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49화 (549/569)

외전 30화

또 다른 여행

건곤패검(乾坤覇劍) 제육초 패도단천(覇道斷天).

그 오만한 초식명은 과한 게 아니었다.

팽수빈이 하늘을 쪼갤 것 같은 거력을 담아 올려 친 검격에 섬랑이 떨어뜨린 붉은 유성이 산산이 조각났다.

콰아아앙!

‘……!’

섬랑은 그 충격 때문에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절멸(絶滅)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내려친 내가 오히려 밀려?’

다들 패검(覇劍), 패검하며 노래를 부르더니 과연.

청패(淸覇)라는 궁상맞은 이름의 무거운 장검을 두 손으로 써서 그만한 위력을 보이는 것이겠지만 대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단지 그뿐.

섬랑은 위축되지 않았다.

검도 실력도 좋을 거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던 터.

그 예상보다 더 뛰어나다는 걸 알게 됐지만 어쩌라고.

이쪽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보여주면 되지.

팽수빈은 장검을 위로 치켜든 상태였고 섬랑도 그랬으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나는 한 손이 남거든!’

과감하게 한 걸음 내디디며 왼손을 뻗었다.

권도 아니고 장도 아닌 파골금나수(破骨擒拿手)였다.

상대의 오른쪽 어깨를 잡고 부수려는 것이다.

어깨의 주인은 빠르게 대응했다.

장검을 내려치지 않고 뒤로 주르륵 물러났다.

적절한 거리를 확보하고 반격하기 위해서였다.

섬랑이 바라던 대로였다.

‘이거나 먹어!’

마혼(魔魂)이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거대한 악귀의 형상으로 일렁이던 검은 불길 중 일부가 순식간에 섬랑의 왼손바닥에 모이더니 동그랗게 응축됐다.

위대한 천신혁련가(天神赫連家)의 비기 중 하나인 쇄월광풍장(碎月狂風掌)!

새카만 구(球)가 섬랑의 손바닥을 박차고 나갔다.

콰아아아-

팽수빈은 허공을 찢어발기며 날아오는 흉포한 마기 덩어리를 보고 적을 인정했다.

‘생각보다 더 강해.’

피하자니 뒤에 있는 사람들이 위험했다.

애초에 그럴 마음도 없었고.

‘모조리 부순다.’

뜻이 서자 몸이 움직였다.

단전의 내공을 정해진 경락(經絡)으로 움직이며 높이 들고 있던 청패를 수직으로 내려쳤다.

패검벽산(覇劍劈山).

산도 능히 깨뜨리는데 이것이라고 다를까.

포환처럼 날아오는 마기를 장검이 잘게 쪼갰다.

콰콰콰쾅!

포환이 단단한 성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나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그 속에서 팽수빈의 두 눈이 또렷이 빛났다.

‘됐어, 이제 반격을…….’

섬랑이 더 빨랐다.

먼지를 불쑥 가르며 나타나 일체의 허식을 배제한 찌르기로 팽수빈의 목을 노렸다.

팽수빈은 재빨리 장검을 비스듬히 치켜올려 섬랑의 검을 쳐낸 뒤 손목을 뒤틀어 수평으로 베었다.

하지만 어느새 뒤로 물러난 섬랑은 다시 장력을 뿌렸고 팽수빈은 그것을 또 장검으로 갈라야 했다.

콰콰쾅!

팽수빈의 초승달 같은 눈썹이 치솟았다.

‘마인답게 교활하구나. 이번엔 내 차례…….’

이번에도 불가했다.

섬랑의 신형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암영보(暗影步)를 밟아 그녀의 뒤로 돌아간 것이다.

팽수빈은 즉시 몸을 돌리며 장검을 어지럽게 휘둘렀다.

그러자 검첨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줄줄이 흘러나와 물샐틈없는 막을 만들었다.

그 검막(劍幕) 곳곳에 섬랑이 내지른 검이 박혔다.

콰콰콰콱!

섬랑은 손목이 시큰해지는 걸 느끼고 내심 혀를 찼다.

무슨 놈의 검막이 나민이 만든 고기 요리처럼 이리도 질긴지, 전력을 다하진 않았지만 조그만 구멍조차 못 내고 있지 않은가?

‘그래 봤자지.’

정파인답게 너무 고지식했다.

‘나는 한 손이 남는다니까.’

오른손의 검으로 계속 검막을 찌르며 왼손을 슬쩍 떨쳐 유명음풍장(幽冥陰風掌)을 펼쳤다.

음산한 장력이 슬그머니 검막의 옆을 돌아 뒤에 숨어 있는 팽수빈에게 향했다.

섬랑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씩 웃었다.

팽수빈이 장력을 상대하느라 검막을 없애는 순간 단숨에 꿰어버릴 셈이었다.

유명음풍장이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퍼엉!

검을 내지르려고 준비하고 있던 섬랑은 눈을 크게 떴다.

검막이 그대로 있는 것 아닌가!

‘어떻게 된 거야?’

바로 알 수 있었다.

검막에 주먹만 한 구멍이 생기더니 딱 그만한 크기의 권풍(拳風)이 튀어나왔다.

‘장검을 한 손으로 휘두르고 있었구나!’

남는 손으로 유명음풍장을 막고 기습을 한 것이다.

독존에게 예전보다 융통성이 생겼다고 듣긴 했으나 이런 수까지 쓸 줄이야.

섬랑은 검으로 쳐내려다가 급히 신형을 움직였다.

검막이 수백 개의 검으로 변하더니 일제히 날아오고 있었다.

‘권풍에 산검(散劍)까지!’

뼈가 시릴 만큼 세찬 바람이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다음은 수백 개의 검 차례.

섬랑은 마라환영보(魔羅幻影步)를 어지럽게 펼쳐서 일일이 피하다가 실낱같은 틈을 간파하고 검을 찔러 넣었다.

쩌엉-

절멸의 검첨과 청패의 검면이 충돌하며 두 녀석 모두 몸을 크게 휘었다가 힘차게 폈다.

섬랑과 팽수빈이 서로를 밀어낸 것이다.

두 사람은 멀찍이 떨어져서 상대를 노려봤다.

“무기명제자치곤 제법이네. 방심하면 안 되겠어.”

섬랑의 칭찬 아닌 칭찬을 팽수빈이 받아쳤다.

“너도 의외다. 사부님께서 잠시나마 은혜를 베풀어주실 만하군.”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대인의 적전제자야.”

“천하의 어떤 적전제자가 사부를 대인이라고 부르지?”

“그래서 더 특별한 관계라니까. 이런 사제 관계를 본 적 있어?”

“그런 건 있을 수 없으니 못 봤다. 호흡은 다 골랐느냐?”

섬랑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하. 누가 할 소리를. 대인께서 좋아하시진 않을 것 같아 적당히 다치게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지금부턴 제대로 할 테니 조심해.”

팽수빈도 환하게 웃었다.

“나도 그러마. 최선을 다해 죽지 마라.”

두 사람은 살벌한 말로 서로를 인정했다.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해도 이런 적수를 또 어디에서 만날까?

오랫동안 참고 있던 갈증이 호적수와 조우하니 더 극심해졌다.

뒷감당은 나중에 생각할 일.

상대를 쓰러뜨려서 목이 타는 듯한 갈증부터 해소해야 했다.

섬랑은 그 전에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어라? 잠깐만 기다려.”

“눈을 다쳤느냐? 기대했는데 이렇게 싱겁게 끝나다니…….”

“아니, 네가 그렇게 웃으니까 갑자기 예뻐 보여서.”

섬랑은 팽수빈을 다시 뚫어져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망할. 이젠 웃지도 않는데 그렇게 보이네.”

팽수빈이 얼굴을 찡그렸다.

“반드시 죽여야겠군. 너를 잠시나마 인정한 게 후회된다.”

“사실인데 어쩌라고.”

“그따위 요설로 나를 흔들 셈이냐?”

“네가 이 정도로 흔들리겠냐?”

“그럼 그걸 핑계 삼아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하려고?”

“어차피 내가 이길 건데 무슨 상관이야. 게다가 그건 그거고 싸움은 싸움이지.”

짜악-

섬랑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강하게 갈긴 뒤 분노를 토했다.

“빌어먹을! 너무 세게 때려서 어금니가 흔들리잖아! 원수를 갚으마, 어서 덤벼!”

“네 그림자 속에 있는 자보고 피하라고 해라. 같이 죽이긴 싫다.”

“아영(啞影)이 이렇게 집중해서 숨어 있는 건 처음인데 잘도 알아보네. 얼굴만큼 눈썰미가 괜찮…… 아야! 오희성 넌 또 왜 그래?”

“이제는 내분이냐?”

“어쨌든 죽는 건 무기명제자 너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어쩔 수 없군. 나를 원망하지 말아라.”

“무게 잡기는. 오기나 하시죠!”

팽수빈은 사양하지 않았다.

섬랑도 기다리지 않았다.

두 사람과 두 개의 병기가 격돌했다.

콰아앙!

절멸과 청패는 이녕임가와 철혈장이 각자 심혈을 기울여 벼려낸 병기답게 백중지세를 이뤘다.

그렇다면 승부를 가르는 요소는 주인의 실력뿐.

검기가 허공을 난자하고 장력이 단상을 강타했다.

허공이야 수없이 베여도 멀쩡하나 목재로 이루어진 단상까지 그럴 리 있나.

금세 박살이 나 수많은 파편이 되어 튀어 오를 수밖에.

단상이 겪는 수난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검날에 수없이 베여 톱밥으로 변해 흩날리다가 무수하게 쏟아지는 장력과 권풍에 휘말려 깨끗이 사라졌다.

대연무장에 모인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고 있다가 시야가 트이자 탄성을 터뜨렸다.

“말도 안 돼!”

“소문보다 더하잖아!”

그동안 실력을 전부 드러내지 않았던 걸까?

팽수빈은 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검후(劍后)라 불려도 손색없을 신위를 선보였다.

“상대도 대단해!”

“교주도 아닌 소교주가 저렇게 강할 줄이야!”

섬랑은 전신을 흑염(黑焰)으로 불태우며 무시무시한 살기와 마기를 쏘아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대동소이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용호상박이로다!’

‘누가 이길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구나!’

정(正)과 마(魔).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일 수 없는 두 고수의 실력은 누가 봐도 막상막하였다.

하지만 당사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웃기지 마! 내가 더 강해!’

‘마인이어서 그런지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임기응변에 능하구나. 하지만 그뿐, 실력 자체는 내가 근소하게 위야!’

승부욕이 들끓어 올랐다.

정광이 인정한 독종들답게 몸을 사리지 않고 싸웠다.

자연히 싸우면 싸울수록 상처가 늘어나고 내상이 깊어졌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반드시 이길 거라 믿으며 투지를 불태웠다.

그리고 내공과 체력이 바닥나기 전에 같은 생각을 했다.

‘승부수를 던질 때야!’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두 사람의 기세가 변했다.

섬랑은 마혼이 폭주하여 잡아먹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마기를 폭발시켰다.

팽수빈은 주화입마에 빠지는 위험을 신경 쓰지 않고 정(精), 기(氣), 신(神)을 하나로 합쳤다.

불안정한 마왕(魔王)과 아직 모자란 선자(仙子)가 부딪쳐 공멸하려는 순간!

마왕의 그림자 속에 은신해 있던 오희성이 뛰쳐나와 선자가 내지른 장검을 몸으로 막으려 했다.

목숨을 바쳐 주인을 구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뜻을 이룰 순 없었다.

“그만.”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세상이 멈추고, 피처럼 붉은 검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오희성을 부드럽게 밀어낸 뒤 마왕의 손에 들린 절멸과 선자가 손에 쥔 청패를 조각조각 내버리는 걸 넘어 고운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파스스스-

실로 경천동지할 신위.

하지만 육신은 당연하고 마음마저 마혼에게 빼앗긴 마왕과 정기신의 무리한 합일로 입마(入魔)에 든 선자는 여전히 서로를 탐하려 했다.

그러자 붉디붉은 검에 이어 하늘에서 내려온 엄청난 미청년이 혀를 차며 양손을 뻗었다.

“의욕이 이렇게 과해서야 원.”

단순한 손짓이었건만, 마왕과 선자의 머리가 미청년의 양 손바닥에 철썩 달라붙었다.

“자, 자. 가만히 있어야 착하지. 내가 꺼내줄…… 어? 그래도 꽤 버티고 있네?”

미청년은 그들의 상태를 단숨에 파악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더 쉽지. 조금만 혼내도 되겠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위의 기류가 움직였다.

미청년이 자연지기를 부른 것이다.

그것은 그의 몸을 통해 마왕과 선자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삼단전(三丹田)은 물론이오, 기경팔맥(奇經八脈)과 십이경맥(十二經脈), 십이경별(十二經別)에다가 전신의 세맥까지 모든 것을 정화했다.

심지어 외상까지.

“예나 지금이나 손이 많이 가는 녀석들이라니까.”

미청년이 피식 웃는데 섬랑과 팽수빈이 눈을 떴다.

“……!”

섬랑의 벽안이 찢어질 것처럼 커지고 팽수빈의 영롱한 눈에선 수정 같은 눈물방울들이 떨어졌다.

그토록 만나길 바랐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대인!”

“사부님!”

미청년 정광은 두 사람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고 나무랐다.

“살벌하게 왜 그래. 애들은 애들답게 코피 정도 터뜨리는 선에서 끝내야지.”

지금의 팽수빈은 아이가 아니었으나 과거로 돌아가 사부를 껴안고 울먹였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호승심에 사로잡혀 실수했습니다. 그간 열심히 수련하며 사부님만 기다렸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 그럼 볼 한번 꼬집는 걸로 용서해 줄게.”

정광이 팽수빈을 혼내는 사이 섬랑은 자신의 우상을 훑어보며 황당해했다.

“뭐야 이거? 대인,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네가 늙은 거지. 혼 좀 나라.”

정광은 섬랑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콰앙!

“아악! 왜 이렇게 차별하세요!”

“너는 반성 안 했잖아.”

“그래도 눈곱만큼은 했…… 헉! 이, 이건 또 뭐야?”

섬랑은 정광의 옆에 둥둥 떠 있는 붉은 검을 그제야 발견하고 기겁했다.

“신검이 왜 여기에? 아! 이녕임가에 들르신 거예요?”

검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정광의 허리춤에 있는 검집에 들어갔다.

동시에 정광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응. 네가 강탈하려고 했다며?”

“억! 누,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모함을!”

“철혈화(鐵血花)가 그러던데.”

“아, 아하! 철모(鐵母)가 오늘내일하더니 노망이 들었나 보네요. 저는 정중히 청했어요. 대인께 진상할 거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손 뗐고요.”

“바로?”

“왜, 왠지 모를 아쉬움 때문에 말다툼을 조금 했죠. 아, 아니. 손 다툼도 살짝…… 하아. 그냥 때리세요.”

섬랑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자 슬그머니 떴다.

정광이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안 때리실 거예요?”

“철혈화한테 고맙다고 해. 패기가 과한 감은 있지만 선은 지켰으니 용서해달라고 했거든.”

“후와아아아. 소환단(小還丹) 필요 없으시죠? 그걸 선물해야겠네.”

“귀천했으니까 그럴 필요 없어.”

“네? 그냥 보내셨어요? 살리실 수 있으면서 왜?”

“검이 마음에 들어서 이름을 철환(鐵煥)이라고 지으니 웃더라.”

“부군의 이름을 그대로 검에 붙이니 기가 찰 수밖에…… 아니, 무한한 영광으로 여겼겠네요.”

섬랑이 재빨리 말을 바꾸자 정광은 들어 올리던 손을 내렸다.

“응. 마지막 숙원을 이뤘다더군. 이제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데 어쩔 수 있나. 편히 갈 수 있게 도와줬지.”

섬랑은 북서쪽 하늘을 멍하니 보다가 투덜거렸다.

“알콩달콩 잘 살겠네요. 짝도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뭐 그건 그거고, 이십 년이 넘게 어디에서 뭘 하신 거예요?”

“말하자니 너무 긴데. 자오, 대신 설명해 주세요.”

허공에 사람의 형상이 맺히는가 싶더니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자오로 변했다.

“네, 단주. 맡겨주십시오.”

“억! 자, 자오 아저씨! 자, 잠시만요! 잠깐만요!”

“음? 왜 그러느냐? 설마 청해놓고 듣기 싫은 것이냐?”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하지만 섬랑은 정말 오랜만에 만난 은인 중 한 명에게 매몰차게 굴지 못했다.

“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말씀하시면 좀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어라?”

섬랑은 그제야 이상한 점을 느꼈다.

‘대인께서 귀환하셨는데 왜 이렇게 조용해?’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다들 입을 떡 벌린 상태로 굳어 있었다.

‘하긴, 놀랄 만도 하지. 가만, 아무리 놀라도 그렇지.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게 말이 돼?’

섬랑은 어이가 없어 정광을 돌아봤다.

정광은 팽수빈의 양어깨를 잡고 슬쩍 들어 무게를 가늠한 뒤 칭찬하고 있었다.

“키도 크고 무게도 제법 늘었네. 내공도 상당히 쌓았고. 잘했어.”

“감사합니다, 사부님!”

“저기요, 대인.”

“응? 너도 봐줄까?”

“그건 나중에 해도 되고요. 저 사람들, 왜 저렇게 있는 거죠?”

“아. 왜 가만히 있냐고?”

정광이 싱긋 웃으며 설명했다.

“구주(歐洲:유럽)에서 익힌 건데. 마법(魔法)이라는 걸로 조용히 있으시게 했어.”

“마, 마법요? 사술인가요?”

“아니. 자연지기를 사용해서 이런저런 일을 하는 기술이야. 불도 피우고 얼음도 만들고. 꽤 쓸 만하지.”

“미친. 별것이 다 있네. 세상이 넓긴 한가 봐요.”

“아주 넓지. 아주(阿洲:아프리카)라는 곳에는 저주를 내리는 술법도 있고. 돌아다니다 보면 재밌는 게 많아.”

“우와. 가고 싶어지네요.”

“그래? 그럼 조선에 놀러갈 건데 같이 갈래?”

섬랑의 몽롱해졌던 눈에 정기가 돌아왔다.

“가, 같이요?”

“아, 역시 안 되나. 곤륜산에 들렀다가 네 얘기를 듣고 네가 움직이는 경로로 쭉 따라왔는데 무척 바쁘다며? 황상도 네가 하루만 머물고 갔다고 하시더라. 며칠 놀다 오려다가 네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뻔해서 황상만 치료해 주고 그냥 왔어. 바로 신강으로 떠날 거지?”

섬랑은 얼음처럼 굳어 있는 연규서와 단성오를 의기양양하게 바라보다가 엄숙히 선언했다.

“대인께서 명하셨는데 제가 어찌 감히 거절을! 신명을 바쳐 따르겠습니다!”

“꼭 그럴 필요는 없는데. 수빈이 너는?”

팽수빈이 빠질 리 있나.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 군중과 큰 오라비인 무림맹주 팽강웅에게 포권한 뒤 환하게 웃었다.

“당연히 제자 된 도리를 다해야지요. 사부님을 모시겠습니다.”

“기특한 녀석. 내가 제자 농사는 잘 지었다니까.”

정광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운룡(雲龍)을 검집째로 풀어 팽수빈의 손에 쥐여줬다.

“가져, 선물이야.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것으로 구해줄게.”

“……!”

마음에 안 들 리가!

사부가 수많은 신화를 쓰는 데 사용한 신물 아닌가!

팽수빈은 감격에 겨워 아무 말도 못 했고 섬랑은 서운함을 못 이겨 눈시울을 붉혔다.

“망할…… 나만 버린 자식 취급하시고…….”

정광은 관대했다.

“꽁하기는. 네 것도 있어, 인마.”

자오가 등에 메고 있던 화려한 장검을 섬랑에게 건넸다.

“단주께서 구주제일인(歐洲第一人)으로 꼽히는 자를 때려눕히시고 네게 선물하기 위해 양도받은 구주제일신검이다. 피를 많이 먹은 마검이야.”

“……!”

“사람도 검도 궁금하지? 간략하게나마 설명해 주마. 그곳 말은 생소한 발음이 많으니 집중해서 들어야 해. 그자의 이름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섬랑은 자오의 수다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장검을 어루만졌다.

구주에서 제일가는 신검이자 마검이라더니 과연!

그 속에 깃든 마기가 얼마나 강한지, 기분이 상쾌해질 정도 아닌가!

‘가만. 이럴 리가 없는데?’

섬랑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지, 진짜 공짜로 주시는 거예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그만큼 부려먹으려고.”

정광은 섬랑과 팽수빈을 번갈아 보며 씩 웃었다.

“좋아, 그럼 슬슬 가볼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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