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5화
어린 새
천하에서 제일가는 부(富)와 권력을 가지고 세상을 호령하는 자의 집은 어떨까?
당연히 천하제일일 수밖에.
섬랑은 자금성(紫禁城)을 구경하며 그 위용에 감탄했고 궁중요리를 먹을 땐 생전 처음 경험하는 훌륭한 맛에 감동했다.
황제는 자신의 침궁인 건청궁(乾淸宮)에서 벗의 후인을 지켜보다가 탄복했다.
“아주 잘 먹는구나.”
“맛있어서요. 자오 아저씨가 과장하신 줄 알았는데 그 이상이네요.”
“진옥룡에게 천하의 소요를 가라앉히는 대로 상선감(尙膳監)을 확충하여 훨씬 더 훌륭한 요리와 명주를 준비해 두겠다고 약조했었지. 그것을 지켜서 그런 것이다.”
섬랑은 젓가락과 입을 쉼 없이 움직이면서도 또박또박 말하는 절기를 발휘했다.
“역시 황상답게 신의가 두터우시네요. 만세만세만만세!”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천천히 먹어라.”
“산해진미가 산처럼 쌓여있고 명주는 호수만큼 그득한데 어떻게요? 이걸 참으면 사람이 아니죠.”
“그럼 네 일행은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냐?”
섬랑은 계속 먹고 마시며 주위를 둘러봤다.
‘흐음.’
백승무야 예의를 지키느라 절제하는 것일 테고.
연규서와 단성오는 담이 너무 작았다. 황제씩이나 되는 이가 독을 쓸 리 없거늘 저렇게 깨작거리다니.
섬랑은 속으로 혀를 차고 마지막 사람에게 시선을 옮겼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소협, 너는 왜 그래?”
“…….”
잔뜩 굳은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던 이관휘가 신경 쓰지 말라고 눈짓했다.
하지만 섬랑이 그럴 리 있나.
술을 호쾌하게 들이켜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나를 따라다니며 한동안 잘 먹더니 배가 불렀구나. 거지면 거지답게 굴어야지, 황궁이라고 점잔을 빼는 게 말이 돼?”
“……!”
이관휘는 이를 지그시 물었다.
‘그래, 나는 거지다.’
반강제로 된 것이지만 아비 앞이라고 부끄러워할 이유가 있는가?
누덕누덕 기웠으나 먼지 한 톨 안 묻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요리를 퍼먹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야 결룡(潔龍)이지.”
섬랑이 칭찬 같지도 않은 칭찬을 하자 황제가 피식 웃었다.
“거지치곤 무척 깨끗하다더니 사실이구나.”
“어? 황상께서 이런 무명소졸(無名小卒)도 아세요?”
“평이 박하군. 정파무림에서 가장 촉망받는 후기지수들 중 한 명 아니냐?”
“무림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무척 바쁘실 텐데 이런 어린애들까지 챙기시고.”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네 말대로 짐은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 결룡은 강 지휘사에게 간간이 들어서 아는 것이야.”
황제의 뒤에 시립한 금의위 지휘사는 동요하지 않았으나 맹렬한 속도로 먹고 마시던 이관휘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섬랑은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싱긋 웃었다.
“과연. 천륜은 어쩔 수 없네요.”
황제도 동의했다.
“네 말대로다.”
“황상께서도 그러세요?”
“짐의 천수는 진작에 끝났고 억지로 살고 있다.”
황제가 난데없이 엉뚱한 말을 하자 그의 곁에서 시중들던 병필태감이 기겁했다.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대는 물론이오, 태의(太醫)들도 더 이상 손을 쓸 도리가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더냐.”
황제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섬랑을 응시했다.
“황태자는 손위 누이가 셋이나 있어 그런지 응석이 심하고 놀기를 좋아한다.”
“부럽네요.”
“잔정도 많아 남에게 휘둘리기 쉬워. 아까 환관들과 궁녀들을 지휘해 수라상을 들여온 상선감 태감 왕진을 기억하느냐?”
“네. 눈에 탐욕이 가득하던데요.”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눈치가 제법 빨라 짐이 곁에 두고 쓰던 녀석이다. 글도 제법 알기에 황태자에게 붙였거늘 글은 안 가르치고 비위만 맞춰줬지.”
“전하께서 좋아하시겠어요.”
“내가 죽었으면 황태자가 벌써 사례감(司禮監) 장인태감(掌印太監)으로 삼았을 거다.”
“그런 간신의 목을 치지 않으신 이유가 뭐죠?”
“간신도 쓸모가 있으니까. 총애를 받기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도 뛰어드는 족속 아니냐.”
“쓰기에 따라 똥 막대기도 명검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네요. 황태자 전하는 아니실 거고, 누가 그 똥 막대기를 제어하죠?”
“태후(太后)께서 그러실 예정이었으나 삼 년 전에 갑작스레 붕서(崩逝)하셨다.”
“저런. 황태자 전하를 믿고 맡기실 만큼 현명한 할머니셨나 봐요.”
“그렇기도 하고 황태자가 짐보다 더 어려워한 분이야. 그런데 그분의 부재가 황태자를 각성시켰는지 지난 몇 년 사이 많이 좋아졌다.”
“얼마나요?”
“새로운 역사(役事)를 벌일 그릇은 아니나 있던 것 정도는 능히 지킬 수 있지.”
“이해했어요. 그래서 이 사업을 성사시켜서 남겨주고 훨훨 떠나시려는 거네요.”
황제가 섬랑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경고했다.
“하나 더 이해해야 할 게다.”
섬랑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물론이죠. 다른 부모면 모를까, 황상께서 아드님이 대명을 능히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하셨는데 누가 감히 딴마음을 품겠어요. 최소한 저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좋군. 이제 사업 얘기로 넘어가자.”
“어? 이렇게 쉽게 믿으세요?”
섬랑이 황당해하자 황제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네가 아니라 짐의 벗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친분은 깊어.”
“끄응. 갑자기 무서워지네요.”
“더 좋군.”
황제는 근처에 있는 환관에게 손을 저었다.
환관은 재빨리 문밖으로 사라지더니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부드러운 인상에 또렷한 눈동자를 지닌 중늙은이였다.
황제가 그에게 명했다.
“그대는 이들과 적절한 선에서 협의해라.”
“네, 폐하.”
중늙은이가 백승무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백 단주, 오랜만이오. 그간 잘 지내셨소?”
백승무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례했다.
“덕분에 잘 있었습니다, 강 단주. 벌써 이번 사업에 관해 들으신 것 같습니다.”
중늙은이가 빙그레 웃었다.
“마침 중요한 군납이 있어 입궐했는데 황상께서 사람을 보내 하명하셨소.”
“시간을 아끼게 되어 다행이군요.”
“하하. 잘해봅시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백승무는 섬랑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 청년이 신강을 대표해서 온 섬랑입니다. 섬랑, 인사드리게나. 청람상단(晴嵐商團)을 이끄시는 강 단주시네. 관납과 군납을 거의 독점하고 계시지.”
“거의 독점요?”
“사실상 전부일세.”
“오오. 황상의 다른 패가 누구신지 궁금했는데 대단한 어용상인(御用商人)이셨네요.”
중늙은이가 부드럽게 웃었다.
“하하. 칭찬 고맙네.”
“비꼬는 것으로 안 받아들이시다니 깨어 있으신 분이네요. 맞아요, 돈을 잘 버는 게 훌륭한 상인이죠.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섬랑이에요.”
“만나서 반갑네. 강소산일세.”
섬랑이 그제야 알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어쩐지. 대륙전장(大陸錢莊)의 사총관이셨다가 독립하신 분이죠?”
“날 아는가?”
“네. 황상께서 제위에 오르셨을 때 대인이 추천하셨다고 들었는데 정말 출세하셨네요.”
“자네 말이 맞네. 나름대로 고생했지만 애초에 진옥룡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절대 못 왔을 걸세.”
강소산의 눈이 부드럽게 빛났다.
“그리고 그건 자네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렇긴 하죠.”
“백 단주도 그럴 것이오.”
“맞소, 전부 정광 사형 덕분이오.”
백승무까지 수긍하자 강소산이 제안했다.
“정족상단과 신강은 진옥룡과의 인연으로 묶여 있소. 황상께서도 적절한 선에서 협의하라고 하셨으니 좋게 좋게 정해봅시다.”
백승무도 섬랑도 찬성했다.
허나 이익을 나누는 일이 마냥 좋게 논의될 리 있나.
더구나 강소산과 백승무는 천하에서 손꼽히는 거상 아닌가?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소만. 서로에게 공평하고 말이오. 백 단주의 생각은 어떻소?”
강소산의 절충안을 백승무가 정색하며 반박했다.
“강 단주, 욕심이 과해지신 것 같습니다. 본 상단은 사마련과 낭인들은 물론이오, 무림맹과 정의회에도 몫을 떼어줘야 하는데 청람상단이 그렇게 많이 가져가 버리면 뭐가 남겠습니까?”
“백 단주야말로 만뇌(萬腦)와 어울리더니 사람이 변하셨구려. 정족상단은 그곳들과만 나누면 되나 본 상단은 천하에 산재한 수많은 상방과 상단, 호족을 어르고 달래서 손을 잡아야 하잖소. 남는 게 없는 건 이쪽이외다.”
여기에 막무가내인 것으로 따지면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섬랑이 가세했다.
“왜 본교는 쏙 빼놓고 얘기하세요? 통행세만 먹고 떨어지라는 거예요? 중원 물자를 어떤 가격으로 얼마나 공급하실지 알려주셔야죠.”
“아니, 그 복잡한 것을 지금 어떻게 계산하는가?”
“그런 세부적인 건 중요한 사안부터 정리하고 얘기하세.”
두 거상이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가며 타일렀으나 섬랑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대략적으로나마 제시해 주세요. 예를 들면 비단 같은 거요. 아니면 안 할 거예요.”
“……!”
이제 와서 판을 엎겠다고 협박하다니!
그것도 황제 앞에서!
하지만 황제는 웃음을 머금고 구경하고 있었다.
“재밌군. 강 지휘사의 감상은 어떻나?”
“소신은 황상의 칼이자 방패일 뿐이옵니다.”
황제가 혀를 찼다.
“딱딱하기는. 예전의 그대는 안 그랬는데 갈수록 심해지는군. 짐에게 계속 매여 있다 보니 이렇게 변한 건가?”
“폐하, 참람한 말씀 거두어주옵소서. 그저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흐음. 그대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황제는 두 거상과 논쟁하고 있는 악소(惡少)를 불렀다.
“섬랑, 잠시 와보거라.”
“네, 폐하.”
섬랑이 기다렸다는 듯 바로 오자 황제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짐의 말을 이렇게 잘 들을 줄은 몰랐구나.”
“이러면 제 편을 조금이나마 들어주실 것 같아서요.”
“참고하마. 강 지휘사,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해라.”
지휘사가 명을 따르자 황제는 섬랑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똥 막대기에 대해 할 말이 있다.”
“상선감 태감 왕진요? 지금 가서 죽일까요? 아니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숨만 붙여놓을까요?”
“그럴 거면 진작에 그랬지. 아무도 모르게 해치워도 황태자가 서운해할 거다.”
“아, 전하께선 잔정이 많다고 하셨죠. 그럼 어떻게 해드려요?”
황제가 담담히 설명했다.
“사업이 확정되면 왕진을 서역으로 보내 타국들과 정기적인 교역을 할 수 있도록 길을 닦게 할 거다. 쉽게 말해 사절로 보내는 것이지.”
“꽤 큰 규모의 사절단이겠네요.”
“정화(鄭和)의 대원정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천축(天竺:인도), 파사(波斯:페르시아), 구주(歐洲:유럽)까지 돌려면 작아선 안 되겠지. 왕진을 필두로 필요 없는 자들로 채우면 충분할 게야.”
섬랑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아하. 그 먼 길을 갔다가 혹시 실수라도 해서 타국과의 관계가 안 좋아지면 곤란해지시겠네요. 그럴 바엔 중간에 사고를 당하는 게 낫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게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지.”
“사람뿐만이 아니죠. 먼 길이니만큼 수많은 물자를 싣고 갈 텐데 아까워서 어떡해요?”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줍는 사람은 큰 이득을 보게 되니 헛되이 버리는 건 아니다.”
“그쪽은 그래도 황상은요?”
“누가 주을지는 몰라도 양심이 있으면 절반은 돌려주겠지.”
섬랑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호언장담했다.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강호의 도리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이군. 가서 하던 일을 해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섬랑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두 거상 옆에 나타나 논쟁에 끼어들었다.
황제는 그 모습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비로서 한시름 놓았군.”
지휘사가 고개를 숙였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짐도 지휘사를 축하하고 싶다. 무엇 하는가? 짐처럼 아비 노릇을 하지 않고.”
“……!”
지휘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병필태감이 그 모습을 보더니 전음을 보냈다.
-빨리 가시오.
-내 임무는 폐하를…….
-황상을 지키는 건 그대뿐만이 아니오. 무엇보다 황상께서 명하셨잖소. 아비의 임무를 완수하라고.
병필태감의 얼굴을 뒤덮은 주름들이 더 깊게 파였다.
-빨리 가보시오. 힘들게 날아온 어린 새가 쌀 한 톨 안 주는 땅에 다시 돌아올 것 같소? 차후 지휘사가 그 새에게 먹이를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도 그때는 갈 수 없을 게 분명하오.
-…….
병필태감의 말대로였다.
황제를 지키는 금의위 지휘사가 자금성을 어떻게 떠나겠는가?
지휘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짧지만 먼 길을 걷다가 지휘사가 도착한 곳에는 어린 새라고 하기엔 너무 커버린 청년이 있었다.
이관휘이자 강주유인 청년은 떨리는 눈으로 아비를 보다가 간신히 물었다.
“소자가 개방에 몸담은 걸 알고 계셨습니까?”
금의위 천호에서 어느덧 지휘사가 되어버린 강대환은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 권력으로 그 정도 일도 모를 줄 알았더냐?”
“헌데 왜 소자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네가 정말 돌아오고 싶었으면 어떻게든 그랬겠지. 네 삶에 간섭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관휘의 음성이 침울해졌다.
“소자를 포기하신 것으로 들립니다.”
“네 스스로 내 앞에 서지 않으면 언제가 그랬을 테지만…….”
강대환은 머뭇거리다가 손을 들어 아들의 어깨를 잡았다.
“너는 지금 내 손이 닿는 곳에 있구나.”
“……!”
“생각나면 언제든 들러라.”
“……아버지.”
“이왕 개방에 발을 들였으니 최고의 거지가 되고.”
“아니, 그건…….”
이관휘가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을 떠올리며 설명하려 하는데 섬랑이 크게 외쳤다.
“좋아요! 대충 논의가 끝났으니 황상께 인사드리고 그만 가죠! 이 소협, 뭐 해? 빨리 떠날 준비해.”
“어, 어디를 간단 말인가?”
섬랑이 환하게 웃었다.
“어디긴 어디야. 무림맹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