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52화 (552/569)

암흑대공전기(暗黑大公傳奇) 3화

시작

에스텔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을 더듬거렸다.

정곡을 찔러도 정도가 있지, 이렇게 아프게 찌르다니!

“너, 너. 대, 대체 무슨 말을…….”

“이런.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나? 다시 정리해서 찬찬히 말씀드릴까요?”

게다가 얄밉기까지!

에스텔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강하게 부정했다.

“웃기지 마! 반은 틀렸어!”

“성격 쪽이요, 기술적 특성 쪽이요?”

“성격이야 내가 이런 거고. 특성 말이다, 특성! 마녀는 음침하고 사악한 직종이 아니야! 겉모습으로만 판단해서 두려워하거나 멸시하지 말라고!”

하프 엘프라는 겉모습 때문에 삼십 년 동안 고통받으며 절망스러운 나날을 보낸 에스텔이었다.

그런 그녀를 구하고 새 삶을 살게 해준 스승님이 마녀였거늘, 감히 뭘 안다고!

분을 토하고도 풀리지 않아 한 마디 더 쏘아붙이려 하는데 정광이 더 빨랐다.

“약물을 제조하고 저주를 퍼붓는 게 어때서요?”

“그러니까 내 말은, 뭐?”

“나름 효율적이고 쓸모가 많은 수법들인데 폄하할 이유가 없잖아요. 성품만 비꼰 거니 오해하지 마세요.”

“……정말?”

“물론이죠. 여태까지 겨루면서 제가 뭐라 한 적 있나요? 그냥 패기만 했지.”

“……그러게.”

돌이켜보니 정말 그랬다.

동방에서 온 이 괴물은 그녀의 외모에 현혹되지도, 수법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 ‘사람’으로 대했을 뿐이었다.

“오해해서 미안. 그런데 이상하게 아직도 기분이 별로네.”

“기분 탓이겠죠. 뭐 그 얘긴 여기까지 하고.”

정광이 화제를 돌렸다.

“내일 우리와 같이 가요.”

“응?”

“여기 박혀서 청승 떨지 말고 함께 세상 구경이나 하자고요.”

“하아. 지금까지 뭘 들었니? 나한테 밖은 위험하다니까.”

에스텔은 피곤한 표정을 짓다가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입을 살짝 벌렸다.

“우리와 함께 다니면 안전해요.”

“……네가 강한 건 아는데. 너무 오만한 거 아냐?”

“사실인데.”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런데 그렇게 강한 분이 나를 왜?”

정광이 명쾌하게 설명했다.

“지금껏 세상을 돌면서 자오가 언어 문제로 고생을 많이 해서요. 에스텔은 비록 불친절하지만 잘 가르치고…….”

“단주!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정말 감동…….”

“천만에요, 자오. 어쨌든 에스텔은 대륙 곳곳에 팔려 다녔으니 길잡이로도 딱이죠. 이번 기회에 본인의 발로 넓은 세상을 걸어봐요.”

“……!”

심드렁하게 듣던 에스텔은 ‘이번 기회에 본인의 발로’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라고 이 작은 숲에 평생 갇혀 살고 싶을 리 있나.

언젠가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수레에 짐짝처럼 실려서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자기 발로 직접 걷길 원했다.

하지만 두려워서 실행할 엄두도 못 내던 차에 이런 제안을 듣게 될 줄이야.

‘정말 지금이 기회일지도…….’

정광의 정확한 수준을 가늠할 순 없으나 매우 강하니 혼자 다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안전하리라.

‘뒤통수 맞을 일도 적고. 둘 다 성품에 큰 결점이 있지만 신의 하나는 강해.’

오랫동안 각양각색의 악의에 담금질 되며 길러진 안목으로 그들을 보아온 바에 의하면 그랬다.

‘게다가 나만 도움을 받는 게 아니지. 나도 돕는 관계라고.’

빚지는 것도 아니니 당당히 걸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 앞으로 더 좋은 기회가 올까?’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이건 인생의 두 번째 기회였다.

문득 외모는 추악하기 그지없으나 마음만큼은 아름다웠던 노파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스승님, 제게 첫 번째 기회를 주실 때 저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남으라 하셨죠?’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 정녕 원하는 것을 하는 것보다 더 들어맞는 게 어디 있을까.

‘살아남는 게 문제인데…….’

에스텔은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생각할 시간을 줘. 내일 오전까지 결정해서 말해줄게.”

그리고 다음 날.

그녀는 동이 트기도 전에 손님들이 묵고 있는 통나무집 문을 시원하게 열어젖히며 외쳤다.

“어차피 여기 남아도 하나는 놓치는 건데 까짓것 해보지 뭐! 자오! 빨리 나와서 짐 싸는 것 좀 도와줘요!”

* * *

프로부뉴국 궁전 대회의실, 화려한 의복과 장신구로 전신을 치장한 중늙은이가 맞은편에 있는 비슷한 차림새의 비대한 노인에게 소리쳤다.

“몽포르 백작! 우리가 도와야 한다니! 그게 말이 되오?”

비대한 노인도 목소리를 높여 대응했다.

“당연히 도와야지! 그럼 루에르그 백작은 다른 고견이 있소이까?”

“허어. 아까 휜펠 제국에서 온 사자가 뱉은 망언을 듣고도 그런 말을! 제 놈들이 아국으로 몬스터들을 밀어 넣었으면서도 그 몬스터들이 한순간에 몰살당한 이유를 설명하라니! 그게 말이 되냔 말이오!”

“그야 당연히 되지! 아국도 누가 그랬는지 몰라 혼란한 상황인데 타국도 궁금해할 수밖에!”

“바로 그 사고방식이 문제요! 왜 우리가 그들의 사정을 헤아리고 맞춰줘야 하오?”

“국력의 차이가 뚜렷하니까! 감정을 내세울 때가 아니잖소! 어차피 더 큰 일 때문에 휜펠 제국의 도움을 받아야 할 판국에 이런 작은 일을 따져봐야 이득이 되는 게 무엇이라고!”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무어라? 말이 심하구나!”

이렇게 설전을 벌이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귀족들이 저마다 다른 주장을 하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만! 이만하면 되었소!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낼 테니 모두 나가보시오!”

프로부뉴 국왕 발부에 6세의 위엄있는 음성이 장내를 울렸고, 첨예하게 토론하던 귀족들은 급히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왕좌에 앉아 그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국왕은 대회의실 문이 닫히자마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도다. 평소면 모를까 이 와중에도 탁상공론이나 하며 다투다니.’

덕분에 머리가 얼마나 아픈지, 이제 갓 장년이 되었건만 왕좌에서 물러나고 싶었다.

‘이런. 그렇게 다짐해 놓고도 또 이런 약한 생각을. 버텨야 해. 그래야 조금이라도 백성들이 편해져.’

그의 고뇌를 읽은 걸까?

대회의실에 홀로 남아 있던 추기경이 나직이 충고했다.

“전하. 힘드시겠지만 버티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쓰러지시면 아국은 순식간에 갈가리 찢어져 전화에 휩싸이고 백성들은 더욱더 힘든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과인이 잠시 실수했소. 바로 떨쳐냈으니 안심하시오.”

국왕은 앉은 자세를 바로 하고 왕국에 몇 안 되는 인재 중 한 명과 제대로 된 회의를 시작했다.

“석 달 전에 있었던 몬스터들이 몰살된 사건부터 얘기해 봅시다. 그간 총력을 기울여 조사했는데도 어찌 된 연유인지 알아낼 수 없었소.”

“그렇습니다. 언젠가 알아낼 거라 장담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사체들을 해체해서 값나가는 것들을 가져간 건 그렇다 치고. 살을 베어서 굽거나 삶아 먹은 흔적이 있었다던데 ‘해가 불타는 땅’의 야만인들이라도 넘어온 걸까? 아무리 그들이라 해도 그런 흉악한 짓을 하진 않을 것 같소만. 소리소문없이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게 가능하지도 않고.”

“소인의 생각도 전하와 같습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휜펠 제국은 아국이 숨기고 있던 무력 조직이 있고 그들을 쓴 건 아닌지 추궁하고 있지요. 아국에 그럴 여력이 없다시피 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압박하려고 말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그런 힘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것만으로 이번 위기를 극복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손 하나가 아쉬운 형국 아닌가?

“사실 아국에는 그보다 훨씬 더 강한, 그 누구보다 위대한 힘을 지닌 자가 웅크리고 있긴 하지. 추기경, 그 건으로 넘어갑시다. 그의 상태는 요즘 어떻소?”

국왕의 물음에 추기경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심상치 않습니다.”

“그런 지 꽤 됐고 타국조차 세작들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 아니오? 과인은 마음의 준비가 됐으니 정확히 말하시오.”

“곧 깨어나 기지개를 켤 것 같습니다. 제국에서 온 사신도 대놓고 조사하고 있습니다.”

“……도중에라도 다시 잠들길 바랐건만. 결국엔 이렇게 되는구려.”

국왕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고 분노를 토했다.

“탐욕스러운 제국 놈들, 아국을 돕겠다며 밀고 들어와 과인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방패막이로 쓰겠지.”

진퇴양난이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면 피해라도 줄여야 했다.

“추기경.”

“네, 전하.”

국왕은 비장하게 명했다.

“계획은 그대로요. 첫째, 그의 터전인 ‘침묵의 산’ 근처에 사는 백성들을 먼 곳으로 이주시키고 산 주위에 병력을 집중시킬 준비를 하시오.”

“조용히, 신속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둘째, 휜펠 제국으로 보낼 사신단을 꾸리고 그간 공들여 왔던 그쪽 귀족들과 접촉하게 하시오.”

“아국 정병들이 피를 최대한 덜 흘리게 도우도록 휜펠 귀족들에게 많은 뇌물을 안겨주겠습니다.”

“셋째, 상황이 이렇게 되니 제일 가벼운 문제가 되어버렸군. 몬스터들을 누가 몰살시켰는지 우리도 모른다고 사신 놈에게 솔직히 알리시오. 섭섭지 않게 챙겨주고 놈이 원하는 정보를 주면 돌아가서 한마디라도 좋은 말을 하겠지.”

“그는 반드시 그렇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괴물들을 도륙했는지 현지 영주인 에브뢰 후작에게 더 알아보라 하시오. 좋은 변수로 작용하면 좋으련만…… 또 약한 소리를 했군. 그럴 일은 없는데.”

추기경이 안쓰러운 얼굴로 젊은 국왕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명을 이행하겠나이다, 전하. 그리고 교황청에 휜펠 제국의 부당함을 다시 한번 호소하고 중재를 부탁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교황청에?”

“그렇습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하하. 추기경이야말로 마음이 약해지셨소.”

국왕은 헛웃음을 짓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교황 성하께서 나선다고 황제가 눈썹 하나 까딱할 리 있나. 신들은 인간의 끝없는 욕심에 진저리를 치며 신화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고 엘프와 드워프 같은 이종족들 역시 같은 이유로 멸종해 가는 시대. 그래도 마지막까지 남을 거라 믿었던 그 위대한 존재는 인간의 탐욕을 견뎌낼 수 있을까?”

아무리 그라 해도 갓 깨어난 상태론 쉽지 않으리라.

휜펠 제국은 그만큼 강했다.

* * *

에스텔이 괜히 자오에게 짐 싸는 걸 도와달라고 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가져가려고 하는 건 그만큼 많았다.

오후가 돼서야 그 많은 짐을 짊어지고 출발한 그들은 이틀 후 저녁이 돼서야 목적한 도시에 도착했다.

“역시 나 혼자 왔던 때와는 확연히 달라. 두렵긴커녕 마음이 아주 든든해서 죽겠는걸.”

에스텔이 너스레를 떨었으나 정광은 도시의 야경을 둘러보며 다른 소리를 했다.

“어깨가 뻐근하네. 사람이 살 만한 곳에 왔으니 제대로 된 요리를 먹고 편안한 곳에서 자죠.”

“하여간 칭찬해 봐야 소용없다니까. 딴소리나 하고 말이야.”

에스텔은 이맛살을 모으며 구석진 골목으로 향했다.

“따라와.”

“그쪽엔 괜찮은 식당과 여관이 없을 것 같은데요.”

“스승님 때부터 거래했던 암상인이 있어서 이 도시에 들른 거야. 거추장스러운 짐을 지고 다니기 싫으면 그 사람부터 만나야지.”

“여비를 만들겠다 이거죠? 그럼 가야죠.”

그들은 좁고 음침한 골목을 지나 다 쓰러져 가는 집들이 빽빽이 서 있는 구역에 도착했다.

에스텔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집들을 훑어보다가 한 판잣집 대문에 그려진 낙서를 보고 싱긋 웃었다.

수시로 위치가 바뀌는 암상인의 상점을 찾은 것이다.

“저기네. 가자.”

“네.”

삐거덕대는 문을 억지로 밀고 들어가 보니 잡동사니가 널려 있는 폐가였는데, 다리 길이가 맞지 않아 기우뚱거리는 의자에 앉자 얼굴이 창백한 중년인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는 다짜고짜 에스텔에게 경고했다.

“외인은 곤란해. 지금부터 모든 책임은 너에게 있다.”

“그야 물론이죠, 마뉘엘. 제가 신원 보증을 설게요.”

“팔 물건은?”

에스텔은 가져온 짐들의 대부분을 중년인의 발치에 놓았다.

“이것들요. 귀한 것들이니 제대로 쳐주세요.”

“많군. 기다려라.”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 없었다.

짐을 풀어보던 중년인은 채 반도 풀기 전에 창백했던 얼굴이 시체처럼 파리해졌다.

크고 날카로운 손톱, 가볍지만 단단한 뼈, 유리병에 밀봉된 진득한 핏물, 탄력 넘치는 힘줄, 약품으로 방부 처리된 내장, 질기디질긴 가죽 등 제대로만 가공하면 큰 쓰임새가 있는 물품들로 가득한 것 아닌가!

“이럴 수가…….”

“예상보다 대단하죠?”

에스텔은 으스댔고 중년인도 인정했다.

“너무 대단해서 문제군. 질도 질이지만 이렇게 많은 종류와 양이라니.”

“고생 좀 했죠.”

“한 번에 이런 물량이라는 건…… 휜펠 제국에서 밀어 넣은 몬스터들을 죽이고 얻은 것이냐?”

“잠깐만요. 그런 건 서로 묻지 않는 게 원칙일 텐데요. 설마 돈을 떼먹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죠?”

에스텔이 정색하며 따졌으나 중년인은 멈추지 않았다.

“대금은 제대로 치를 거다. 중요한 일이니 솔직히 말해. 물을 필요도 없이 확실한 상황이지만 그간의 신용을 생각해서 이러는 거다.”

“신용은 개뿔! 그걸 입에 담는 사람이 이렇게 나와? 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예요? 이유나 말해봐요.”

에스텔이 화를 내자 중년인은 가늘게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미안하다. 왕궁에서 누가 몬스터들을 학살했는지 알아내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 지역 영주인 에브뢰 후작에게 보고해야 해.”

“하! 암상 길드도 다됐네. 왕의 개가 되어 재롱이나 부리고.”

에스텔이 이죽거렸으나 중년인은 흔들리지 않았다.

“개가 된 게 아니야.”

“그럼 원숭이?”

“도발해도 소용없다. 네가 알아봐야 좋을 게 없어.”

“하아아. 그럼 알면 안 되는 이유라도…….”

“그렇게 한가한 때가 아니다.”

중년인의 시선이 정광과 자오에게 향했다.

“에스텔이 강하다 해도 그럴 능력은 없고. 당신들 짓이겠군. 동방에서 온 자들로 보이는데. 정체가 무엇이오?”

에스텔이 정광의 팔을 잡고 소리를 빽 질렀다.

“말하지 마!”

“왜요?”

“권력에 빌붙어 신용을 저버리고, 자기는 물으면서 대답은 안 하는 치사한 인간과 대화를 왜 해?”

“그래도 모른척하다가 나중에 몰래 일러바치는 것보단 낫죠.”

“그, 그렇긴 하지.”

“물론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지만요.”

정광은 중년인을 응시하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마뉘엘이라 했죠? 우리가 그랬다면 어쩔 건데요?”

“……!”

중년인은 말과 함께 전해지는 정광의 무시무시한 살기에 몸을 가늘게 떨다가 간신히 대꾸했다.

“그대로 보고할 것이오.”

“그런 말을 하실 때가 아닌데.”

“나를 죽여서 입을 봉할 생각이라면 이미 늦었소. 이런 위험한 사업을 아무 대책 없이 할 것 같소? 내 동료가 안전한 곳에서 모두 듣고 있소. 서로에게 좋은 쪽으로 협상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오.”

“그 대책이라는 게 참.”

정광은 시선을 돌려 방구석에 있는 초라한 소라 껍데기를 보며 미소 지었다.

“재밌는 기술이 많은 동네야. 저런 걸로 얘기를 전달하고.”

“……!”

입을 떡 벌렸던 중년인은 정광의 이어지는 행동과 말에 침까지 흘렸다.

“소리가 저쪽으로 나가네. 거리는 삼십 장, 아니지. 여기 단위에 익숙해져야 해. 대충 98야드인가. 먼 곳도 아니네요.”

“그, 그걸 어떻게!”

“여기까지. 배도 고프고 잠도 오는데 빨리 끝내죠.”

“…….”

중년인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에스텔에게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이해해 달라고는 안 하마. 미안했다.”

“아니, 마뉘엘. 그러니까 왜 이런 짓을 한 건지 말을…….”

“그만. 조심히 가라.”

중년인은 안타까워하는 에스텔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가슴을 펴고 정광을 마주했다.

“시작하시오.”

“그쪽이 시작하셔야죠.”

“……?”

정광은 어리둥절해하는 중년인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강조했다.

“보고는 알아서 하시고. 값이나 아주아주 후하게 쳐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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