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4화
집으로
과거 정광은 명념반추대법(銘念反芻大法)을 펼쳐 천신혁련가의 무공들과 전생에 창안한 절기들을 섬랑의 뇌리에 모조리 심어줬다.
천하에 이런 기연이 또 있을까, 섬랑은 감동에 젖어 눈물을 흘릴 뻔했으나 날로 먹을 수 있을 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형(形)과 법(法)만 새긴 것이기에 궁리와 수련을 통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평생을 바쳐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 그런 판국에 다른 걸 배울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진법에 문외한이라고 놀림 받긴 싫어서 나민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그녀의 반응은 차가웠다.
‘진법은 몸이 아니라 머리로 익히는 것. 소교주는 자질이 없습니다.’
‘아니, 일단 시도라도…….’
‘시간 낭비일뿐더러 하늘을 나는 새가 왜 강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부러워합니까?’
나민의 가르침은 간단했다.
‘소교주는 타고난 승부사입니다. 승부사란 상대의 약점을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칠 시기를 자연스럽게 느끼는 존재. 진법이 앞을 가로막으면 소교주의 감이 말하는 대로 행하십시오.’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섬랑은 그 후 나민이 알려준 방법으로 그를 막아서는 진들을 전부 깨부술 수 있었다.
대인이 훌륭한 진이라 인정하고 개량까지 해줬다는 금의수호팔진(錦衣守護八陣)이라고 다를 리 있나.
‘그 대인의 진짜 제자가 나야.’
섬랑은 활짝 웃으며 신형을 날렸다.
동시에 마혼(魔魂)을 개방해서 전신에 검은 화염을 둘렀다.
그가 무시무시한 마기를 발산하며 쇄도하는데도 금의위 무장들은 군기가 꺾이지 않았다.
“자(刺)!”
한 백호(百戶)의 명과 함께 진의 선두를 맡은 무장들이 창을 강하게 내질렀다.
수십 개의 창날이 허공을 찢으며 날아오자 섬랑도 응수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절멸(絶滅)을 꺼내 바람을 일으켰다.
수라혈검(修羅血劍) 제삼초 혈풍개세(血風蓋世).
하북팽가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한결 깔끔해진 살검이 금의위 무장들의 창들과 충돌했다.
콰콰쾅!
창대들이 폭발하듯 터져 나가며 그것을 잡고 있던 손들이 피투성이가 됐다.
그 충격이 어찌나 강했는지 무장들은 손뿐만 아니라 입에서도 핏물을 뿜었다.
하지만 뒤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주(柱)! 격(擊)!”
백호의 명에 따라 그 자리에서 마보 자세를 취하며 장력을 연달아 쏟아냈다.
이열을 지휘하는 백호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진(進)! 참(斬)!”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장들이 선두에서 버티는 무장들 사이로 전진하며 도를 내려쳤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으니.
“일제사(一齊射)!”
활시위에 화살을 메기고 있던 삼열의 무장들이 일제히 도약하며 화살을 쏘는 것 아닌가!
위에서는 화살들이 폭우가 내리듯 쏟아지고 정면에선 수많은 장력들과 도기들이 광풍처럼 불어오는 장관이라니.
섬랑은 쓸 만한 무인들이 천하제일정병(天下第一精兵)이 되어 일사불란하게 공격하는 걸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금의위구나!’
하지만 딱 거기까지.
섬랑의 본능이 속삭였다.
이런 식으로 상대하다간 끝이 없다고, 차륜전(車輪戰)에 휘말려 힘만 빼다가 땅바닥에 드러눕기 전에 약점을 치라고.
그 약점이 무엇인지는 자명했다.
‘천자!’
어차피 그의 이장 앞에 서면 시험이 끝날 터.
신형을 솟구쳤다.
장력들과 도기들은 발밑으로 흘려버리고 화살비는 절멸을 휘둘러 전부 베어버렸다.
그리고 무장들이 다음 화살을 활시위에 메기고 쏘기 전.
절멸을 검집에 넣고 양팔을 활짝 펼친 뒤 날갯짓하는 것처럼 뒤로 쳐냈다.
마붕비천(魔鵬飛天) 제이식 붕정만리(鵬程萬里).
화아아악-
검은 불길로 화한 섬랑이 거침없이 황제를 향해 날았다.
“……!”
대경실색한 무장들이 위로 화살을 쏘아내고 단창을 던졌으나 대부분 빗나갔고 기껏 적중한 것은 흑염(黑焰)에 닿자마자 녹아 볼품없이 추락했다.
그러자 황제 곁에 있던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금의위 지휘사(指揮使)였다.
“훕.”
그는 짧게 숨을 내뱉으며 등에 메고 있던 단창 한 자루를 세차게 던졌다.
단창이 유성처럼 날아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섬랑을 노렸다.
섬랑의 눈에 이채가 맺히며 허리춤에서 절멸이 튀어나와 단창을 세로로 갈랐다.
콰창!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음과 함께 반으로 쪼개진 단창이 섬랑의 양쪽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지휘사가 어느새 역수로 쥐고 있던 도를 힘 있게 올려 쳤다.
칼날에서 쏘아진 시퍼런 도기가 하늘은 물론이오, 섬랑까지 그대로 양단했다.
사아악-
하지만 그것은 잔상.
섬랑은 천근추(千斤錘)의 수법으로 빠르게 떨어져 연무장 바닥에 착지했다.
“아 진짜. 거의 다 갔었는데.”
섬랑이 욱신거리는 뺨을 어루만지며 투덜대자 지휘사가 일장 높이의 단상 위에서 내려다보며 정정했다.
“거의 다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단상 위에 올라서야 황상의 이장 앞이야.”
“그래도 진은 깼네요. 거창한 이름에 비해 별것 아닌데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뭐 팔진(八陣) 중 단 일진(一陣)을 약식으로 펼친 거라고 하셨으니 감안해 드리죠. 괜찮은 진이에요.”
섬랑이 이죽거려도 지휘사는 동요하지 않았다.
“나도 진의 일부분이다. 너는 단상에 올라올 수 없어.”
사실 황제의 이장 앞까지 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금의위 무장들이 눈에 불을 켜고 섬랑을 포위하고 있었다.
서로 마주 보며 싸울 때와는 다르게 진에 가둔 상태.
섬랑이 허공에서 떨어졌을 때부터 금의수호팔진에서 일어난 기운이 그의 육신을 칭칭 옭아매고 있었다.
섬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몸에 끈끈하게 달라붙어서 거추장스럽잖아.’
이런 상황에 지휘사를 밀어내고 단상에 올라가긴 힘들었다.
설령 성공한다 쳐도 병필태감 늙은이가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본능이 다시 속삭였다.
모양새가 살짝 안 좋지만 어쩔 수 있나.
실행하려고 내공을 끌어 올리는 순간, 멀리서 사형이라면 이 상황에 어떻게 할까 상상하던 백승무가 두 눈을 부릅떴다.
“단상을 부수면 안 된다! 우리 전부 멸족돼!”
“어라? 겨우 그거 가지고요?”
섬랑은 머리를 갸웃거리고 다른 이들은 입을 떡 벌렸다.
심지어 지휘사조차 섬랑을 멍하니 내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 단상을 부술 셈이었느냐?”
“네. 제가 올라가기 힘들면 황상께서 내려오시게 하면 되니까요.”
“…….”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모양새는 좀 빠지지만 정당한 방법인데. 병필태감님이 계시니 황상께서 다치실 일도 없고요. 제 말이 틀려요?”
틀리다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황궁 쪽 사람들은 모두 분노했으나 단 한 사람은 아니었다.
황제가 밝게 웃다가 연달아 기침을 토했다.
“하하하. 쿨럭, 쿨럭.”
아까부터 그에게 내공을 불어넣고 있던 병필태감이 깜짝 놀라 간언했다.
“폐하, 아직 바람이 차갑습니다. 그만 궁으로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짐은 그대 같은 충신이 고생해 주는 덕분에 춥지 않다. 조금만 더 수고해라.”
모기가 앵앵거리는 것처럼 작은 음성이었으나 그 속에 담긴 신뢰는 크디컸다.
황송하여 머리를 조아리던 병필태감은 황제의 이어지는 말에 입을 살짝 벌렸다.
“옥좌를 조금만 앞으로 밀어라. 섬랑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다.”
“아니 되옵니다, 폐하.”
“된다. 그대와 강 지휘사가 있는데 짐이 무엇이 두렵겠는가.”
지휘사는 섬랑을 경계하느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제에게 죄를 빌었다.
“폐하, 이렇게 불경한 자세로 말씀드리는 걸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하마.”
“황상께서 앞으로 오시면 이자가 이장 거리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짐은 비록 무공을 모르지만 상황은 판단할 수 있다. 그대가 짐에게 무례를 범하면서도 상대를 경계하는 건 그만큼 강해서일 터. 섬랑은 능력을 증명한 거나 마찬가지다.”
“역시 황상! 영명하시네요!”
단상 밑에 있는 섬랑이 기뻐했으나 강대환은 물러서지 않았다.
“위험한 자입니다.”
“제가 뭘 어쨌다고 그러세요?”
“더구나 놀라운 은신술을 익힌 자를 숨기고 있습니다. 가까이하시면 안 됩니다.”
“에이, 난 또 뭐라고.”
섬랑은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명했다.
“아영(啞影), 잠깐 다른 데 가서 놀고 있어.”
“…….”
“자꾸 벙어리인 척할래? 중요한 일이야, 어서 저리 가.”
“…….”
그림자가 대답하긴커녕 흔들리지도 않자 섬랑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았다.
“싫으면 싫다고 대답이라도 하든가! 나를 원수가 아니라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맹세한 지 이십 년이 넘은 녀석이 그 긴 세월 동안 말을 스무 마디도 안 하냐?”
황제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푸석푸석한 수염을 쓰다듬었다.
“비밀수신호위인가?”
“그런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짐이죠, 짐.”
“과묵한 성품인가 보구나. 사내라면 그런 면도 있어야지.”
“사내 아닌데요. 얘는…… 아야! 호위라는 놈이 주인의 발바닥을 쳐?”
황제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인이었나. 사내와 거리를 두는 것이었군.”
“저한테만 그래요. 자기 사부한테는 얼마나 수다스러웠는지 원.”
“사부에겐 수다스러웠다고? 지금은 아니란 뜻이냐?”
“몇 년 전에 귀천하셨거든요. 윽! 야! 오희성! 너 자꾸 이럴래?”
섬랑은 그림자를 향해 삿대질하며 화내다가 손뼉을 쳤다.
“아, 맞다. 폐하, 하나만 부탁드려도 돼요?”
“말해라.”
“폐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분요. 황실수호암응(皇室守護暗鷹) 중 수응(首鷹)이죠?”
“모르는 게 없구나. 진옥룡이 그런 것도 알려주었느냐?”
“아뇨, 자오 아저씨가요.”
“하하. 그리운 별호군. 그라면 그럴 만하지.”
“어쨌든 수응께 이 녀석 좀 데려가라고 해주실래요?”
“은신술을 겨루게 하란 말이냐? 불가. 수응은 짐을 지킬 뿐, 다른 일은 안 한다.”
섬랑이 입맛을 다시며 졸랐다.
“요 녀석이 아무리 고집불통이어도 사형이 말하면 들을 것 같아서 그래요. 좀 도와주세요, 네?”
“……사형이라니? 설마?”
“전대 수응께서 당대 수응의 사부시죠? 이 녀석의 사부도 그분이거든요.”
“……!”
황제의 그림자와 섬랑의 그림자가 동시에 흔들렸다.
“허어.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구나.”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자신의 그림자에게 물었다.
“수응, 그대의 사매인 줄 몰랐나?”
그림자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답했다.
“무능한 소인을 벌하옵소서. 누군가 은신하고 있는 건 알았습니다만 수준이 높아 무공 내력은 알 수 없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그대가 무능하면 누구를 믿고 쓸까. 지금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소교주의 비밀수신호위가 조금 전 당황해서 기운을 드러냈을 때 확인했습니다. 소인과 같은 무공을 익힌 게 맞습니다.”
“그것참 재밌군.”
황제가 싱긋 웃더니 지휘사에게 위엄있게 말했다.
“지휘사는 명을 받들라.”
“네, 폐하.”
“이런 흔치 않은 인연을 저버릴 순 없으니 더 이상 짐의 결정에 반대하지 말아라.”
황제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별수 있나.
지휘사는 두 손을 들었다.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허나 소인의 호위만큼은 물리치지 말아주시옵소서.”
“허하노라. 그대의 충정엔 항상 감동하고 있다.”
황제의 옥음이 섬랑에게 향했다.
“신강에서 온 이는 어서 증명을 끝내라.”
섬랑은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듣고 단상 위에 올랐다.
지휘사가 여전히 앞을 가로막고 있었으나 어찌 됐든 간에 황제와 이장 거리.
섬랑은 정중히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왔어요, 폐하.”
“확실히 보았다.”
“동업하게 돼서 기쁘네요.”
“아직 완전히 정해진 게 아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짐은 한 손만 쓰지 않아.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아. 황상께서 가지고 계신다는 다른 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 짐이 적절히 조절할 것이니 긴장할 필요는 없다.”
황제는 화제를 돌렸다.
“진옥룡은 금의수호팔진을 자유자재로 상대했지만 너는 그 경지까진 못 오른 것 같구나. 아니, 진에 대한 지식이 적어서 그런 건가?”
“차라리 후자 쪽이 낫네요.”
“무공도 진법도 그 당시의 그보다 못하단 말이군. 어림군(御林軍)까지 있었으면 망신을 당했겠어.”
“제가요? 설마요. 지금이라도 부르시죠.”
“전부 황태자에게 붙였다.”
“후사를 확실하게 대비하시는 건가요.”
“내 몰골을 봐라.”
황제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래도 진옥룡을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속은 무척 편한 편이지. 짐의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인데 그가 있어 웃을 수 있었다.”
“저도 농 좀 하는데. 웃겨 드릴까요?”
“나쁘지 않지. 너도 황궁 밥을 먹고 싶냐?”
“물론이죠.”
“그럼 먹어야지.”
“황궁에 사특한 사교 무리를 들일 순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 허울은 잠시 벗어던져라. 지금의 너는 짐의 벗이 거둔 자다.”
황제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그런 이를 홀대할 수 있나. 짐의 집으로 가자.”