정벌군의 총사령관인 바텐베르크 공작은 애마 슈바르츠 블리츠 위에 앉아 정면을 주시하다가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전군! 전진!”

“충!”

둥- 둥- 둥- 둥-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잠시 멈춰 섰던 휜펠 제국군이 당당하게 전진했다.

목적지는 저 앞에 보이는 칙칙한 산, 드래곤의 레어가 있는 침묵의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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