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9화
운도 좋지
무혈단(無血團)은 단상 위에 올라 질서정연하게 늘어섰다.
무림맹주 팽강웅의 짧지만 강렬한 축사에 이어 여러 명숙들의 지루한 덕담이 계속되자 대연무장에 모인 이들은 한숨을 쉬었다.
허나 시간이 흘러 마지막 절차만 남게 되니 사람들의 눈빛이 변했다.
진옥룡 이후 천하에서 제일가는 천재라고 불리는 패검진협(覇劍眞俠)을 주시하며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렸다.
그녀는 그들에게 정중히 포권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무혈단주라는 중책을 맡게 된 팽수빈이 강호제현(江湖諸賢)께 인사드립니다.”
“와아아아!”
사람들이 참고 있던 환호성을 터뜨렸다.
패검 한 자루에 참된 의기를 담고 수많은 악인들을 처단해 온 협객에게 바치는 찬사였다.
팽수빈은 우아하게 감사를 표하고 말을 이었다.
“맹주께서 제게 무혈단을 재창설할 것이니 단주가 되라고 하셨을 때 상반된 감정을 느꼈습니다. 사부님의 뒤를 잇게 됐다는 기쁨과 사부님의 찬란한 명성을 더럽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제 사부님께서는 천하제일인이자 천하제일협객 아니십니까?”
“…….”
다들 전자는 맞지만 후자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제자가 제 사부를 저렇게 끔찍이 존경하는데 굳이 초를 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괜히 그랬다가 뒷감당을 할 자신도 없었고.
“원래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 사양하려 했습니다만. 과거 사부님께서 무혈단을 창설하실 때, 홀로 남게 되실 모친을 걱정하여 눈이 붉어진 와룡당 부당주께 하신 조언을 상기하니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부당주님, 정파인이라면 모두 아는 얘기지만 직접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단상 밑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장이가 당당히 외쳤다.
“부끄러워하지 말라! 눈물을 흘리는 건 괜찮다! 대신 피를 흘리지는 말아라! 그게 제일 부끄러운 것이다!”
“그렇습니다, 사부님께선 그렇게 말씀하신 뒤 조직의 이름도 무혈단이라 지으셨지요. 걱정도 두려움도 창피한 게 아닙니다. 정말 창피한 건 그런 마음에 매몰되어 헛되이 쓰러지는 것입니다.”
팽수빈은 추억에 잠긴 사람들을 둘러보며 힘주어 선언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사부님의 뜻을 금과옥조로 삼고 무혈단을 이끌겠다고. 먼저 정마대전이 벌어졌던 곤륜산으로 가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되새길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누구도 다치거나 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파인들이 이런 연설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리 있나.
가슴속에서 끓어오른 의기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무림맹을 뒤흔들었다.
“우와아아아아!”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
팽수빈은 계속 방향을 바꿔가며 포권했다.
섬랑은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감탄했다.
“대단하네.”
개방 방주 양회가 아직도 기분이 안 풀렸는지 코웃음 쳤다.
“흥. 그래도 안목은 있구나.”
“뭔가 잘못 이해하신 것 같네요.”
“무어라?”
양회 옆에 조용히 있던 노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무엇이 대단하단 얘기냐?”
“실례지만 누구시죠?”
“당영중이다.”
“아. 새로운 독존이셨군요. 듣던 대로 얼굴이 나무토막 같으세요.”
“너도 대답해라.”
“역시 성품도 그러시네. 별것 아니지만 말씀드리죠.”
섬랑이 눈살을 찌푸리며 설명했다.
“별호에 ‘진협(眞俠)’이 들어가길래 광명정대한 위인인 줄 알았는데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니 어이가 없어서요. 대인에 대한 소식을 알아보려고 청해성으로 가는 게 뻔한데 대의로 포장하잖아요.”
당영중이 고개를 저었다.
“비꼬는 것이었군. 진옥룡과 상당히 닮았다더니 헛소문이었어.”
“무슨 말씀이죠?”
“진옥룡이 여기 있었으면 융통성이 생겼다고 감탄했을 거다.”
“아니, 제 말은…….”
“너는 마인 중의 마인 아니냐? 고지식한 무인이라 여겼는데 까다롭게 됐다고 생각해야 정상이거늘 깎아내리기만 하다니. 마음이 너무 좁아. 아니, 여유가 없는 건가?”
섬랑은 발끈해서 반박하려다가 이를 지그시 물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틀린 말이 아니어서였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당영중이 칭찬했다.
“참는 걸 보니 너도 인물이구나. 마음이 좁은 게 아니라 여유가 없었던 것이야.”
“완전한 칭찬이 아니니 반만 감사할게요.”
“뒤끝도 있군. 무인으로서 꼭 나쁜 건 아니지. 근골도 훌륭해 보이고. 진옥룡이 거둘 만해.”
당영중의 건조한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하나만 더 물으마. 지금 네 마음에 여유가 없는 건 적진 한가운데에 뛰어들어서냐, 무혈단주를 이길 자신이 없어서냐?”
섬랑이 눈을 크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잘 맞추시더니 훅 미끄러지시네. 둘 다 아닌데요.”
“둘 다?”
섬랑은 아직도 사람들에게 예를 표하고 있는 팽수빈의 뒤통수를 보며 두 손을 매만졌다.
“빨리 싸우고 싶은데 계속 저러고 있잖아요. 이러다 날 새겠네. 적당히 좀 할 것이지 뭐 하는 짓인지 원.”
“…….”
당영중의 나무토막 같은 얼굴에 미세한 균열들이 생겼다.
섬랑의 예상치 못한 언행에 인상을 찡그린 것이다.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라 진심이구나.’
이 발칙한 마인은 정말로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개방 방주 양회도 그걸 느꼈는지 당영중에게 전음을 보냈다.
-마교의 종자가 싸움을 거는데 마냥 피할 순 없고. 맹주와 군사는 물론이오, 우리 모두 수빈이가 쉽게 이길 거라 믿어서 맹에 들였는데 이놈도 이렇게 자신 있어 하니 황당하군.
-무혈단주가 질 리 없소.
-아무렴, 그렇고말고. 제깟 놈이 강해 봤자지. 수빈이에겐 안 돼.
정파무림의 명숙들은 팽수빈을 철석같이 믿었다.
당연히 당영중도 그랬지만 조금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말이오. 이놈을 제압하려면 무혈단주가 손을 과하게 써야 할지도 모르겠소.
-허어. 이 소마두를 그렇게 높게 보는가?
-느낌이 좀 이상하오.
-빌어먹을. 나까지 불안해지잖나. 소교주씩이나 되는 놈에게 중상을 입히면 마교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이미 논의하지 않았소? 군사가 적절한 해결책도 마련했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잦아들고 있으니 지켜봅시다.
아니나 다를까.
장내가 조용해지자 무림맹 군사 제갈린이 입을 열었다.
“이것으로 무혈단 출정식을 끝내겠습니다. 무혈단은 내일 아침에 청해성으로 출발할 예정이니 단원들에게 용무가 있으신 분은 오늘 중에 마치십시오. 그리고!”
제갈린의 음성이 커졌다.
“지금부터 천마신교의 소교주께서 본맹을 방문하신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소교주, 무슨 용무로 본맹을 찾으신 겁니까?”
“다 아시면서.”
섬랑이 씩 웃으며 대꾸하자 정파인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본맹을 치러 온 것이냐? 얼마든지 상대해 주지!”
“아직 늦지 않았다! 이십 년 전 곤륜산에서 잠든 영령들에게 정중히 사과하면 몸 성히 보내주마!”
섬랑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일어나 팽수빈에게 손짓했다.
“패검진협, 진협은 관심 없고 패검이 궁금해서 왔거든. 한번 붙자.”
“……!”
마인이 무림맹 한복판에서 저딴 말을 지껄일 줄이야!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경악했으나 팽수빈은 태연했다.
“죽을 자리를 찾아온 것이오?”
“설마. 죽여주려고 왔지.”
“그대가 원한을 품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는데 무슨 일로 그러오?”
“나도 원한 같은 건 없어. 제대로 겨루려면 생사결을 해야 하니 어쩔 수 있나.”
“그대를 이기려면 중상을 입혀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소?”
“얼마든지. 말로만 떠들지 말고 검으로 보여주면 안 될까?”
섬랑이 도발하는데 제갈린이 끼어들었다.
“정마대전을 겪은 지 이십 년밖에 안 됐는데 또 피를 흘릴 순 없소.”
“정당한 대결이잖아요. 보복 안 하시면 되죠.”
“그 반대요. 소교주가 크게 다치면 귀교에서 가만히 있겠소? 그냥 돌아가시오.”
“농 좀 하시네요. 뭘 원하시죠?”
제갈린은 지체 없이 답했다.
“소교주가 원해서 싸우는 것이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서로 묻지 않겠다고 문서로 남기시오.”
“난 또 뭐라고. 특기 중 하나이니 지필묵이나 주세요.”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내가 작성하겠소.”
섬랑이 투덜거리든 말든 제갈린은 단숨에 똑같은 문서를 두 장 만들어 내밀었다.
“수결(手決)을 두시오. 지장(指章)도 찍으시고.”
팽수빈이 먼저 자신의 이름을 쓰고 지장도 찍었다.
섬랑은 팽수빈의 유려한 필체를 한참 노려보다가 공을 들여 붓을 움직인 뒤 혀를 찼다.
“망할. 잠을 잘못 자서 팔이 뻐근하더라니. 글씨가 엉망이네.”
팽수빈이 섬랑의 삐뚤빼뚤한 필체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사부님을 무척 존경한다고 듣긴 했는데 필체까지 따라 하는 건 심하지 않소?”
“따라 하긴 무슨! 원래 이런데 어쩌라고!”
섬랑은 문서에 지장을 찍고 제갈린에게 건넸다.
“됐죠?”
“확인했소.”
제갈린이 한 장을 되돌려 주자 섬랑은 그걸 바로 연규서에게 던졌다.
얇디얇은 종이가 쏜살같이 날아가더니 연규서의 코앞에 이르자 갑자기 힘을 잃고 바람에 나풀거렸다.
“받지 않고 뭐 해? 그게 없으면 나중에 귀찮아질지도 몰라.”
연규서가 종이를 잡아 품속에 넣으며 무겁게 대답했다.
“아주 잘 챙겼으니 안심하고 즐기십시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거든.”
단상 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내려가고 섬랑과 팽수빈만 남았다.
팽수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 떠나시기 전, 마교에 꽤 괜찮은 녀석이 있으니 또래에 적수가 없다고 방심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드디어 만났구나.”
“갑자기 말을 놓네. 그것도 나쁘진 않지.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언젠가 반드시 너의 목을 베어 벌하겠다고 맹세했다.”
“장하다. 꿈 한번 거창하네.”
“그리고 열심히 수련하며 사부님을 기다리겠다고 말씀드렸지. 사부님께서는 꼭 들러서 확인해 주겠다고 약조하셨다.”
팽수빈은 품속에서 작고 투명한 장갑을 꺼내 양손에 끼었다.
“하지만 마음이 조급해져 선열들의 넋도 위로할 겸 청해성으로 가 사부님의 행방을 수소문하려고 했는데 운도 좋지. 너를 쓰러뜨릴 수 있게 되었어. 사부님께서도 곧 돌아오실 거야.”
“네가 나를? 꿈 깨라니까. 그건 그렇고, 그게 천잠사(天蠶絲)로 만든 수빈수갑(秀彬手甲)이야?”
“잘 아는구나. 소용이 없어진 지 오래지만 사부님의 선물이라 손에 끼면 따뜻한 기분이 들어.”
“장갑을 끼면 당연히 따뜻해지지, 잘난 척하기는. 나도 소환단(小還丹) 받았거든. 보여줄까?”
팽수빈은 말없이 허리춤에 찬 병기를 잡았다.
시퍼런 검신이 서늘한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팽수빈은 유난하게 긴 검파(劍把)를 두 손으로 쥐고 소개했다.
“나의 벗, 청패(淸覇)다.”
“외톨이구나. 그런 걸 친구로 삼고.”
섬랑도 신삼신기(新三神器) 중 수위를 차지하는 검을 뽑았다.
“절멸(絶滅)이야. 이름대로 널 완전히 없애줄게.”
팽수빈이 뭐라고 대꾸하려 했으나 섬랑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와!’
중단전 옥당(玉堂)에 웅크리고 있던 마혼이 뛰쳐나와 하단전 석문(石門)을 향해 달리더니 단전에 쌓인 막대한 내공을 입에 물고 경락(經絡)을 질주했다.
마혼의 몸집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어느새 벽안이 새카맣게 변한 섬랑은 전신에서 검은 불길을 쏟아내어 거대한 악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악귀의 힘까지 오롯이 절멸에 담아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쳤다.
팽가에서 깨달음을 얻고 한결 자연스러워진 혈천마검(血天魔劍) 제일초 혈성화(血星火)!
섬랑과 악귀가 합심하여 떨어뜨린 붉은 유성이 팽수빈의 머리를 부수려고 했다.
팽수빈의 두 눈이 붉은 유성으로 가득 찼다.
‘예상을 뛰어넘는구나!’
섬랑의 진정한 실력을 접하고 놀랐지만 당황하진 않았다.
팽수빈은 사부가 명념반추대법(銘念反芻大法)으로 새겨준 뒤 그녀 스스로 부단히 수련해 온 검법을 펼쳤다.
건곤패검(乾坤覇劍) 제육초 패도단천(覇道斷天)!
그녀의 손에 들린 청패가 승천하여 붉은 유성과 부딪혔다.
콰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