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54화 (554/569)

암흑대공전기(暗黑大公傳奇) 5화

저런

“황제 직속이라. 금의위 같은 건가. 보기엔 그럴듯하네요.”

정광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아주 잘됐어요.”

“그치?”

아무렴 그렇고말고.

에스텔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배신자 마뉘엘의 보고를 받고 이 지역 영주인 에브뢰 후작의 기사단이 들이닥친 줄 알았건만 휜펠 제국의 슈테른 기사단이라니, 껄끄러운 자들이긴 해도 문제 될 게 없지 않은가?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금이이? 금이위? 발음하기 어렵네. 그건 뭐 하는 조직이야?”

“금의위는…….”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금방 오겠다, 비켜 줘야 해.”

에스텔은 재빨리 길 가장자리로 가며 재촉했다.

“자오, 거기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정광 너도. 늦기 전에 어서…… 어?”

길가에 도착해서 뒤를 돌아본 에스텔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비켜주긴커녕 길 한가운데에 우뚝 선 채 가까워지는 슈테른 기사단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린 정광 때문이었다.

자오 역시 그 옆에서 에스텔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고.

에스텔의 눈동자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떨렸다.

“자, 자오는 본인 의지로 그러는 게 아닐 테고. 정광. 왜, 왜 아직도 거기 있어?”

“여기가 어때서요?”

“서, 설마 아니지? 그렇지? 제발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게 오해라고 말해줘.”

정광은 여전히 정면을 주시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뭘 생각하시는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알아. 분명히 아는 눈빛이라고. 내가 오해한 거 맞지? 응?”

에스텔이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며 지켜보고 있던 정광의 입술이 움직였다.

“글쎄요. 오해한 거 같다는 게 오해 아닐까요. 아까도 그랬듯이 우린 사고방식에 차이가 있으니까요.”

“망할!”

에스텔이 길길이 날뛰었다.

“마뉘엘이 왕명을 내세우며 배신했는데도 국왕까진 걱정하지도 않았어! 에브뢰 후작만 해도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 그런데 휜펠 제국 황제의 기사단과 싸우겠다고?”

“우리를 잡으려고 왔을 수도 있어요. 맞설 준비는 해야죠.”

“슈테른 기사단은 휜펠 제국 황실의 예식과 행사를 담당하고 자국 사신을 호위하거나 타국 사절을 맞이하는 의장대야! 그런 자들이 우리를 왜 노려?”

“이런.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 실력은 별로겠네.”

“……너, 너. 지, 지금 그게 실망할 일이니?”

정광은 하도 어이가 없어 말을 더듬는 에스텔을 따뜻이 위로했다.

“언젠간 닥칠 일이었는데 살짝 빨리 온 것뿐이에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기세요.”

“……즈, 즐기라고?”

에스텔은 정광을 멍하니 보다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기사단을 확인하고 실성한 사람처럼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 하하하. 아하하하하.”

“잘하시네, 바로 그거에요. 자오도 즐길 준비됐죠?”

그야 당연한 일.

에스텔을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던 자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가슴을 활짝 펴고 답했다.

“물론입니다, 단주.”

“좋아요. 그럼 가볼, 응?”

땅을 박차고 날아가려던 정광이 천천히 팔짱을 끼고 머리를 갸우뚱했다.

“갑자기 왜 저래?”

* * *

“단장님, 잠깐 앞으로 나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행렬의 가운데에서 허옇게 센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몰던 슈테른 기사단장 콘라트는, 선두에 있던 부단장이 와서 하는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내가?”

“문제가 생겼는데 제가 알아서 처리할 만한 게 아닙니다. 직접 보시고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흐음. 알겠네, 가세나.”

항상 일 처리를 흡족하게 하는 부단장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자신의 직위와 직무에 염증을 느껴 모든 걸 맡기고 있던 콘라트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런 말을.’

앞으로 나가자 어찌 된 연유인지 알 수 있었다.

저 먼 곳에 있는 자들 때문이었다.

부단장이 그들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그나마 셋이 오다가 여인 한 명은 길가로 피한 겁니다. 본 기사단의 행보를 막는 죄를 물어야 마땅하나 보시다시피 그러기엔 문제가 있어 보고드렸습니다.”

“……확실히 자네가 그럴만하군.”

콘라트의 이마에 패여 있던 주름이 더 깊어졌다.

예의를 지켰다는 여인은 엄청난 미인이었으나 그의 시선은 잠시 닿았다 떨어졌을 뿐, 길을 막고 있는 사내들에게 못 박혔다.

그자들은 여느 사람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인종이었다.

‘살다 보니 별 신기한 구경을 다 하는구나. 분명 동방 사람들인데 왜 이런 곳에?’

저렇게 특색이 강한 자들이 ‘해가 지는 땅’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은 적도 없을뿐더러, 설령 왔다 한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이 형편없는 프로부뉴에서 얻을 게 뭐 있다고.

‘중늙은이와 청년이라. 부자 관계는 아니야.’

그렇다기엔 중늙은이는 평범하기 그지없었고 미청년은 누가 봐도 놀랄 만큼 대단한 미남이었다.

‘둘 다 행색으로 봐선 상인이 아니라 무인인데. 설령 상인이라 해도 저들이 여기 있는 건 말이 안 되지.’

이익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거는 상인들이 굳이 몇 다리씩 거쳐가며 동방과 교역하는 이유가 있었다.

직접 하면 이익이 클 것 같으나 너무 멀고 위험해서 비용으로 전부 빠지는 것이다.

‘설마 유람을 온 건 아닐 테고.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콘라트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속으로 웃었다.

사실, 저들이 왜 프로부뉴에 있는지. 신분이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들은 바로 그 머나먼 ‘해가 뜨는 땅’에서 온, 세상에서 제일 만나보기 어려운 인종이었다.

‘이건 기회다. 잘하면 좋은 자리로 옮길 수 있어.’

콘라트는 세상에서 제일 큰 부와 권력을 가졌는데도 그 누구보다 탐욕스러운 한 노인을 떠올렸다가 지웠다.

“부단장.”

“네, 단장님.”

“잠시 멈춘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부단장이 기사단을 향해 돌아서는 순간, 콘라트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부단장의 한쪽 입꼬리가 아주 미미하게 올라간 걸 본 것이다.

그건 분명 조소였다.

‘이놈! 가끔 내 속마음을 읽어도 일을 잘해 그냥 넘어갔거늘 그간 잘도 속여왔구나. 충직한 척하더니 내가 뭘 하려는지 알아채고 비웃어?’

저런 음흉한 놈이 부단장 자리에 만족할 리 있나.

일이 뜻대로 안 풀릴 경우도 대비해야 했다.

지금의 직위가 마음에 들진 않으나 저런 놈에게 밀려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우선 이 일이 잘되게 해야 해.’

슈테른 기사단은 갑작스러운 명령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동시에 말을 세웠다.

콘라트는 그들 사이를 지나 원래 있던 행렬의 한복판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 서 있는 화려한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에티호넨 백작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왜 멈춘 것이오, 콘라트 경? 그것과 관계된 일이오?”

“그렇습니다.”

“일단 들어오시오.”

말에서 내린 콘라트는 마차 안에 들어가 그 안에 있던 중년인의 맞은편에 앉아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말했다.

묵묵히 듣던 중년인은 얘기가 끝나자 희미하게 웃었다.

“그 희귀한 이민족들을 잡아 황제 폐하께 바치자는 말로 들리오만.”

“그렇습니다.”

“잘되었소. 폐하께서 흥미로워하실 것이오.”

“그 일로 백작님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거참.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 사행의 주체시잖습니까.”

“대체 무엇이길래 그러오?”

콘라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부 제 공이라 보고해 주십시오.”

“……!”

중년인의 눈이 가늘어지며 섬뜩한 빛을 뿜었다.

“콘라트 경, 그렇게 안 봤는데 욕심이 지나치시군. 이 사행의 주체가 누군지 본인이 직접 말해놓고도 어떻게 그런 소리를.”

“그 정도는 되어야 폐하께서 제게 아주 작은 관심이나마 가지실 겁니다. 제 나이를 고려해 주십시오. 언제까지 이런 실속 없는 자리에서 얼마 남지 않은 삶을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슈테른 기사단장은 황제 직속의 다른 기사단장들과 비교하면 정말 볼품없는 직위였다.

황실의 예식과 행사에서는 잘 치장된 석상 역할이나 하고 자국과 타국의 사신이나 호위하는, 권력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한직인 것이다.

“백작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 혼자 이득을 보려는 건 아닙니다.”

“어디 들어나 봅시다.”

“이민족들과 일행인 여인이 대단한 미인입니다.”

“……그 여자로 만족해라?”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여색을 밝힌다고 놀리는 것이오?”

황당해하던 중년인이 분노했으나 콘라트는 진지했다.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느라 견문이 넓은 저조차 몇 번 보지 못한 미인입니다. 전에 봤던 이들은 엘프나 하프 엘프였지요.”

“……그 말은?”

“보통 사람이 그녀를 보면 감탄이나 하겠지만 저는 압니다. 그건 인간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

열기가 맺힌 중년인의 눈에 콘라트가 불을 지폈다.

“이종족들이 멸종해 가는 시대입니다. 운이 아주 좋지 않은 이상 엘프든 하프 엘프든 다시 만나긴 어려울 겁니다.”

확실히 그랬다.

황제야 그런 노리개들을 여럿 가져봤고 지금도 있으니 관심도 없겠지만 중년인에겐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 가능성이 컸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소. 허나 그녀를 잡아가면 눈독 들이는 자들이 나올 것이오.”

그보다 큰 권력을 가진 자들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콘라트는 해결책이 있었다.

“그 여자는 그리 멍청하진 않은지 긴 금발로 귀를 가리고 있더군요. 길을 막은 자들의 일행인 죄를 물어 제가 직접 제압해 이 마차에 넣어드리겠습니다. 그럼 다들 그냥 아름다운 여인이 안타까운 일을 당했다고만 생각할 겁니다.”

“흐음. 그런 수가 있었군. 흐흐.”

이럴 땐 여색을 유난히 밝히는 중년인의 명성이 도움이 됐다.

욕이야 좀 먹겠지만 그게 뭐 대수라고.

음흉하게 웃는 중년인에게 콘라트가 나직이 청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무리는 백작님께서 잘 이해시켜 주십시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다른 때면 몰라도 지금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헌데 그녀가 인간이면?”

“이민족들을 잡아 폐하께 진상한 공은 오롯이 이 사행의 주체자인 백작님의 것이며 따로 성의 표시를 하겠습니다.”

“좋소. 가봅시다.”

두 사람이 흉계를 꾸미고 마차에서 나오자 마침 그들이 언급했던 무리의 수장이 와 있었다.

“허어. 알베르 공작께서 여긴 무슨 일로?”

중년인이 짐짓 놀란척하며 내뱉은 존댓말과 반말을 섞은 물음에 땅딸막한 노인이 유창한 휜펠어로 대답했다.

“실례하오, 에티호넨 백작. 사행이 중지됐기에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왔소.”

“그럼 그들이 어떤 죄를 범했는지 잘 보셨겠구려.”

“그렇소. 본국에서 이런 안 좋은 일이 일어난 데 대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그들이 그만한 대가를 치르도록 조치하리다.”

노인의 정중한 사과는 통하지 않았다.

“알베르 공작, 우리가 직접 처리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이민족들은 그리하시고 여인은 본국 사람 같으니 우리가 맡겠소.”

중년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 분명 신경 쓰시지 말라고 했는데 귀가 어두워서 못 들으셨나 보오.”

“……!”

왕국의 작위와 관직은 제국의 것보다 한 단계 낮은 법.

그래도 노인은 프로부뉴 왕국의 공작이고 중년인은 휜펠 제국의 백작이니 여전히 노인이 한 단계 위인데 이따위로 나오다니.

그래도 노인은 이를 지그시 물고 솟구치는 화를 억지로 가라앉혔다.

중년인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해서였다.

과연 예상대로였다.

“알베르 공작, 귀국에는 이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재앙이 닥치기 직전이거늘,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할 여유가 있나 보오. 아국의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간청하러 가는 길 아니었소?”

“……실수한 걸 사과하오.”

“하하. 뭐 그럴 수도 있지. 사과는 받겠소. 하지만 이번만이오. 어서 본래 자리로 돌아가시오.”

중년인은 대답도 듣지 않고 콘라트와 함께 행렬의 앞으로 나갔다.

얼마 안 가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대단한 미모구나! 빈말이 아니었어!’

중년인이 넋이 나간 얼굴로 검은 로브를 입은 여인을 보는데 옆에 있던 콘라트가 작게 헛기침했다.

“크흠. 백작님, 저 무도한 자들이 사행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제가 직접 나서서 죄를 물을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아! 그, 그러시오. 사내들은 죄질이 무거우니 아국으로 끌고 가 적절한 형벌을 내리고 여인은…… 흠, 흠. 나름 예의는 지켰으나 일행이 죄를 저지르는 걸 방관했지. 내가 알아서 처리하리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콘라트는 죄인들을 노려보며 준엄하게 꾸짖었다.

“네 이놈들! 나는 위대한 휜펠 제국의 슈테른 기사단장이다! 감히 본국의 사행을 막아?”

대단한 미청년이 공용어로 요청했다.

“단장님, 제가 아직 휜펠어는 좀 부족해서요. 공용어로 해주실래요?”

“……그럴 테니 지금부터 똑똑히 들어라!”

콘라트는 미청년 일행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조목조목 말했다.

그러자 미청년이 피식 웃으며 나무랐다.

“우리 둘은 그렇다 치고. 에스텔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솔직히 말해봐요. 혹했죠?”

“망발이 지나치다!”

“무고한 숙녀를 괴롭히면 쓰나. 뜻밖의 명분이 생겼네. 굳이 필요하진 않지만…….”

미청년의 다음 말은 콘라트의 코앞에서 들렸다.

“성의를 생각해서 받을게요.”

“헉!”

* * *

콰아앙!

정광은 코앞에 있는 상대에게 주먹을 내지르고 감탄했다.

‘이야, 예상을 뛰어넘네.’

거창하기 그지없는 갑옷과 지나치게 큰 검을 보고 어느 정도 짐작했건만, 기사단장이라는 녀석은 그것보다 더 우직한 상대였다.

힘은 힘으로 부딪히겠다는 듯 대검을 전면에 세워서 넓은 검면으로 주먹을 막은 것이다.

‘이런 건 어떻게 대응할까.’

정광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뒤로 주르륵 밀려나는 기사단장에게 쇄도했다.

그리고 두 주먹을 눈부신 속도로 휘둘렀다.

콰콰콰콰콰콱-

‘뭔데 이거. 재밌잖아.’

정광의 얼굴이 더 밝아졌다.

그 많은 주먹질을 갑옷으로 무식하게 견디며 뒷걸음질 치더니 반격까지 할 줄이야!

‘좋아. 이것도 받아봐.’

정광은 자신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는 거검보다 빨리 기사단장에게 다가가 오른 다리에 힘을 줬다.

까앙!

‘이런. 여기까진가.’

암습에는 약한 건지 정광이 올려 찬 발에 낭심을 걷어차인 기사단장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하늘로 쏘아졌다.

이곳저곳 형편없이 우그러진 갑옷이 햇빛을 반짝반짝 반사해 별처럼 빛났다.

‘그래도 신선하네. 늦기 전에 다른 놈들도 맛봐야겠어.’

자오는 오랜만의 싸움이라 신이 났는지 바람보다 날래고 야수보다 용맹하게 날뛰고 있었다.

정광은 그나마 강해 보이는 놈들부터 하나씩 음미했다.

그 목록 속에는 실력으로 보아 부단장쯤 될 것 같은 너구리과 녀석과 에스텔을 주시하며 기분 나쁜 눈빛을 흘리던 중년인도 있었다.

이렇게 피떡이 되어버린 중년인에 의해 후방으로 쫓겨났던 공작 일행은 두 눈을 찢어져라 크게 뜨고 사신들을 바라봤다.

‘강하다! 정말 강해!’

‘저게 동방의 무술인가! 둘 다 정말 대단하구나!’

그 둘과 몇 달 동안 함께해 온 에스텔도 경악하긴 마찬가지.

몬스터들을 몰살시킨 것도 대단했지만 본능과 육신의 힘만으로 날뛰는 그놈들과 뛰어난 마나 운용법을 익히고 고급 검술을 연마한 슈테른 기사단을 어찌 비교할까.

‘자오도 자오지만 저 녀석, 저 나이에 저렇게 엄청난 무력을 발휘한다고? 그게 가능해?’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낸 정광이 양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그녀를 불렀다.

“에스텔.”

“으, 응?”

“아주 나쁘진 않네요. 금의위와는 다른 맛이 있어요.”

“그, 그래? 다행이다. 수고했어.”

정광은 멀찍이 서 있는 공작 일행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기요. 여기 누워 있는 분들과 소속이 다르신 것 같은데. 그쪽도 하실 거예요?”

“……!”

그럴 리가 있나.

알베르 공작이 대표로 사양했다.

“그대들과 겨룰 생각은 없소. 우리는 휜펠 제국으로 가는 프로부뉴 사절단이오.”

“신기하네요. 그런 분들이 타국 사신단이 자국 영토를 가로지르는데 왜 뒤에서 따라다니시죠? 군을 동원해서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둘러싸고 감시하는 게 정상일 텐데.”

당연한 말이건만.

그런 굴욕을 당할 정도로 두 나라의 국력 차이는 컸다.

정곡을 찔린 공작 일행이 울분을 삼키는데 정광이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나라에 힘이 아예 없는 건 아니네요.”

정광은 그의 시선 끝에 있는 무리의 선두에서 말달리는 자에게 외쳤다.

“실례지만 어느 나라 분이시죠? 국적에 따라 대접을 달리해야 해서요!”

고풍스러운 갑옷을 입고 명마 위에 올라타 흰 수염을 휘날리며 달려오던 노인이 당당히 화답했다.

“나는 영광스러운 프로부뉴의 후작, 에브뢰다!”

“저런.”

정광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땅바닥에 주저앉는 에스텔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시다네요.”

“하. 하하. 아하하하.”

에스텔의 허탈한 웃음에 이어 구슬픈 절규가 울려 퍼졌다.

“아주 쉼 없이 오는구나! 끝없이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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