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7화
과찬
철월이 섬랑의 천령개를 대월(大鉞)로 내려찍으려는 순간, 멀리서 한 노파가 외쳤다.
“도끼를 놓으세요! 사람을 죽이면 안 됩니다!”
철월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돌아가라! 이놈이 아니라 철월이 죽을 판이다!”
“그러면 더 안 되지요! 가만히 있으세요!”
노파가 눈을 크게 뜨더니 다급히 뛰어왔다.
하지만 내공 한 톨 없는 노인이 뛰어봐야 얼마나 빠를까.
대월을 수십 번 넘게 휘두르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나 철월은 꾹 참고 기다리다가 노파가 도착하자 투덜거렸다.
“선제공격해야 승산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는데 철월은 가만히 기다렸다.”
“참 잘하셨습니다.”
철월의 어깨가 올라갔다.
“맞다. 그런데 그 전에 분명히 돌아가라고 했다. 이제 누이도 철월과 함께 죽는다.”
“저, 저희가 왜 죽습니까? 제가 잘 말해보겠습니다.”
“이놈은 보통 애송이가 아니다. 그래봐야 소용 없…….”
“점심을 굶고 싶으십니까!”
철월이 목을 움츠리며 입을 꼭 다물었다.
노파는 떨리는 손으로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섬랑에게 조심스레 사과했다.
“공자, 어떤 연유로 다투게 되셨는지는 모르지만 보나 마나 철월 때문이겠지요. 철월은 머리를 숙이는 걸 모르는 사람이라 제가 대신 사과드릴 테니 해치지 말아주십시오.”
섬랑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철월은 혈혈단신인 걸로 아는데 누이가 계셨어요?”
노파가 대답하기 전에 당사자가 직접 설명했다.
“철월은 남양장가(南陽張家)의 빈객(賓客)이다. 그러니 장가의 큰 어른은 철월의 누이가 된다.”
“나, 남양장가라니요.”
노파가 얼굴을 붉히며 두 손을 내저었다.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저희 집은 그렇게 거창하게 불릴 만한 집안이 아닙니다.”
“누이, 남양에 있고 장씨 성을 쓰니 남양장가다. 철월의 생각엔 절대 거창하지 않다.”
섬랑도 동의했다.
“아하. 누구신가 했더니 장이 대협의 모친이셨구나. 철월이 식객으로 얹혀사는 가문이면 남양을 대표하는 명문가가 되기 충분하죠.”
철월은 목을 뻣뻣이 세우고 노파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섬랑은 빙그레 웃으며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근데 어르신, 반점이 한산하네요. 들었던 것과 다른데 어떻게 된 거예요?”
“어, 어르신이라니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양하지 마세요. 대인께서 신세 많이 졌다고 들었는데 다른 호칭을 쓸 순 없잖아요.”
“대인이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조심스레 묻던 노파는 섬랑의 이어지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서 진옥룡이라고 불리시는 분이죠.”
“아! 은공 말씀이군요. 실례지만 그분과 어떤 관계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섬랑의 허리가 꼿꼿이 서고 가슴은 활짝 열렸다.
“사제지간(師弟之間)요.”
“네? 은공의 제자는 패검진협(覇劍眞俠)이신데…….”
섬랑이 인상을 썼다.
“그쪽은 옷깃만 스친 인연과 다름없는 한낱 무기명제자(無記名弟子)고요, 저는 적통을 이은 적전제자(嫡傳弟子)예요. 제가 진짜라는 얘기죠.”
“……!”
“왜요? 안 믿기세요?”
“…….”
그걸 말이라고.
노파는 황당해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세상에 은공의 제자를 사칭할 만큼 간이 큰 사람은 없어.’
답은 하나였다.
‘그래, 미친 사람이구나.’
생긴 건 멀쩡해 보이나 머릿속은 모르는 것 아닌가?
복색이나 호위 무인들의 수를 보면 부잣집 자제인 게 분명하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마음속에서 동정심이 일어나 두려움을 밀어냈다.
“그러셨군요. 공자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째 안 믿으시는 것 같네요.”
“그럴 리가요.”
노파는 섬랑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다가 반점을 가리켰다.
“아직 식사를 안 하셨으면 들어가시지요. 제가 한번 솜씨를 부려보겠습니다.”
철월이 바로 반대했다.
“저 녀석들에게 줄 밥은 없다.”
“오늘은 많이 만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누이는 늙어서 그럴 힘이 없다. 몇 년 전부터 철월과 자장이가 먹을 밥밖에 못 만든다.”
섬랑은 그제야 철월이 막아섰던 이유를 알아냈다.
“기력이 떨어져서 장사를 안 하시는 거였네요. 어떡하지?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노파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할 수 있습니다. 재료를 사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야 좋지만 그 많은 양을 혼자서요? 장 보는 거 도와드릴게요. 가시죠. 아, 어서요.”
노파는 얼결에 승낙하고 섬랑 일행과 식재료를 샀다.
그리고 반점으로 돌아와 주방에 들어갔다.
섬랑은 탁자 앞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 둘 다 뭐 해? 가서 도와드리지 않고.”
연규서가 환하게 웃으며 거절했다.
“싫습니다. 차라리 저 거지를 시키십시오.”
“미쳤구나. 거지가 만든 밥을 먹고 싶냐?”
“제 손이 닿은 것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만. 독이 향료인 줄 알고 뿌릴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십니까?”
단성오도 두 눈을 부릅뜨며 으르렁거렸다.
“제 임무는 소교주를 호위하는 것이지, 요리 따위를 만드는 게 아닙니다.”
“까탈스럽기는. 그럼 애들이라도 보내.”
단성오가 발끈했다.
“묵영대가 숙수로 보이십니까?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어디 가려고 일어나십니까?”
“흙 가지러.”
“흙이 들어가도 안 됩니다!”
“밥 안 먹을 거야? 무림맹에 가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배를 든든히 채워야지.”
“…….”
틀린 말이 아니니 어쩔 수 있나.
단성오는 섬랑을 노려보다가 우소묵과 구자영에게 노파를 도우라고 명했다.
두 사람도 불쾌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거절하면 당장 죽일 것처럼 살벌하게 명하니 따를 수밖에.
묵영대원들을 이끌고 주방에 들어가 보니 노파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우소묵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파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뭘 하면 되오?”
“헉! 아,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됩니다. 나가서 쉬십시오.”
“뭘 하면 되냐고 물었소.”
“그, 그럼 이 솥에 들어있는 오미죽(五味粥)이 타지 않게 저어주시겠습니까?”
우소묵은 대답 없이 나무 주걱으로 죽을 휘젓다가 부리부리한 눈을 찡그렸다.
“망할. 어릴 때는 안 그랬는데 눈이 이 모양이니 연기가 따갑군.”
노파는 그제야 우소묵의 툭 튀어나온 눈을 제대로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어쩌다 그렇게 되셨습니까?”
“관자놀이를 강하게 맞아 그렇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다른 녀석들에게도 해야 할 일을 알려…….”
우소묵은 노파를 돌아보다가 말끝을 흐렸다.
분근착골(分筋錯骨)을 당하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는 것 아닌가?
“얼마나, 정말 얼마나 아프셨을까.”
“……아프긴 했지만 죽진 않았으니 됐소.”
“맞습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지요.”
노파가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양친께서도 천만다행이라고 무척 기뻐하셨겠습니다.”
“……쓸모없는 놈이라고 내쫓으셨소만.”
“흐윽.”
노파가 간신히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아냈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훌쩍. 죄송합니다. 오미죽은 타도 괜찮으니 저 돼지고기를 얇게 두드려 펴주십시오. 아, 아니지. 혹시 이쪽에도 안 좋은 기억이 있으십니까?”
우소묵은 당황해서 얼떨결에 대답했다.
“패는 건 내 전문이오.”
“역시 단단한 체격만큼 믿음직스러우시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
자고로 칭찬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
콰콰콰콰콰-
우소묵이 등에 메고 있던 거대한 철퇴로 탁자는 부수지 않고 돼지고기만 종이처럼 얇게 두드려 펴는 신위를 보였다.
구자영은 하도 어이가 없어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숨을 쉬고 노파를 불렀다.
“저기요, 저는 뭘 하면 될까요?”
“……!”
“왜 눈을 휘둥그레 뜨시죠?”
“죄, 죄송합니다. 피부도 체형도 여인처럼 곱디고우셔서 그만…… 에구머니!”
노파는 실언을 한 걸 깨닫고 대경실색했다.
정파무림인도 참지 못할 여인 같다는 말을 이런 요사한 자에게 해버리다니!
하지만 구자영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큼지막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수줍게 웃었다.
“호호호. 정말 그래 보이나요?”
노파는 구자영이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 그렇습니다.”
“기뻐라. 원행 중에도 신경 써서 관리한 보람이 있네요. 요리는 자신 있으니 뭐든 말씀만 하세요.”
“그럼 이 소채를 가늘게 썰어주십시오.”
“이쯤이야. 써는 건 제 장기 중의 장기랍니다.”
파파파파팟-
구자영은 날이 시퍼런 도를 뽑아 눈부신 속도로 소채를 썰었다.
노파는 넋이 나간 얼굴로 보다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일정한 폭으로 자르시다니, 여인보다 훨씬 섬세하십니다.”
“어머, 부끄럽게 왜 자꾸 그러세요. 또 자를 게 있나요? 사람이든 뭐든 말씀만 하세요.”
“노, 농이 심하십니다.”
“아닌데. 우훗. 놀고 있는 애들한테도 어서 시키세요. 그래야 빨리 끝나죠.”
“아, 알겠습니다. 그럼…….”
노파는 묵영대원들에게 일을 나눠줬고 주방은 얼마 안 가 일사불란하게 돌아갔다.
섬랑 맞은 편에 앉은 이관휘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무공도 모르는 노인이 마인들을 저렇게 쉽게 다룰 줄이야.”
“우리 애들이 순박해서 그런 것도 있지.”
“부정하진 않겠네. 저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어. 천마신교도 사람 사는 곳이었군.”
“그걸 말이라고. 악귀들이 득실거리는 지옥인 줄 알았냐?”
이관휘의 얼굴이 굳었다.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나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는 않았네. 정마대전을 겪은 이들은 나보다 감정이 더 안 좋을 테고, 그때 가족이나 친지를 잃은 자들은…… 그러고 보니 나도 마찬가지군. 말을 안 하는 게 낫겠어.”
“응, 할 필요 없어.”
“대신 다른 말은 해야겠네.”
이관휘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무림맹에는 그런 사람들이 천지야. 꼭 가야겠나?”
“당연하지. 그러려고 왔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나. 지금 무림맹에는 정파무림의 명숙들이 모여 있어.”
섬랑이 손뼉을 치며 물었다.
“맞다, 행사가 있다고 했지? 무슨 행사야?”
“빨리도 묻는군. 무혈단(無血團)의 재창설과 출정식일세.”
“어? 진짜? 그럼 천룡단과 지룡단도 다시 만들겠네.”
“그건 아닐세. 과거 진옥룡께서 정사대전에 이어 정마대전까지 종식시키셔서 그 조직들은 소용이 없어졌어.”
섬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무혈단도 마찬가지잖아.”
“전혀 다르지.”
이관휘의 눈이 빛났다.
“무혈단은 진옥룡께서 만드신 조직 아닌가? 그분의 업적을 기리고 그분 같은 영웅이 또 나오기를 바라며 재창설하는 걸세.”
“여기 있는데 왜 멀리서 찾아?”
“……못 들은 걸로 하지. 어쨌든 무혈단은 출정식이 끝나는 대로 청해성으로 갈 걸세.”
“대인의 고향 탐방인가?”
“……정마대전이 벌어졌던 곤륜산에 올라 한동안 머물며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되새기고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네.”
“오오. 그거 괜찮네. 본교도 해야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
“곤륜파는 너처럼 속이 좁지 않아. 양해해 줄 거야.”
“곤륜이 아니라 부처여도 안 해줄 걸세!”
“그럼 됐고. 죽은 사람을 위로해서 뭐 해. 쓸데없는 짓이지. 누구 머리에서 그런 멍청한 생각이 나온 거야?”
이관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입을 열었다.
“무혈단주네.”
“그게 누군데?”
“자네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 패검진협.”
“하. 시간이 남아도는구나.”
“그걸 조건으로 내세우며 수락하지 않으면 단주 직을 맡지 않겠다 했네.”
“가만. 그걸 조건으로 했다고?”
이관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서역과 가까운 청해성으로 가 자신의 사부에 대한 소식을 알아보려고 그러는 것일 걸세.”
“무기명제자가 무리하네.”
섬랑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먼 곳에 굳이 힘써가며 갈 필요 있나. 내가 포기하게 만들어줘야겠어.”
이관휘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부탁했다.
“정 무림맹에 가야겠으면 괜한 오해를 사지 않게 통보부터 하세나. 안내해 줄 만한 사람을 데려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게.”
“팽가에서 전서구로 알렸을 텐데 뭐 하러.”
“남에게 듣는 것과 당사자가 알리는 게 같나?”
“그럴 필요 없겠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무림맹에서 사람들이 나온 것 같아.”
잠시 뒤.
다른 탁자 앞에 앉아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으며 침을 흘리고 있던 철월이 벌떡 일어섰다.
“늦었다!”
반점 문이 열리고 머리털이 수북한 중년인이 들어와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늦었으니 이해해 주십시오.”
“철월은 마음이 넓어 이해한다.”
“감사합니다.”
중년인은 섬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귀하가 천마신교 소교주시오?”
“그런데요. 누구시죠?”
중년인이 정중히 포권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맹의 경비를 담당하는 와룡당(臥龍堂)의 부당주 장이라 하오. 소교주를 안내하기 위해 당원들과 함께 나왔소.”
“아! 장 대협이셨군요. 반가워요. 모친께선 안전하니 안심하세요.”
장이는 주방을 흘깃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철월이 평소와 다름없으시니 그럴 거라 생각했소. 무엇보다 은공의 체면이 있는데 귀하가 무도한 짓을 할 리 없지 않소?”
“무척 침착하시네요. 대인께서 보시면 흐뭇해하시겠어요.”
“과찬이오.”
장이가 한 자, 한 자 끊어 말했다.
“솔직히 마인들이 어머님과 함께 있으니 불안해 죽겠소. 어서 나갑시다.”
“그건 곤란하죠.”
섬랑이 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밥이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함께 드시죠. 우리 애들도 한몫했으니 성의를 무시하지 말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