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대공전기(暗黑大公傳奇) 1화
편견
바다와 하늘밖에 안 보이는 망망대해, 그 푸른 세상에 큰 배가 홀로 떠 있었다.
갑판 위에는 피부가 먹물처럼 검은 수부들이 웃통을 벗은 채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들의 분투 덕분에 배는 거친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용케 나아갔다.
수부들이 이 고생을 하는데 선장이라고 다를까, 아자니 역시 기이한 문신이 새겨진 검은 피부에 땀이 배어 번들거릴 만큼 쉼 없이 지시하고 독려하다가 하늘과 바다를 번갈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좀 나을까 했는데 여전하군. 햇살이 이렇게 뜨거운데 파도까지 거세다니.’
살가죽이 타고 내장이 뒤틀리는 느낌이 따로 있나.
평생을 살아온 곳이고 앞으로도 살아갈 터전이지만 정말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후우우. 나도 이렇게 힘든데 외지인은 오죽할까.’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치고 심호흡하던 아자니는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뱃머리를 쳐다봤다.
‘아!’
작열하는 태양을 비웃는 듯한 단정한 옷차림, 사나운 파도가 무색하게 꼿꼿이 서서 세상을 묵묵히 마주하는 한 사내의 뒷모습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그 고독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에 아자니는 신음 섞인 말투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괜한 걱정을 했어. 과연 대단하구나.”
“뭐가요?”
옆에서 불쑥 들려온 물음에 아자니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선수에 서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대단한 외지인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언제나 느끼는 점이지만 살을 익혀 버릴 만큼 강렬한 태양을 비웃듯 백옥처럼 밝고 고운 피부가 경이로웠다.
아자니는 더없이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입을 열었다.
“치크, 나오셨습니까? 배가 많이 흔들려서 깨셨군요.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라뇨? 공짜로 얻어 타는 사람한테 무슨.”
“…….”
아자니는 황당해하는 상대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깟 배 좀 태워주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해가 불타는 땅’을 주유하며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때로는 갖가지 변덕을 부리며 수많은 전쟁을 종식한 괴물이자 아자니의 부족을 구해준 은인이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전장에선 더없이 오만하더니 왜 이런 겸손한 말을…… 아!’
[선악도 인과도 오롯이 그의 것이다. 의문을 가져서도, 이해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저 따라야 한다.]
부족 최고의 주술사가 신령과 접신하다가 공포에 질려 뒤로 넘어가며 외친 말을 떠올리는데 아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소족장님?”
“……!”
아자니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뱃머리에 석상처럼 서 있는 사내를 가리켰다.
“이, 일행분 말입니다. 별명이 너무 잘 어울려서 감탄했습니다.”
“네?”
“싸울 때는 바람보다 날래고 야수보다 용맹하지만, 평상시에는 산처럼 무겁고 과묵하지 않습니까? 과연 카마우(조용한 전사)라고 불릴 만합니다.”
“아.”
괴물이자 은인인 청년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미소 지었다.
같은 사내인 아자니도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잠시 멍하니 보는데 청년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다들 똑같은 오해를 하시니 재밌네요.”
“무, 무슨 말씀이신지?”
“저 말 많은 분이 무겁고 과묵하다니 재밌을 수밖에요.”
“말이 많다니요? 소문도 그렇고 직접 접해본 바로도 그렇고 말씀을 거의 안 하시던데…….”
아자니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의문을 가져선 안 된다’라는 금기를 어긴 걸 뒤늦게 깨닫고 말끝을 흐렸다.
청년은 그 어색한 모습이 흥미로운지 눈부신 미소를 한 번 더 발산하고 질문을 던졌다.
“언어가 전혀 다른 외지에 가면 어떡해야 하죠? 그곳 말을 배워야겠죠?”
“그렇습니다.”
“제일 빨리 배우는 방법은 최대한 그곳 말만 쓰는 거고요. 예를 들면 일행끼리 있을 때만 빼고요.”
“그렇겠지요.”
“우리가 바로 그러기로 했는데 ‘해가 불타는 땅’은 워낙 넓어서 그런지 부족이 수없이 많고 언어도 그만큼 다르더군요. 조금 익숙해졌다 싶으면 다른 말을 쓰는 지역이 나타나는 게 반복되니 배울 의지가 사라질 수밖에요.”
“하긴. 인접한 부족끼리는 비슷한 부분이 꽤 있으나 두세 다리만 건너면 거의 다른 언어지요. 당연히 좌절할 만합니…… 아! 카마우는 이곳 말을 몰라서 침묵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네.”
“그런데 치크께선 어떻게 저희 말을 잘하시는 겁니까?”
“저니까요.”
“…….”
청년의 오만한 대답에 아자니는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치크’란 ‘신의 힘을 가진 자’를 일컫는 말.
부족마다 발음은 다르나 똑같은 의미의 칭호를 얻은 신인(神人)이 못할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역시 치크십니다.”
“뭘요.”
“카마우는 안쓰럽지만 말입니다.”
“제가 더 불쌍하죠.”
“네?”
청년은 의아해하는 아자니에게 허허롭게 웃으며 답했다.
“그분과 말이 통하는 사람이 저밖에 없잖아요. 단둘이 있을 때마다 그간 억눌렀던 수다를 다 들어줘야 했었거든요.”
“아!”
“하지만 그 고생도 이제 끝이에요.”
청년은 선수에 서 있는 카마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수평선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던 카마우가 시선을 돌렸다.
청년은 강렬한 햇볕에 그을린 그의 얼굴과 눈에 띄게 늘어난 흰머리를 지그시 보다가 어깨를 토닥였다.
“그간 고생했어요, 자오.”
자오의 두 눈이 순식간에 붉게 충혈됐다.
억누르고 있던 갑갑한 마음과 설움이 밀려온 것이다.
“파사(波斯:페르시아)는 언어가 그리 다양하지 않아 수월했습니다. 허나 천축(天竺:인도)으로 가니 악몽이 시작되더군요. 언어가 팔백 개가 넘다니, 말이 됩니까? 간신히 버티고 버티다가 배를 타고 아랍백(阿拉伯:아라비아)에 도착하고 나서야 좀 살 만해졌는데…… 그 뒤에 온 아주(阿洲:아프리카)는 정말 사람 살 곳이 아닙니다. 제가 센 언어만 해도 이천 개가 넘습니다. 그걸 무슨 수로 다 익힙니까? 차라리 팔대지옥(八大地獄)에 빠짐없이 떨어지는 게 낫지요. 후우우. 단주도 매일 제 푸념을 들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요 뭐.”
“아…….”
“지난 일은 잊으시고요. 조용한 전사라는 말도 안 되는 별호를 벗어던질 준비되셨죠?”
구슬픈 표정을 짓고 있던 자오는 수평선 끝에 희미하게 보이는 대륙을 노려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흐흐. 구주(歐洲:유럽)는 언어가 몇 안 되는 데다 공용어까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 익히는 것쯤이야 우습지요.”
그래, 이래야 다닐 만하지!
자오는 몸이 달아올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단주, 꿈의 대륙이 코앞에 있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코앞이라기엔 좀 먼데.”
그래도 이렇게 간절히 원하는데 거절할 수 있나.
정광은 피식 웃고 아자니를 돌아봤다.
“소족장님, 그만 갈게요. 쪽배 좀 내려주세요.”
한어라 뜻을 이해할 순 없었으나 자오의 엄청난 수다에 질려 있던 아자니가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 말입니까?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만.”
“괜찮아요.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부담되시잖아요.”
“…….”
‘해가 불타는 땅’과 ‘해가 지는 땅’은 적대적 관계.
두 대륙을 오가는 상선이 있긴 하나 극히 적었고 아자니의 배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치크.”
아자니는 즉시 수부들에게 명을 내렸고 얼마 안 가 쪽배 한 척이 바다에 내려졌다.
정광은 자오와 함께 쪽배에 뛰어내린 뒤 아자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이만.”
“치크의 앞길에 무궁한 영광이 있기를…….”
인사말을 마칠 겨를도 없었다. 자오가 노를 저었고 쪽배는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몰아치는 거대한 파도도 아무런 문제가 안 됐다. 정광의 가벼운 손짓에 폭발하며 뜨거운 햇살 아래 비산했다.
아자니는 수부들과 함께 그 장관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다가 쪽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그래! 이래야 치크시지! 오만한 ‘해가 지는 땅’ 녀석들아! 치크께서 가신다! 네놈들도 맛 좀 봐라!”
* * *
자오는 모래사장에 우뚝 서서 마치 고향에라도 온 것처럼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드, 드디어…… 드디어! 크흐흐흑.”
정광의 표정도 밝았다.
“날씨도 풍경도 좋네요.”
따사로운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
푸른 들판에 수목이 우거진 야트막한 산까지.
바다를 건넜을 뿐인데 작열하는 태양과 끝없는 사막, 메마른 초원이 사라지고 이런 아늑한 환경이 나타날 줄이야.
정광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쪽을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민가가 모여 있는데 사람의 기는 안 느껴지네요. 가보죠.”
“네, 단주!”
두 사람은 신법을 펼쳐 들판을 달렸다.
얼마 안 가 산 밑에 자리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는데 정광의 말대로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자오가 두 눈을 빛내며 주변을 훑어본 뒤 나직이 말했다.
“이상하군요. 일을 나갔으면 노인과 아이는 있어야 할 텐데 없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고 보기엔 남은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물, 작살, 농기구, 요리 도구 등 눈에 띄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집들의 상태가 좋고 이것저것 빠뜨리고 간 걸 보니 최근에 급하게 피난한 것 같습니다. 단주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자오와 같아요. 한번 둘러보죠.”
두 사람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면밀히 살폈다.
정광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곡물과 가축은 모조리 가져갔네요.”
“적에게 식량을 주지 않기 위해서일까요?”
“값어치로 치면 더 비싼 것들도 두고 갔으니 그럴 가능성이 크죠.”
“이것 참 큰일이군요.”
“그러게요. 제대로 된 고기 요리를 먹고 싶었는데 뻑뻑한 물소 육포로 때워야 한다니.”
“……아. 그것도 큰일이긴 합니다.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글쎄요. 일단 육포를 억지로 씹어 먹고…… 어라?”
정광이 고개를 돌려 마을 뒤에 있는 야트막한 산을 주시하자 자오가 긴장한 얼굴로 나직이 물었다.
“단주, 산에서 사람의 기가 느껴지십니까?”
“아뇨.”
“다행이군요. 이곳 사람들을 떠나게 한 자들이 온 줄 알았습니다.”
“산이 아니라 산 너머에 있어요.”
“네?”
“사람도 아니고요. 적은 수는 아니네요.”
정광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산 정상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자오도 급히 따라가 옆에 내려선 뒤 의문을 표했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아!”
정광이 내려다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자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멀리서 생전 처음 보는 흉악한 것들이 새카맣게 몰려오고 있는 것 아닌가!
“세상에, 이럴 수가! 저, 저런 괴물들이 있다니!”
“열심히 뛰어오네요.”
“대체 어떻게…… 잠깐. 그런데 왜 안 놀라십니까?”
“저런 놈들이 있다는 걸 몇 번 들었으니까요.”
“아. 그러시군요. 이게 아니지, 왜 저한테는 말씀을 안 하셨습니까?”
“자오의 수다를 듣다가 간간이 대답하기도 힘든데 저런 것까지 어떻게 말해요.”
“……죄송합니다, 단주.”
“뭘요.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편견 없이 보게 되니 더 좋잖아요. 소감이 어때요?”
“…….”
자오는 무질서하게 달려오는 괴물들을 최대한 편견을 배제하고 다시 감상했다.
녹색 피부, 왜소한 체격에 부엌칼을 꼬나 쥔 놈.
멧돼지 같은 얼굴에 어금니가 삐죽삐죽 나온 것만 해도 기괴한데 회색빛이 번들거리는 근육질 몸매를 과시하며 몽둥이를 치켜든 녀석.
일장이 훌쩍 넘는 키에 바위처럼 단단한 체구, 그 몸에 걸맞게 작은 나무를 뿌리째 뽑아 어깨에 걸친 채 괴성을 지르는 놈.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흉포하게 생겨 먹은 녀석들이 지천으로 널린 꼴이라니.
편견은 무슨!
괴물은 보는 순간 괴물인 걸 알지, 미리 안다고 무슨 편견이 있단 말인가!
“……제 수양이 부족한지 아무리 봐도 어엿한 괴물들입니다.”
“저런. 좀 더 정진하셔야겠어요.”
자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정광은 가볍게 다독여주고 운룡(雲龍)을 뽑았다.
스르릉-
운룡이 서늘한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빠져나와 괴물들을 오연히 굽어봤다.
정광의 품속에 있던 역천경(逆天鏡)도 마찬가지.
-우우우우웅!
끓어오른 살의를 참지 못하고 미친 듯이 진동하며 요기(妖氣)를 내뿜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시끄러워, 인마.
-…….
-얌전히 기다려. 피를 듬뿍 마시게 해줄 테니까.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역천경은 격렬히 저항했다.
저런 더러운 것들의 피를 마시라니, 나를 뭐로 보고?
정광이 눈살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요기를 먹어치우려고?
-웅! 웅!
-안 그래도 음침한 녀석이 더 심해지려고 하네. 안 돼. 얌전히 피나 마셔. 혹시 알아? 저놈들 중에도 네가 좋아하는 동남동녀(童男童女)가 있을지.
-…….
역천경은 눈이 없으나 각양각색의 괴물들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놈들도 암컷과 수컷이 있고 어린 것들이 있지만 그런 것들의 피라고 깨끗하겠는가?
-우우우우…….
-그만. 더 하면 반으로 접어버린다.
-……웅.
정광은 역천경을 얌전하게 만들고 자오에게 눈짓했다.
“준비됐죠?”
“물론입니다, 단주.”
“그럼 슬슬 도축하러 가죠.”
“알겠습니…… 네? 도, 도축이라니요?”
정광은 괴물들을 둘러보며 싱긋 웃었다.
“종류가 여럿이니 한두 종쯤은 먹을 만하겠죠. 네 발이 아니라 두 발로 뛰는 게 살짝 마음에 걸리는데, 설마 물소 육포보다 못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